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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21화)
5장 선검문(5)
결전을 나흘 앞둔 부현의 외곽 지역.
관도에서 벗어난 숲 속 공터에 투박한 마차 한 대와 십여 명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복면인들이 모여 있었다.
천룡과 천성 형제가 관제묘에서 마주쳤던 그 마차였다.
마차 문이 열리고 검은 면사를 걸친 훤칠한 키의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소공녀님을 뵙습니다!”
그에 마차 앞쪽에 일렬로 서 있던 복면인들이 깊숙이 고개를 숙여 면사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들라.”
복면인들은 소공녀라 불린 여인의 말에 얼른 고개를 들고 뻣뻣한 자세로 섰다.
남자 못지않은 큰 키에 흑단 같은 긴 머리, 굴곡 있는 몸매가 얼굴을 볼 수 없음에도 여인의 아름다움과 기품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래, 일은 잘되었느냐?”
“그러하옵니다. 흑암문주의 제자 놈을 부현까지 끌고 와서 선검문 애송이들의 검에 죽도록 꾸몄습니다. 결국 나흘 후에 놈들은 서로 혈전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복면인이 나서서 대답했는데, 목소리로 보아 여인인 듯했다.
한데 이들의 말이 심상치 않았다.
복면여인의 말대로라면 선검문과 흑암문의 갈등을 이자들이 일부러 조장했다는 이야기였다.
천성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미랑(美娘), 제혼술(制魂術)이 이젠 제법 쓸 만해졌구나. 수고했다.”
“송구하옵니다, 소공녀님.”
소공녀의 칭찬에 미랑이라 불린 복면여인이 감격에 겨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밤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한다. 섬응(閃鷹)과 열 명의 비영(秘影)이 너와 함께할 것이다. 반드시 좌공을 없애야 한다!”
“존명!”
“존명!”
복명인들이 복창하며 소공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냉면검이 죽고 나면 흑암문주도 더 이상 공동파의 눈치만 보고 있을 수는 없을 터!’
흑암문주 혈도객 공소추는 노련한 인물이라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공동파와 척을 지기보단 이번 사건을 이용해 약간의 이익을 얻어내는 데 만족할 것이다.
사실 공소추는 알려진 것과 달리 초절정 중입(中入)의 고수였다.
무난히 냉면검을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것이다.
하니 냉면검을 죽이지 않고 제압한 후 선검문에게 양보를 강요할 생각일 것이 빤했다.
하지만 냉면검이 죽게 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냉면검의 죽음은 결국 흑암문에게 그 책임이 돌아갈 것이다.
또한 장로 급 인사의 죽음을 공동파에서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분명 흑암문에 직접 책임을 물으려 할 것이다.
도와주던 입장에서 상황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소추도 더 이상 공동파의 눈치만 볼 수 없게 된다.
흑암문의 입장에선 이판사판인 것이다.
‘일이 커지게 되면 황제의 졸개들이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놈들이 천률음보와 열쇠에 대해 신경 쓸 틈이 없게 되겠지.’
소공녀의 면사 속 눈빛이 광채를 발했다.
“천안(天眼)을 열어 놓을 터이니 내 목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이도록 하라! 작전을 시작한다! 출발하라!”
“존명!”
복면인들이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 * *
어둠을 뚫고 검은 선들이 선검문의 담장을 넘었다.
마치 한 마리 새인 양 중력을 무시하는 경쾌한 신법을 보여 주는 괴인들은 달빛조차 피해 가며 현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복면인들은 유령처럼 아무 기척도 없이 문주가 머물고 있는 내실로 접근했고, 선검문의 경비 무사들은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응? 침입자인가? 움직임이 무척 빠른데? 아무래도 적이 침입한 것 같습니다.”
천룡이 몸을 일으킨 후 궁혁도에게 말했다.
“이런! 놈들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느냐?”
놀란 궁혁도가 다급히 물었다.
“문주전 쪽입니다.”
“문주전 쪽이면…… 그 뒤로 문주님과 가족들의 숙소가 있지 않느냐? 이거 큰일이구나! 어서 가 보자!”
궁혁도가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제가 먼저 가서 돕겠습니다!”
휘잉, 바람 소리와 함께 천룡이 빠른 속도로 문주전을 향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지체할 수가 없던 것이다.
궁혁도와 일행도 서둘러 문주전 쪽으로 움직였다.
사실 천성은 이미 침입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무숙이 경고를 해 준 것이다.
‘아무래도 관제묘의 그놈들과 기운이 비슷한 것 같은데, 놈들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흠, 분명 그놈들과 연관이 있는 자들이구나. 문주를 노리고 침입한 건가?]
어느새 머릿속으로 들어간 무숙이 말했다.
놈들의 기운은 독특했다.
영력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상당한 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막아라! 침입자다!”
그때, 내원의 무사들이 적의 움직임을 감지했는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엇, 다른 놈들이 있군요!’
동시에 천성의 영안에 또 다른 자들의 움직임이 잡혔다.
[흠, 이놈들이 영력이 더 강하구나. 따로 노리는 것이 있군.]
새로 파악된 자들은 내공보다 영력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자들이었다.
‘가 봐야겠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저도 형님을 따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심상찮은 사태에 천성이 신법을 발휘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신법으로는 철혈문 내에서 천성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엇! 천성아!”
궁혁도가 놀라 소리쳤으나 이미 천성의 모습이 사라진 뒤였다.
