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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19화)
5장 선검문(3)
일행이 간단하게 짐을 정리하고 두 시진 즈음 지난, 저녁 때가 되어서 장원의 무사가 그들의 숙소로 찾아왔다.
“식사는 연무장 옆의 식당에서 함께 하셔야 합니다. 저녁을 드시려면 지금 식당으로 가십시오. 매일 아침은 진시(辰時:오전 7시―9시), 점심은 미시(未時:오후 1시―3시), 저녁 시간은 유시(酉時:오후 5시―7시)이니 그 시간 동안 아무 때나 가서 드시면 됩니다. 오늘은 첫날이라 길을 잘 모르실 테니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무사는 말을 마치고 앞장서 걸어갔다.
일행은 무사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제법 크기가 컸는데, 안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선검문의 무사들이 여럿 보였고, 다른 곳에서 온 듯 보이는 자들도 몇 명 있었다.
식사는 배식을 받아 자신의 자리로 가 먹는 방식이었다.
일행은 각자의 식사를 받아 한쪽 구석의 빈자리에 앉았다.
“흑암문의 공격이 아흐레밖에 남지 않아 그런지 무사들에게서 긴장감이 느껴지는군요.”
일중이 잔뜩 가라앉은 분위기를 보며 말했다.
“그럴 테지. 아무래도 흑암문의 전력이 만만치 않으니.”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어, 이게 누구십니까! 궁 부문주 아니십니까?”
입구 쪽에서 선검문 무사 복장의 중년인이 일행에게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아! 오 부대주님, 안녕하십니까.”
궁혁도가 밝은 얼굴로 중년인의 인사에 화답했다.
중년인은 철혈문을 자주 오가는 선검문 경비대의 부대주인 오덕만이었다.
그는 호천덕의 심부름이나 연락을 전하기도 하며 철혈문을 꽤 많이 드나들었기에 천성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작고 말랐던 천성을 귀여워해서 올 때마다 이것저것 선물을 사주기도 했기에 천성도 오 숙이라 부르며 잘 따르곤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는 사람 하나도 없이 서먹서먹해하던 일행에겐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다.
오덕만은 자신의 식사를 받아 일행이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일중과 궁혁도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오덕만이 천성을 발견하고는 사람 좋은 미소로 안부를 물었다.
“네. 오 숙께서도 별일 없으셨죠?”
“천룡아, 인사드리거라. 선검문 경비대에 계시는 오 부대주님이시다. 여러모로 철혈문을 많이 도와주신 분이란다.”
궁혁도가 천룡을 소개했다.
“궁천룡이 오 숙께 인사드립니다!”
천룡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아하, 자네가 첫째인 천룡이구만. 아이 때 몇 번 본 게 전부라 알아보지 못하겠네그려. 헛헛, 그동안 선인들께 무공을 배우러 집을 떠나 있었다며? 이젠 돌아온 겐가?”
“네. 구 년 동안의 수련을 마치고 이번에 하산했습니다.”
“오호, 그럼 자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겠구만!”
오덕만이 박수를 치며 기대에 찬 표정으로 천룡을 쳐다보았다.
오덕만의 호들갑에 식사하던 무사들의 관심이 일행에게 향했다.
처음 보는 청년들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고,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하하, 제가 자질이 부족하여 이제 겨우 벽을 하나 넘었을 뿐입니다.”
천룡이 그답지 않게 겸손하게 대답했다.
“허, 벽을 넘다니? 그 나이에 대단하구만! 이번에 자네가 많은 도움이 되겠군그래! 선검문엔 참으로 잘된 일이야!”
오덕만은 천룡의 경지가 초절정을 넘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절정의 벽을 넘었다는 말로 오해했다.
사실 천룡의 나이에 절정의 벽을 넘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대단한 일이었다.
현재 최고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오룡(五龍) 역시 대부분 그 경지가 절정이었다.
물론 그 깊이의 차이는 있겠으나 천룡이 절정을 넘어섰다는 것은 강호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선두권에 속하는 실력을 갖추었다는 이야기였다.
천룡의 대답에 주변이 잠시 술렁였다.
체격은 제법 크고 단단해 보이긴 하지만 기세가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는데 절정의 경지라니, 대부분은 젊은 녀석이 괜한 허풍을 치는구나 하고 이내 관심을 거뒀다.
