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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20화)
5장 선검문(4)


숙소로 돌아온 지 한 시진쯤 지나 오덕만이 태상 문주 호천덕의 호출을 전해 왔다.
일행은 기뻐하며 숙소를 나서 호천덕이 머무는 별채로 향했다.
문주의 지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후 일선에서 물러난 호천덕은 별채에서 무공을 연마하거나 정원을 가꾸며 소일하고 있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도움을 주러 온 여러 인사들을 접대하느라 팔십이 다 된 늦은 나이에 팔자에도 없는 분주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호천덕의 방은 매우 단출하여 그의 담백한 성품을 느끼게 해 주었다.
호천덕은 공동파의 속가제자이면서 특이하게도 도를 사용하였는데, 복마소구식을 도법에 맞게 변형시켜 절정의 말미에 이른 고수였다.
그는 젊어서부터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여겨 나서서 도왔는데, 그로 인해 그를 은인으로 모시는 이들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호천덕에 대하여 귀가 닳도록 들어온 천성도 그런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허허,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강아지 같던 룡이와 성이가 벌써 청년이 되었구나!”
흰 백발이 어깨까지 내려온 호천덕이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자신의 생일날 찾아와 재롱을 피우던, 채 열 살도 안 되던 꼬마들이 벌써 이렇게 자랐다는 것이 흐뭇하면서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 준 듯했다.
“사부님의 정정하신 모습을 뵈니 이 못난 제자가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궁혁도가 깊숙이 고개를 숙여 호천덕에게 읍을 했다.
“궁천룡이 태사부님께 인사드립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천성이 태사부님께 인사드립니다.”
천룡과 천성도 호천덕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래, 고맙구나. 이렇게 선검문을 도우러 와 줘서. 혁제는 잘 있겠지?”
“네. 형님께서 직접 오지 못해 죄송스럽다며 대신 안부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흐뭇한 표정으로 안부를 확인한 호천덕이 천룡을 바라보았다.
“그래, 천룡이 네가 벌써 절정에 이르렀다면서? 허, 대단하구나. 그 나이에 쉽지 않은 일인데. 그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수련했던 모양이구나. 헛헛!”
천룡의 기세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호천덕이 보기에 몸가짐은 이미 고수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절정의 벽을 넘지 않고서는 그런 자연스러움이 깃들 수 없었다.
아마도 무공이 낮은 이들은 이 차이를 잡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흐뭇하게 웃는 호천덕의 모습에 천룡은 난감했다.
아마도 자신의 경지를 오해한 오덕만이 호천덕에게 잘못 전한 모양이었다.
원래 성질대로라면 얼른 나서서 자랑했을 테지만, 태사부 호천덕의 앞인지라 평상시처럼 가볍게 행동할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사실을 이야기하려던 천룡이 갑자기 멈칫했다.
‘아니지, 아니지. 내가 별로 실력이 없는 것처럼 싹 숨어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서 흑암문 놈들을 두들겨 패면 훨씬 멋있을 거야! 게다가 아름다운 소저들이 내 무용담을 듣기 위해 줄을 설 테고! 후후후,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는 거지!’
천룡은 즐거운 상상을 하며 자신의 실력을 당분간 숨기기로 했다.
“워낙 뛰어나신 사부님들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만, 아직은 제가 많이 부족하여 기대에 못 미치고 있습니다.”
천룡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천성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얼핏 보기에 천룡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가 무언가 재밌는 장난을 칠 때마다 떠올리던 눈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쯧쯧,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이런 상황에서까지 장난질이라니.’
천성은 문득 골치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오, 은사는 뉘시냐? 내가 아는 분이더냐?”
그때, 호천덕이 흥미가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
“무림에서 삼선이라 불리시는 분들입니다.”
천룡의 대답에 호천덕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허, 그 신비로운 분들이 은사라면 기연이라 할 수 있구나!”
삼선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최소한 그들의 경지가 초절정은 넘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런 고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삼선은 따로 제자를 두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천룡이 그들의 전인이 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기도 했다.
“허허허, 잘되었구나.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무림의 대들보가 되도록 해라.”
천룡이 무엇을 상상하는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호천덕의 덕담에 감사를 표했다.
“아, 그리고 내일 오시(午時)에 흑암문에 대한 대응을 논의하는 회의가 있을 예정이다. 이번에 선검문을 돕기 위해 온 여러 동도들 간에 인사를 나누는 자리도 겸하고 있으니, 너희도 반드시 참석하거라.”
“네. 그럼 쉬십시오.”
일행은 호천덕에게 작별 인사를 올리고 숙소로 돌아갔다.

