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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16화)
4장 각성(覺醒)(4)


섬서성과 감숙성 경계의 관도 위를 흔히 보기 힘든 훤칠한 용모의 청년이 걸어가고 있었다.
거의 칠 척에 가까운 큰 키에 균형 잡힌 탄탄한 몸매, 남자다우면서도 부드러운 이목구비가 어딜 가나 소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만한 미남자였다.
청년은 언뜻 보기에도 제법 오랫동안 수련을 쌓은 듯 은은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이 잘생긴 청년이 바로 구 년 전 세 선인을 따라 화운곡으로 떠난 궁천룡이었다.
열아홉이 된 궁천룡은 아직 어릴 적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으나, 선이 조금 더 굵어지고 나이에 비해 상당히 어른스워 보였다.
천룡은 유쾌한 기분으로 오랜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구 년간의 화운곡 생활은 천룡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노력을 하지 않던 천룡은 삼선과 함께하면서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삼선은 천룡의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열심히 수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열아홉의 나이에 초절정에 다다르는 경악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냈고, 지긋지긋한 수련의 굴레를 벗어나 드디어 하산하게 된 것이다.
초절정고수라 하면 일반적으로 강호백대고수 안에 들어간다고 보아도 무방하니, 천룡은 약관도 안 된 나이에 벌써 현 무림에서는 상대할 자를 찾기 힘든 고수가 된 것이다.
그를 가르치던 세 노인도 만족할 정도의 빠른 발전이었다.
내공의 경우는 더욱 놀라웠다.
갓난아기일 때 받은 대법의 영향으로 삼단전(三丹田)이 뚫리고 세맥이 타통된 천성은 그에게 가장 최적화된 무극심법(無極心法)을 익힘으로써 이미 이 갑자 반의 막대한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
무극심법은 독특하게도 삼단전이 열린 상태에서만 익힐 수 있는 심법이었는데, 피부를 통해 호흡을 하고 기운을 흡수해서 삼단전에 동시에 쌓는, 축기에 관한 한 최고의 내공심법이었다.
두 무공 모두 삼선이 모든 것을 바쳐 일생 동안 연구한 결과물이었다.
세 사부는 천룡이 하산하기 전 여러 가지 당부를 하며 삼선의 제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하나의 동패를 줬다.
강호행을 하는 데 있어 출신이 보잘것없는 천룡에게 그 물건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자신을 걱정해 주던 세 사부의 모습을 생각하니 천룡의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화운곡을 떠나기 전 삼선이 자신에게 당부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현재 강호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구천마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정마대전 후 마교는 심각한 타격을 입고 신강으로 물러났다.
패배의 후유증으로 수많은 고수를 잃은 마교는 사분오열되었고, 십여 년간의 내분 끝에 가장 강력한 전력을 보유한 아홉 개의 가문이 중심이 되어 구천마련(九天魔聯)을 세웠다.
그리고 그간 세력을 키우며 조용히 신강에 웅크리고 있던 그들이 요즘 들어 감숙과 청해에서 심심치 않게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또한 사혈맹(邪血盟)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도처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삼선은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라 했다.
가까운 시일에 난세가 도래할 것이고, 중원 전체를 휩쓸 큰 혈겁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 경고했다.
삼선은 천룡이 그 혈겁을 막고 불쌍한 백성들을 구해 내야 하며, 그것이 천룡의 운명이라 했다.
하지만 사실 천룡은 아직 그런 이야기를 실감할 수 없었다.
‘기다려라, 강호야! 천하제일 후기지수 궁천룡이 나가신다!’
천룡은 강호에 이름을 날리고, 수많은 미녀들을 얻겠다는 웅장한 포부를 갖고 발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음하하하하하!”