천룡이 이미 자신의 기세를 갈무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식당 중앙에는 한 명의 중년인과 네 명의 젊은이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중 열일곱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천룡 일행을 바라보았다.
“벽을 깼다면 벌써 절정에 달했다는 건데…… 어쩜, 저 나이에 대단하네요!”
천룡의 준수한 외모와 굳건하고 단단해 보이는 분위기에 호감을 느낀 소녀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흥, 거짓말일 거야. 저 정도 기세면 나보다도 아래인데 허풍을 떨다니,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바보로 여기는 모양이군!”
소녀 옆에 앉아 있던 호리호리한 청년이 다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오라버니, 다 들리겠어요!”
그에 소녀가 자신의 오라버니를 조용히 말렸다.
“석보의 말이 맞을 게다. 절정의 경지가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그리고 유 숙부님과 우리 아버님을 보면 알 수 있듯 절정 무인의 기세는 실로 대단하지. 그런데 저 청년의 기세는 많이 봐줘야 일류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건너편에 앉아 있던 얼굴이 각진 근육질 청년이 소녀의 오라버니를 두둔했다.
그들의 정체는 선검문의 소공자인 호무강과 그 여동생 호유설, 그리고 선검문을 돕기 위해 온 대연문의 고수 유송문과 대연문주의 자제들인 감석보, 감세령 남매였다.
대연문은 화산의 속가로, 감석보는 호유설의 정혼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연문은 이번 사태에 절정고수인 유송문과 정예 무사 삼십 명을 지원하게 된 것이다.
절정고수 유송문이 포함된 대연문의 전력은 선검문에게는 무척 큰 도움이었다.
문제는 이들의 이야기가 철혈문 일행이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는 것이었다.
경우 없는 그들의 행동에 천성이 눈썹을 찡그렸다.
“큼큼, 우리 소공자님과 대연문의 소공자 일행이십니다. 지금 흑암문의 공격이 얼마 남지 않아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라서 그런 것이니 궁 부문주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오덕만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일행에게 사과했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궁혁도가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사과하는 오덕만을 말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쓸데없이 실력이나 뽐내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니니까요. 하하.”
천룡이 호탕하게 웃으며 오덕만을 안심시켰다.
천성이 슬쩍 소공자 일행을 쳐다보니, 감석보가 오만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경우 없는 놈!’
천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괜한 소란 피우지 말고 식사나 마저 하자꾸나.”
그때, 유송문이 엄한 목소리로 감석보 일행을 단속했다.
“흥, 어차피 일전이 벌어지면 모든 게 드러날 터!”
감석보는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철혈문 일행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다.
감세령은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듯 천룡을 한 번 흘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태상 문주님께 인사는 드리셨습니까? 무척 반가워하실 텐데.”
오덕만의 물음에 궁혁도는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해 줬다.
“이런! 진즉에 저를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제가 태상 문주님께 소식을 직접 전해 드리지요. 아마 바로 부르실 겁니다.”
사실 궁씨 형제가 철혈문을 차리는 데는 호천덕의 도움이 컸다.
궁혁제가 자신의 자질이 많이 부족함을 깨닫고 낙향하려 할 때, 가정을 꾸리려면 최소한 무관이라도 운영해야 한다면서 목돈을 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그 돈으로 시작한 무관이 커져서 지금의 철혈문이 된 것이었다.
철혈문이 작은 문파의 규모로 자라는 데도 호천덕은 아낌없는 도움을 주었다.
일거리를 소개시켜 주고, 공동파의 기본 무공을 가르칠 수 있도록 본산에 허락도 얻어 주었다.
그 은혜란 이루 헤아릴 길이 없었다.
그런 호천덕이었기에 궁혁도 일행이 왔음을 안다면 무척 기뻐할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오 부대주님.”
궁혁도가 오덕만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한데 흑암문과는 대체 어찌 된 사정입니까?”
일중이 오덕만에게 흑암문과의 일을 물었다.
일행 역시 궁금한 표정으로 오덕만을 바라보았다.
