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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15화)
4장 각성(覺醒)(3)


쉬이이이익!
그때, 노인이 천성의 몸 안에서 빠져나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천성은 유가장으로 돌아가 이 일에 대해 아버지와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버지는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안 돼! 절대 다른 사람에게 힘에 대해 말해선!”
그때, 갑자기 노인이 정색을 하고는 천성에게 호통 쳤다.
천성으로서는 이제껏 처음 보는 무서운 표정이었다.
“함부로 힘을 드러내 정체가 알려지면 놈들이 너를 찾게 될 것이다! 영안이 최소한 너의 몸을 덮을 정도로 커지기 전까지는 절대 비밀로 해야 해! 안 그러면 너뿐만 아니라 가족과 네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위험해진다!”
천성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노인의 기세에 놀라 멈칫 뒤로 물러섰다.
가족까지 위험해진다는 말이 천성을 두렵게 한 것이다.
‘놈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사용할 수 없다면 이 힘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놈들은 태초의 파편을 노리는 자들이지! 그들의 힘은 세상을 뒤엎을 정도로 막강하다! 지금 너의 실력으로는 그들 중 가장 약한 졸개조차도 이길 수 없어! 물론 직접 만나지 않는 이상 널 찾아낼 수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네 힘에 대해 알려지게 된다면 놈들이 찾아올 수도 있어.”
노인은 마치 천성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평소답지 않게 진지하고 엄정한 분위기에 천성도 함부로 반박할 수가 없었다.
“태초의 파편이라는 게 대체 무엇이고, 그것을 노리는 자들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천성은 노인이 그토록 중요시하는 태초의 파편과 그것을 노리는 자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자신과 가족들의 안위와도 관계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태초의 파편은 이 우주를 탄생시킨 태초의 의지의 조각이다. 모든 힘의 근원이며, 모든 법칙의 열쇠이지! 지금까지는 네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에 봉인되어 있었다.”
천성은 자신의 목을 만져 보았다.
목걸이는 어느새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그자들의 정체는!”
“…….”
“…….”
그 순간, 노인이 다시 멍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거렸다.
천성이 휴,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지켜보니 노인은 정신이 나갔다기보다는 기억이 이가 빠진 것처럼 결여된 부분이 있는 듯했다.
생각보다 아는 것도 많았고, 평상시 행동 자체는 말짱―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꺼림칙했지만―했다.
단지 기억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는 혼돈 상태가 되는 듯했다.
아마도 그자들의 정체에 관한 것도 그중 일부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절대 다른 사람에게 알리면 안 돼! 큰 위험이 닥칠 거야!”
“하면 쓰지도 못하는 이 힘이 저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천성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영안의 크기가 몸을 덮을 정도로 커지게 되면 그땐 알려도 된다. 그 정도면 놈들과 상대해도 지지 않을 것이야.”
지금 영안은 겨우 좁쌀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을 몸을 덮을 정도로 키워야 한다니, 천성으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겁니까?”
“십 년? 이십 년? 길면 오십 년? 흐음, 아니지. 깨달음이 없으면 더 걸릴 수도 있지.”
턱을 어루만지며 말하던 노인이 천성의 따가운 눈초리를 느끼고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크흠, 좀 길긴 하지.”
천성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놈들은 너의 정체를 정확히 확인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네가 정체를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힘을 쓸 수 있지.”
순간, 노인의 눈빛이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또 반드시 써야 하기도 하고.”