* * *

방 안에 두 사내가 마주하고 있었다.
책상에 앉은 중년 사내는 사십 초반쯤 되어 보이는 선이 굵은 외모와 하얀 귀밑머리가 인상적이었는데, 그가 바로 현 무림맹주이자 십대고수의 꼭대기에 위치한 이제(二帝) 중 한 명인 남궁영이었다.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학창의 차림의 장년인은 무림맹의 군사인 제갈휘였다.
“놈들의 정체는 아직 파악을 못했는가?”
남궁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놈들의 움직임이 워낙에 신출귀몰해서 종적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구천마련의 짓이라 생각하는가?”
“아무래도 감히 맹의 행사를 방해할 만한 세력은 그곳뿐이겠지요. 특히 근래 들어 감숙 지방에서 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던 와중이니…….”
“이번에 사용된 수법이 처음 보는 해괴한 것이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구천마련의 짓이 아닐 확률도 있지 않은가?”
“물론 그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제삼의 세력이 개입했을 수도 있지요.”
보고에 의하면, 놈들이 사용한 기괴한 술법은 제갈휘로서도 처음 접하는 것들이었다.
사람이 지진을 일으키고 연기로 변하다니.
그렇다고 해서 진법에 의한 환영도 아니었다.
“그러나 저러나 천률음보가 실존할 줄이야……. 만일 그 전설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그 책을 회수해야 하네. 혹시라도 사마외도의 무리들이 책을 얻게 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야.”
남궁영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일단 비첩대(秘諜隊)의 인원을 최대한 동원해서 놈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갈휘는 굳은 표정으로 맹주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 * *

곡용천의 시신을 접한 가족은 너무도 어이없는 사태에 오열했다.
궁혁제는 직접 무릎을 꿇고 식구들에게 사죄했다.
아울러 천성과 철혈문도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곡용천의 상을 치르고 난 후 천성은 일단 새로운 능력을 단련하는 데 힘썼다.
뱀가면과 그 무리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안으로 인해 얻게 된 능력은 참으로 놀라웠다.
천성은 현재 오감이 극대화되어서 시력과 청력, 기감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는 상태였다.
무숙의 말에 의하면, 정신을 집중할 경우 천리안이나 투시도 가능하며, 삼백 장이 넘게 떨어진 거리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했다.
또한 염동력(念動力)이라 불리는 영력의 근본적인 힘을 일부나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궁극적으로는 기의 흐름을 장악하고 물체를 파괴하거나 움직이는 힘이었는데, 현재 천성은 작은 물체를 움직이는 정도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염동력의 수련은 작은 자갈을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처음에는 한 개부터 개수를 점점 늘여 가면서 각각의 개체를 따로따로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하다 보면 기운을 조절하는 데에도 익숙해지게 될 것이다.”

