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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18화)
5장 선검문(2)


천성은 영안을 열어 감각의 범위를 넓혀 갔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줄기가 나뭇잎에 스치는 소리들이 귀를 간질였다.
비에 씻긴 맑고 시원한 공기가 천성의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기문으로 출입하는 자연지기가 영력이 되어 천성의 미간으로 치달았다.
순간, 다른 때와는 달리 희미한 선들이 영안에 잡혔다.
그간 소리와 기운으로만 사물을 파악할 수 있던 천성인데, 어쩐지 눈으로 보듯 하나둘 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곧이어 색깔을 잃은 회색의 풍경들이 서서히 영안에 잡히기 시작했다.
‘엇! 이건 뭐지?’
[오호, 투시(透視)와 천리안(千里眼)의 전조(前兆)구나! 조금 더 집중해 보거라!]
어느새 머릿속에 들어간 무숙이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투시라면 물체를 꿰뚫어 보는 것이다.
만일 이 능력을 각성하게 된다면, 건물 안의 움직임이나 은신한 살수들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옷도…….
“헉!”
어쩐지 얼굴이 붉어진 천성은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고 미간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마치 여러 장의 영상을 한꺼번에 보는 듯 수많은 풍경들이 겹쳐져 천성의 머리로 유입되었다.
그중에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아내야 했다.
극도의 집중력에 천성의 뇌가 빠르게 회전하고, 미간이 간질거렸다.
[호오, 느낌이 좋은데!]
여러 풍경들 중 백여 장 뒤로 언뜻 불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영안으로 살핀 회색의 불빛은 마치 먹으로 검게 칠한 그림 위를 송곳으로 긁은 듯한 느낌이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불빛 주변의 풍경이 점점 천성의 눈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시야가 좁아지고 불빛이 확대되며 그 뒤로 관제묘인 듯한 건물이 보였다.
약간의 두통이 엄습했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성공이구나!]
‘이게 투시인가?’
아직은 미흡했기에 그다지 큰 위력을 느낄 수 없었다.
투시라기보단 천리안에 가까운 것 같았다.
[천리안이면 어떻고, 투시면 어떻겠냐? 일단 보인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 혹시, 다른 걸 노린 것은 아니겠지?]
‘다른 것이라니요!’
천성이 조금은 가슴이 찔려 급히 부인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관제묘 근처에 몇 필의 말과 한 대의 검은색 마차가 보였다.
불빛은 아마 그들이 피운 모닥불인 모양이었다.
일행이 걸어가는 방향에 위치했기에 잠시 후 천룡도 알아차렸다.
“앞쪽에서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래? 잘하면 비를 피할 수 있겠구나. 혹시 모르니 일단 조심들 해라.”
궁혁도가 일행에게 주의를 줬다.
얼마 움직이지 않아 관제묘가 보였다.
생각보다 제법 규모가 컸다.
담장과 뜰이 딸려 있고, 뜰 한가운데에는 향을 피울 수 있는 커다란 동관마저 있었다.
문이 열린 사당 안에는 같은 무리인 듯한 사람들이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뜰에 피웠던 모닥불은 빗방울에 씻겨 거의 꺼진 상태였고, 향불만이 은은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각자 무기를 몸에 소지한 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방립을 깊게 눌러쓰고 있는 모습이,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인물들로 보였다.
천성 일행이 관제묘로 다가서자 다섯 무사가 관제묘 밖으로 달려 나오더니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마차 앞을 가로막았다.
“하하, 안녕들 하십니까? 죄송합니다만, 함께 비 좀 피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입구의 지붕만 빌려도 상관없습니다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궁혁도가 무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얼핏 보아도 보통 무인들이 아닌 듯 보였기에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었다.
그때, 관제묘 안쪽에서 거구의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자는 무리 중 유일하게 방립을 쓰지 않고 얼굴을 드러냈는데, 키가 큰 편인 천룡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엄청난 덩치였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눈은 ㅤㅌㅞㅇ하니 들어간 게, 마치 머리카락이 덥수룩한 해골을 연상시켰다.
“중요한 분을 모시고 있으니 다른 데로 가 보거라.”
위협이 담긴 저음의 굵직한 목소리로 거한이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근방의 공간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 거인의 공력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 궁혁도는 씁쓸한 얼굴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저런 자들과 괜한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하하, 사해가 동도인데 조금만 봐주시지요, 이 밤에 어찌 다른 곳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대신 조용히 비만 피하고 가겠습니다.”
그때, 천룡이 넉살 좋게 나섰다.
궁혁도가 깜짝 놀라 말리려 했으나,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든 천룡은 떡하니 거인 앞에 마주 섰다.
괴인의 퀭한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흐흐흐,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막힌 귓구멍을 뚫어 줘야 정신을 차릴 놈들이로구나!”
궁혁도는 괴인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심장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한편, 천성은 대책 없는 천룡의 행동에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덜렁대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그만!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거라. 그냥 한쪽 구석을 내주고 비를 피하라 해라!”
그때, 무사들이 가로막고 있던 마차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이들이 모시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 바로 그 여인인 것 같았는데, 목소리를 들어 보니 나이가 많지는 않아 보였다.
천성의 눈에 잠깐 동안 이채가 떠올랐다.
이들의 주인이 여인이라는 것에 조금 놀랐기 때문이다.
별다른 장식도 없는 투박한 마차에 설마 여인이 타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존명!”
여인의 한마디에 거구의 사내가 절도 있게 뒤로 물러났다.
“조용히 쉬다 가거라.”
거한이 눈에서 흉흉한 안광을 빛내며 천룡 형제에게 으르렁거렸다.
“하하,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지요.”
천룡이 마차를 향해 읍을 했다.
일행은 관제묘 안까지 들어가지 않고 지붕 밑에서 등을 기댄 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사실 관제묘가 자신들의 소유도 아니건만, 가라 마라 멋대로 구는 괴인의 행동이 천성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흠, 저자들의 기운이 이상하구나!]
그때, 무숙이 굳은 목소리로 천성에게 말했다.
‘네. 저도 느꼈는데, 일반 무림인들과는 다른 기운이군요.’
[이건 영력을 사용하는 자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기운인데…….]
무숙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영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저 말고 또 있다는 말씀입니까?’
[흠, 모르겠군 무언가 영력의 기운과 비슷한데 어긋나 있는 듯한 느낌이군. 혹시라도 태초의 파편을 노리는 자들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일단은 조심하면서 놈들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
‘알겠습니다.’
천성은 감각을 열어 놓은 채 낯선 무리들을 주시했다.
[확실히 영력과 비슷한데, 무언가 이질적이야. 어차피 네가 영력을 크게 사용하지 않는 이상 너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최대한 힘을 숨기도록 해라.]
‘네.’