천성은 궁혁도, 일중과 떨어지자 곧장 방향을 바꾸어 두 번째 침입자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일단 놈들에게 정체를 들키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복면을 하는 것이 좋겠다. 혹시라도 정말 태초의 파편을 노리는 놈들과 관계되었다면 너의 정체를 알게 해선 안 된다.]
영력이 완전치 않은 것으로 보아선 태초의 파편을 노리는 자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졸개이거나 그에 관계된 자일 확률도 있다.
그렇다면 정체를 들켜선 안 되었다.
대신 정체를 들키지만 않는다면 놈들이 직접 나서지 않는 한 위험할 일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천성은 임시방편으로 소매를 찢어 얼굴을 가렸다.
[그거 가지고는 안 되겠다. 전에 내가 말했던 빛의 굴절을 이용한 환영술을 사용해야겠다.]
무숙은 환영을 만드는 방법을 설명해 주고는 직접 기운을 인도해 천성을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시켰다.
후우우우우웅!
무숙의 인도에 따라 기문으로 받아들인 자연지기가 영력으로 변환되어 서서히 온몸을 감싸자 천성의 신형이 흔들렸다.
잠시 후, 천성은 검은 야행복 차림의 복면인으로 변해 있었다.
키가 자라고 체형조차 통통하게 변해서 누구도 천성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을 듯했다.
‘이런 방법으로 기운을 사용할 수도 있군요! 이거, 제법 재미있는 기술인데요? 유용하기도 하고.’
[후훗, 이 정도는 약과에 불과해. 너의 능력이 조금 더 성장하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하고 놀라운 기술들을 사용할 수 있다. 지금 내가 기운을 조작한 방법을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엔 니가 직접 환영을 만들어 변신하도록 해라.]
“네.”
야행복 차림의 천성이 수상한 자들이 움직이고 있는 곳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라 생각하니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소공녀의 명령을 받은 섬응(閃鷹)과 미랑(迷娘)은 비영들이 소란을 피우는 틈을 타 선검문 후원의 접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 머물고 있는 공동파의 장로 좌공을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소공녀는 마차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이마에 기운을 집중시켜 천안을 열었다.
이백 장 너머에 위치한 선검문이 차츰 소공녀의 눈앞으로 다가오더니, 어느 순간 전체 장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장원 내의 모든 움직임이 마치 눈앞에서 보는 양 소공녀의 뇌리에 잡혔다.
열 명의 비영이 문주전으로 침투해서 호위무사들과 일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쪽으로 문파 내의 여러 무사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사이, 섬응과 미랑이 빠른 속도로 공동파 도사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좌측에서 십여 명의 무사들이 문주전을 향해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대로 간다면 서로 마주치게 될 것이다.
[우측으로 꺾은 후 건물의 지붕을 타고 접객당으로 향해라!]
소공녀는 섬응과 미랑에게 영력을 이용해 자신의 명령을 전달했다.
소공녀의 지시에 따라 두 복면인이 무사들을 피해 지붕 위로 내달렸다.
무사들은 그들을 눈치채지 못한 채 문주전으로 몰려갔다.
그때, 소공녀의 천안에 섬응 일행의 앞쪽에서 상당한 속도로 접근해 오고 있는 복면인이 보였다.
똑바로 접근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두 사람의 움직임이 들킨 듯했다.
[앞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의인이 접근 중이다. 이미 들킨 듯하니 미랑이 맡아 처리하고, 섬응은 임무를 진행하라!]
섬응의 장기는 속도였다.
그는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니 미랑이 놈을 막는 동안 섬응은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흑의인이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났다.
동시에 미랑이 혈조를 두 손에 끼워 흑의인을 향해 돌진했고, 섬응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흑의인을 스쳐 공동파의 숙소로 향했다.
“앗! 뭐가 이리 빨라!”
자신에게 달려드는 미랑에게 잠시 한눈을 판 순간 나머지 복면인이 사라져 버리자 천성은 깜짝 놀랐다.
섬응의 몸놀림은 현재 천성이 적응해서 사용할 수 있는 속도와 거의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빠른 듯했다.
[역시 영력을 사용하는구나. 긴장해라!]
천성이 섬응을 막으려는 순간, 뒤쪽에서 두 줄기 서늘한 기운이 덮쳐왔다.
미랑의 혈조가 천성의 등을 노리고 찔러 온 것이다.
그 순간, 천성이 영안을 열었다.
감각이 극도로 활성화되고, 마치 시간이 느려진 듯 자신의 등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혈조가 보였다.
천성은 재빨리 상체를 숙여 혈조를 흘려내고, 왼쪽으로 한 바퀴 돌며 상체가 앞으로 쏠린 미랑의 발목을 차 버렸다.
퍽!
“아악!”
천성의 빠른 반응을 미처 예상 못한 미랑은 그대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엇! 여인!”
천성은 복면인이 여자임을 알고 놀라 잠시 멈칫했다.
미랑은 바닥에 쓰러진 충격에 머리가 흔들려 정신이 없었으나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언제 천성의 공격이 다시 이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랑은 튕기듯 뒤로 공중제비를 돌며 일어나 얼른 자세를 고쳐 잡았다.
“웬 놈이냐!”
챙! 채앵!
그때, 공동파의 숙소 쪽에서 고함과 함께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엇! 이놈들이 공동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빨리 이 여인을 처리하고 놈을 막으러 가야겠습니다.’
[그래, 급박한 상황이구나. 아무리 무공의 고수라 해도 영력을 사용하는 자들을 막기는 쉽지 않지.]
아무리 고수라 해도 처음 접하는 기술에는 당황하기 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