수련 중 눈빛이 돌아온 무숙은 염동력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 힘이 발전하게 되면 상대방의 기운을 봉인할 수도 있으며 물체에 흐르는 기운을 충돌시켜 물체를 파괴할 수도 있었다.
천성은 지속적으로 여러 가지 능력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중 가장 힘이 드는 것은 속도에 적응하는 문제였는데, 감각이 아무리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음속으로 이동하면서 장애물들을 피해 다니는 건 천성에게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느리게 시작한 후 점점 속도를 높여서 단계적으로 적응하는 연습을 해야만 했다.
이리저리 부딪치고 구르며 고통 속에서 신음했다.
아마도 튼튼한 몸이 아니었다면 버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음속을 낼 만큼 적응이 되지 않아서 익숙해지는 데는 좀 더 시간이 걸릴 듯했다.
예민해진 청각과 시각도 처음엔 천성을 혼란스럽게 했으나 두 감각은 생각보다 빨리 적응되었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는 이상 평상시에는 그저 보통 사람들보다 대여섯 배 정도 민감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처음에는 제법 신경을 써야 했지만, 결국 시간이 갈수록 점차 적응이 되어 갔다.
천성이 가장 즐겁게 임했던 훈련은 영력을 이용해 기를 압축하여 발사하는 연습이었는데, 무숙은 이를 기탄(氣彈)이라 불렀다.
기탄은 염동력을 이용한 기의 운영에서 가장 기초적인 과정이었다.
그 위력이 생각보다 상당해서 아직 시작에 불과함에도 작은 나무 정도는 우습게 부러뜨렸다.
무숙이 말하기를, 꾸준히 연습하면 훗날 기를 더욱 압축시켜 칼날과 같이 만들 수도 있다 했다.
오늘도 천성은 평상시처럼 뒷산에서 속도에 적응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눈앞으로 사물들이 흐릿하게 천성을 지나쳐 갔다.
시야가 갈수록 좁아지고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온몸의 근육들은 한계를 외치고 있었다.
“으아아앗!”
잠깐 동안 집중이 흐트러진 탓이 나뭇가지들이 순식간에 천성의 온몸을 두드렸다.
가늘고 여린 나뭇가지에 불과했지만 천성에겐 쇠몽둥이로 맞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쿠당탕!
보이지 않을 정도의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던 천성의 몸이 균형을 잃고 땅바닥에 튕겨져 십여 장을 더 날아가 처박혔다.
다른 사람이라면 온몸이 박살 났을 만한, 큰 충격이었다.
“에잉, 아직 음속은 무리구나. 하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어.”
음속에 적응하고 지속적인 수련을 하면 그것을 능가하는 속도를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성에게는 아직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가끔 정신이 맑아진 무숙의 말에 의하면, 궁극적으로는 빛의 속도를 넘어서서 시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나 이룰 수 없는 단계였고, 너무도 먼 이야기였기다.
아직 갈 길이 먼 천성에겐 일단 음속을 돌파하는 게 먼저였다.
“아이구, 허리야. 이거 정말 적응 안 되네요.”
흙투성이가 된 천성이 인상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많은 나무들을 피해 달리는 연습은 천성이 자신의 몸을 통제하고 움직이는 데 실마리를 주었다.
속도에 적응하는 수련은 감각의 조절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속도를 올린 상태에서는 온 정신을 집중해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 올려야 장애물을 피해 세밀하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빠른 움직임을 버텨 내야 하는 근육과 뼈도 덩달아 강화되고 있었다.
태초의 파편에 의해 새로 구성된 천성의 육체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 있었다.
적응만 되면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움직임들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잠시 바닥에 드러누운 상태로 천성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간 확인하게 된 또 한 가지 사실은, 역시 무숙은 천성의 눈에만 보인다는 것이다.
궁혁제와 궁혁도, 철혈문도들은 무숙의 존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로 인해 천성은 무숙과 대화를 할 때, 상당히 신경을 써야 했다.
허공에 대고 혼자 이야기를 했다가는 다른 사람의 눈에 미친놈처럼 보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무숙이 천성의 의식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천성이 직접 입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아직도 가끔 심란하게 왔다 갔다 떠들어댈 때면 천성을 매우 곤란하게 했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기억이 결여되어 있는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한에는 좀 경망스러울 뿐, 정상인과 다를 게 없었다.
“휴, 다시 움직여 볼까.”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천성이 다시 일어서 훈련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진쯤 땅바닥을 몇 번 더 구른 후 음속 훈련을 마친 천성은 편한 자세로 앉아 감각을 확장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소리들이 천성의 귀로 들어왔고, 수많은 기운들이 천성의 기감을 건드렸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바람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 여러 산짐승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천성의 귀에 들려왔다.
조금 더 정신을 집중하자 감각의 범위가 백 장 가까이 늘어났다.
그곳에 철혈문이 있었다.
‘응? 왜 이리 시끌시끌하지?’
천성이 소란스러운 철혈문에 정신을 집중했다.
문도들의 웃음소리와 들뜬 기운이 느껴지고, 백부인 궁혁제와 아버지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속에 낯설면서도 왠지 익숙한 하나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엇! 형이 돌아왔구나!’
천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후후, 얼마나 변했는지 기대되는데!”
삼선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수련을 죽기보다 싫어했던 천룡이다.
아마도 고생 좀 했을 것이다.
또 그만큼 강해졌을 것이다.
천성은 빠른 속도로 철혈문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