노인의 목소리가 마치 머리를 파고들 듯 묘한 울림을 내며 천성의 귓가에 들려왔다.
마치 선문답과도 같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노인의 눈빛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천성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천성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힘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면서 이제는 또 힘을 꼭 써야 한다니, 대체 어쩌란 말인가.
“힘을 써도 놈들이 네가 누구인지만 모르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이야기야.”
그에 천성의 눈이 빛났다.
“정체를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정리해 보자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놈들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놈들이 움직일 수 있는 경우는 천성의 정체를 확인했을 때뿐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복면을 쓰든지 몰래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천성은 복잡한 생각을 접고 우선 철혈문도들이 기다리고 있을 유가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관도를 따라 움직이면 봉황산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천성은 노인을 무숙(無叔)이라 부르기로 했다.
계속 어르신이라 부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천성은 복잡한 생각을 접고 우선 철혈문도들이 기다리고 있을 유가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관도를 따라 움직이면 봉황산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유가장을 떠올리자 곡용천의 죽음이 생각났고, 뱀가면과 흑의인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놈들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밝혀내서 반드시 복수해야 했다.
그것만이 곡용천에게 속죄하는 길이었다.
물론, 어찌 보면 쓸데없는 죄책감일 수도 있었다.
뱀가면의 실력으로 볼 때, 자신이 나섰다 해도 구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인에게 한눈이 팔려 가족과 형제를 돌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천성은 앞으로 행동 하나를 행함에 있어서도 좀 더 깊이 생각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유가장으로 향하는 길에 천성은 무숙으로부터 지금 자신의 상태와 여러 가지 능력에 대해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횡설수설하는 와중에 천성이 새겨들은 것이지만 말이다.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첫째, 태초의 파편이라는 물질의 도움으로 천성의 몸은 새로이 구성되었다. 그로 인해 무쇠처럼 단단해지고 상처도 쉽게 재생된다.
둘째, 다섯 개의 기문이 생겨 그곳을 통해 자연지기를 받아들여 영력을 만들어 낸다. 영력은 직접 사용할 수도 있고, 영안을 통해 증폭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
셋째, 영안을 열게 됨으로 인해 감각이 몇 십 배로 확장되고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
넷째, 영안은 모든 기운의 흐름을 읽을 수 있으며, 의지의 발현을 통해 기운을 통제하고 움직일 수 있다.
다섯째, 영력은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며, 수련과 깨달음을 통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여섯째, 태초의 파편을 쫓는 무서운 자들이 있기 때문에 영안이 어느 정도 커지기 전에는 천성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된다.
일곱째, 천성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하면 태초의 파편을 노리는 자들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대략 이 정도의 내용이었다.
아직 속도에 대한 적응이 부족한 천성은 최대한 힘을 줄이고 조심해서 움직인 끝에 유가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천성이 돌아오자 궁혁도와 철혈문도들이 기쁘게 맞이해 주었다.
궁혁도의 말을 들어 보니 두 시진 만에 돌아온 것이라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편, 유가장은 그야말로 침통한 분위기였다.
흑의인들의 공격으로 사십여 명이 죽고 백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에 비해 흑의인들은 고작 스무 명 정도가 죽었을 따름이다.
게다가 호면사내의 공격으로 인해 유가장에는 온전한 건물이 몇 개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부상자와 일행들도 천막에서 지내고 있을 정도였다.
천성은 착잡한 심정으로 조남석이 누워 있는 의당으로 향했다.
“야, 이 녀석! 그래, 어디 다치진 않았느냐?”
팔이 잘린 조남석은 오히려 천성을 걱정했다.
“조 숙부…….”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괜찮다. 무림인이란 어차피 칼끝에 서 있는 인생.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어디냐. 혹시라도 복수 같은 걸랑 생각도 말아라.”
“제가 한눈팔지만 않았어도…….”
“이놈, 네 녀석이 이 숙부를 모욕하는 것이냐! 겨우 네깟 놈 도움이 없다고 내가 팔이 잘렸단 말이냐!”
조남석이 엄한 얼굴로 호통 쳤다.
천성은 조남석의 마음을 알기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첫 임무부터 네가 힘든 일을 겪었음을 안다. 하지만 넌 이제 시작일 뿐이야. 의기소침해하지 말고 더욱 분발하도록 해라. 그게 나를 돕고 철혈문을 돕는 일이야. 알았지?”
조남석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성을 달랬다.
“네…….”
천성은 착잡한 표정으로 조남석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결코 복수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반드시 놈들의 정체를 밝혀 곡용천의 피 값을 받아 낼 것이다.
결국 무림맹 추격대는 뱀가면과 흑의인들을 놓치고 말았다.
감숙의 문파들을 동원해 천라지망을 펼쳤지만, 놈들은 천률음보와 함께 마치 신기루마냥 사라져 버렸다.
결국 천성과 철혈문도들은 고통스런 기억만 안은 채 무거운 마음으로 철혈문으로 돌아왔다.

* * *

슈우우우웅!
쿠웅!
작은 울림과 함께 태산 기슭에 위치한 숲 속에 유성이 떨어졌다.
유성의 크기는 매우 작아서 주먹보다 조금 큰 정도였고, 대기와의 마찰로 인해 표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 제법 큰 폭발에도 불구하고 유성 주변엔 작은 불씨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유성이 떨어진 땅은 이름 모를 야생화들로 뒤덮여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표면이 식어 버린 어느 순간, 유성의 모습이 일그러지더니 서서히 그 모양이 변해 갔다.
꿈틀대던 표면에서 잎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더니, 잠시 후 놀랍게도 유성은 주변에 핀 야생화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유성이 변한 야생화는 햇빛을 받으며 잠시 대지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한참 대지의 기운을 마시던 야생화의 꽃잎 위로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나비는 꿀을 찾아 대롱을 길게 뻗어 냈다.
그때, 야생화의 꽃잎이 길쭉이 늘어나더니 나비를 뒤덮어 버렸다.
야생화는 발버둥치는 나비를 집어삼킨 채 다시 형체가 일그러졌다.
이리저리 꿈틀거리던 괴이한 모양의 유기체에서 얼마 후 날개가 돋고 다리가 생기더니, 어느새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를 들풀 사이에 숨어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던 두꺼비가 긴 혀를 쭉 뻗어 잽싸게 낚아챘다.
두꺼비는 나비를 삼키고는 만족한 듯 꾸룩꾸룩거렸다.
그러더니 두꺼비의 모습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꺼비는 어딘가로 통통거리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