대충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덕만은 목이 타는 듯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게 말이지, 우리 무사들이 선검문에서 관리하는 화운객잔이라는 곳을 순찰하러 갔는데, 그 흑암문의 무도한 제자 놈들이 객잔에서 부녀자를 겁탈하려는 것을 발견한 게야. 그래서 그걸 막으려던 우리 측 무사 네 명과 흑암문의 제자 놈 일행 두 명이 칼부림을 하게 된 것인데, 그 와중에 흑암문 제자 놈들이 우리 쪽 무사들 검에 목숨을 잃고 말았지.”
오덕만이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이었다.
“한데 죽은 놈 중에 한 명이 하필 흑암문주 공소추의 네째 제자였던 거야.”
문주의 직전제자라면 확실히 문제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점은 흑암문주 제자 놈의 무공은 일류를 상회하고 우리 애들은 겨우 이류에 불과했는데, 신기하게도 우리 애들이 흑암문 제자 놈을 너무도 쉽게 죽인 거지. 우리 애들도 설마 놈이 그토록 쉽게 죽을 줄은 몰랐나 봐. 시간만 끌면서 지원 무사들이 오길 기다리려 했다는데, 어이없게도 단 몇 수 만에 놈들이 죽고 만 것이지.”
확실히 무언가 이상하긴 했다.
일류니 이류니 하며 무공 실력의 고하를 구분하는 방법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러한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강호 통념상 일류 무사 한 명과 이류 무사 네다섯 명이 동수를 이루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이류 무사가 일류 무사를 단 몇 수 만에 죽일 수 있었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술에 취해 있던 모양이군요?”
역시나 믿기지 않는 듯 궁혁도가 물었다.
“술에 취하긴 했지요. 하나 그리 많이 마시진 않은 모양입니다. 어쨌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큰 문제는 아니었으니까요. 흑암문주의 제자가 죽기는 했으나 선검문 영역까지 함부로 들어와 부녀자를 겁탈했으니, 흑암문 입장에서도 대놓고 선검문을 핍박할 정도의 명분은 없는 일이었지요. 단지 뒤에서 몰래 복수를 진행하거나 선검문에서 목숨 값으로 어느 정도 보상을 하는 선에서 끝났을 일인데…….”
잠시 말끝을 흐린 오덕만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문제는 싸움 후에 겁탈당한 인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요. 사건의 피해 당사자가 없으니 우리 쪽 말을 증명할 방법이 사라진 것이지요. 그러니 흑암문에서는 증거를 대라는 식으로 몰아붙인 겁니다. 자신의 제자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것이지요. 들리는 소문에도 넷째 제자라는 놈이 평판이 안 좋긴 했지만, 함부로 여인을 겁탈하는 놈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선검문에서는 사실을 증명할 증인들이 있으니 확인시켜 주겠다고 했고, 흑암문은 증인들 역시 선검문 영역에 사는 자들이니 믿을 수 없다며 제자를 죽인 자들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검문을 공격하겠다고. 우리 입장에서는 분명 정당한 실력행사였으니 죄 없는 무사들을 희생시킬 순 없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 닷새 후 일전을 벌이게 된 것이지요. 쯧.”
오덕만이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확실히 이상한 면이 있군요.”
궁혁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게요. 대체 그놈은 왜 선검문 영역까지 와서 보란 듯이 부녀자를 겁탈한 것일까요? 미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또 그 여자는 어디로 사라진 거랍니까? 무사들의 눈을 피해 사라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일중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천성이 보기에도 참으로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사건이었다.
여러 정황상 무언가 음모의 냄새가 났다.
흑암문에서 선검문을 공격할 명분을 얻기 위해 그런 것일까?
설마 제자의 목숨까지 희생시키고, 공동파와 척을 지면서까지 흑암문주가 일을 꾸몄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세력이 개입했을 확률이 있었다.
사혈맹이나 구천마련, 혹은 제삼의 세력.
사혈맹으로선 무림맹이 구천마련의 움직임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는 이때를 자신들이 세력을 확장할 적기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련 역시 섬서를 혼란시킴으로써 무림맹의 관심을 분산시키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생각보다 복잡한 사정이 숨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 순간, 천성은 관제묘에서 마주쳤던 이들이 떠올렸다.
‘설마, 너무 지나친 걱정인가?’
식사를 마친 후 오덕만과 헤어진 일행은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