* * *

내원의 문주전에서 열린 회의엔 백여 명 정도의 제법 많은 인원이 참여했다.
선검문의 지휘부와 도움을 주러 온 대연문, 공동파의 사람들이 보였다.
철혈문 일행은 입구 근처의 구석 자리로 안내받았다.
가장 중앙에는 문주인 호연백이 앉아 있었고, 그 뒤로 태상 문주인 호천덕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주의 좌우로는 부문주이자 그의 동생인 호연상과 총관 추관호가 위치했고, 공동파는 그 바로 우측 옆 자리에 네 명의 도사가 앉아 있었다.
그 반대편엔 대연문의 유송문과 소문주 일행이 마주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선검문의 소문주 호무강과 형제들, 그리고 각 단체 수장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선검문의 문주인 호연백입니다. 이토록 어려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강호의 도의를 저버리지 않고 저희 문파에 도움을 주러 오신 공동파와 대연문, 남양문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이들이 자리하자 호연백이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하고 회의를 시작했다.
“우선 선검문을 도와주러 오신 여러 협사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공동파의 장로이신 냉면검(冷面劍) 좌공 어른과 일대제자 세 분입니다.”
공동파의 도사들이 호연백의 소개에 포권을 하며 인사하자 장내의 여러 인물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공동파의 좌공이라면 얼음장같이 싸늘한 얼굴로 가차없이 사마(邪魔) 무리를 단죄한다 하여 냉면검이란 별호가 붙은 공동파의 장로이자 초절정 초입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나머지 세 명의 일대제자도 모두 절정을 넘어선 고수였다.
공동파에서 많은 인원을 보내지 못하는 대신 큰 전력이 되는 고수들을 보낸 것이다.
그만큼 이번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맞은편에 계신 분들은 대연문의 호법이신 천변검(千變劍) 유송문 대협과 감석보 소공자 일행이십니다.”
선검문과 정혼 관계인 대연문이기에 절정고수인 유송문과 정예 무사 삼십 명까지 보내 제법 신경을 쓴 모양새였다.
뒤이어 남양문의 부문주 일행을 비롯해 여러 고수들을 소개한 호연백이 마지막으로 철혈문 일행을 소개했다.
“음, 마지막으로 감숙에서 온 철혈문 일행입니다.”
그야말로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듯한 표정이 고대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소개였다.
도와주러 온 마음은 고마우나 그다지 전력에 보탬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 저들은 내가 여러 동도들께 소개시키기 위해 직접 이 자리에 불렀다. 우리 선검문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마다않고 감숙에서 달려온 고마운 이들이다. 거기다 천룡이는 절정고수이니 이번 일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때, 호천덕이 직접 나서서 철혈문도들을 자세히 소개했다.
자신의 권유로 회의에 참석했는데 썰렁한 대접을 받게 되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공동파 장로인 좌공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구석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천룡이라 소개된 청년은 제법 고수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비록 기세는 일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안정된 자세나 빈틈이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최소한 절정은 넘어선 무사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좌공과는 달리 나머지 사람들은 천룡의 뛰어남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의 수준이 아직 천룡의 실력을 느낄 정도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호연백 역시 천룡의 기세를 확인하고는 자신의 아버지가 철혈문을 워낙 챙기다 보니 저 청년들이 무시당할까 봐 일부러 경지를 올려 말하는가 보다 하고 그저 흘려들었다.
물론 일류의 무사라도 꽤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호천덕이 특별히 아끼는 듯 보이니 전투에 들어가면 저들을 뒤쪽으로 빼서 다치지 않도록 배려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호연백이었다.
“흥!”
반면, 호무강과 감석보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호천덕이 나이가 많다 보니 사람 보는 눈이 예전 같지 않은가 보다 생각한 것이다.
‘흐흐흐, 이거거든. 이렇게 숨어 있다가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등장하는 거지!’
천룡은 그런 이들을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선검문의 간부들까지 소개를 마친 후 호연백은 여드레 후 있을 흑암문과의 대결에 대해 의논했다.
사실 작전이랄 것까지도 없었다.
어차피 고수 간의 대결에서 모든 것이 판가름 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무사들은 방어진을 구축한 채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이 전부였다.
그동안 좌공을 비롯한 고수들이 흑암문의 수뇌부를 제압하고 남은 무리들을 정리하는 것이 이번 싸움의 목표였다.
결국 제일 중요한 일전은 좌공 진인과 흑암문주의 한판 승부가 되리라.
각각의 위치를 정하는 것 이외에는 딱히 의논할 일이 없었기에 회의는 일찌감치 종료되었다.
철혈문 일행은 후미에서 지원을 하도록 배정되었다.
호연백으로서는 나름대로 배려를 한 것이지만, 철혈문 일행으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선검문과 흑암문의 대결을 여드레 앞둔 하루도 쏜살같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