비는 새벽이 되어서야 그쳤다.
결국 천성 일행은 쪼그리고 밤을 지샐 수밖에 없었다.
낯선 무리들은 새벽 일찍 마차를 호위하며 서둘러 관제묘를 빠져나갔다.
“흠, 묘한 자들이로구나. 혹, 흑암문과 관계된 이들은 아닐지 걱정되는구나.”
궁혁도가 불안이 서린 얼굴로 말했다.
천성도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영력을 사용하는 무리가 선검문의 일과 관계가 있다면, 이번 사건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내막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만큼 만만치 않은 상황이 될 것이다.
부디 아니길 빌며 천성은 고개를 돌렸다.
간단하게 건량으로 배를 채운 일행은 아침 일찍 다시 길을 떠났다.

* * *

부현(富縣)의 북쪽에 위치한 선검문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오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멈추시오! 어디서 오는 뉘시오!”
철혈문 일행이 정문에 다가가자 네 명의 무사가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신분 확인을 요구했다.
“감숙 숭신의 철혈문에서 미흡하지만 선검문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궁혁도는 포권을 한 후 선검문에서 보낸 서찰을 무사들에게 보여 주었다.
“철혈문이라…… 아, 태상 문주님의 제자가 차린 감숙에 있는 무관 아니오? 흠, 한데 네 분만 오신 게요?”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중년 무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일행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한 손이라도 아쉬운 상황이라지만 겨우 네 명이, 그것도 두 명은 새파란 애송이가 도와준답시고 왔으니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하하! 저희 문파가 워낙 작다 보니……. 그래도 태사부님께서 어려움을 겪고 계신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여 이리 달려왔습니다.”
궁혁도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사가 알기로 철혈문은 태상 문주께서 제법 도움을 주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규모가 작아서 현 문주인 호연백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무사는 워낙 작은 무관이라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아마 태상 문주님이 감숙을 여행하다 불쌍한 고아들을 거두어 돌보신 거라 했지?’
순간, 무사의 머릿속에 철혈문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큼, 마음이라도 고맙구려. 그럼 들어가 보시오. 어이! 장오, 자네가 이분들을 숙소로 안내해 드리게.”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에 발린 인사를 한 무사가 길을 열어 일행을 들여보냈다.
철혈문을 무시하는 것이 빤히 보여 천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천성을 보며 천룡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후 안내무사를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호천덕의 생일 때 한두 번 궁혁제를 따라왔던 기억이 있으나, 워낙 어렸을 때라 보이는 풍경들이 전부 새롭게만 느껴졌다.
“태상 문주님께 인사를 드리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궁혁도가 안내를 맡은 장오라는 무사에게 물었다.
“태상 문주님께선 지금 저희를 돕기 위해 오신 강호 협객분들을 접대하느라 바쁘십니다. 일단 기별을 넣어 드릴 테니 숙소에서 기다리십시오.”
장오라 불린 무사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태상 문주님께 기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철혈문 일행은 무사를 따라 자신들이 머물 숙소로 향했다.
무사가 안내한 숙소는 네 명이 함께 사용하기엔 조금 좁은 듯 느껴지는 방이었다.
선검문의 입장에서 본다면 도움을 주러 온 여러 강호인들 중 철혈문의 배분이 제일 낮았고, 그 전력 또한 보잘것없었기에 숙소 또한 가장 작고 허름한 곳으로 배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방 안쪽은 비교적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지내기에 큰 불편은 없었다.
“에이…….”
일중이 못 마땅한듯 얼굴을 찌푸렸다.
선검문의 입장도 이해가 가긴 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도우러 온 자신들이 아닌가.
무시를 당한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 아니더냐, 태사부님을 돕기 위해 온 것이니 다른 것은 개의치 말자. 우리의 힘이 흑암문을 상대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야.”
궁혁도가 일중을 달랬다.
“네, 형님. 좀 서운하긴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천룡과 천성 역시 자존심이 상했으나, 궁혁도 때문에 함부로 표시를 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