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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23화)
5장 선검문(7)


소공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저 흑의인은 누구란 말인가. 어떻게 우리와 비슷한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지? 분명 영력을 사용하는 자야!’
섬응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는데다 미랑의 제혼술까지 깨뜨려 버렸다.
소공녀는 흑의인의 정체를 살피기 위해 천안(天眼)을 집중했다.
최대한 영력을 짜내어 흑의인의 복면을 투시하고 기운을 간파하려 한 것이다.
이윽고 흑의인의 복면이 흐릿해지고 그자의 얼굴이 드러나려는 순간, 갑자기 커다란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았다.
“아아악!”
순간, 천안이 깨져 버리고, 그로 인해 큰 타격을 받은 소공녀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마부이자 호법인 하태휘가 재빨리 마차 문을 열고 소공녀를 부축했다.
“으으으, 대체…… 섬응과 미랑이 도착하는 대로 최…… 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난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소공녀는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피투성이가 된 섬응과 미랑이 도착했고, 살아남은 복면인들과 함께 소공녀의 마차가 서둘러 부현 외곽으로 벗어났다.

‘방금 전 그건 뭐지? 무언가 날 몰래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 나쁜 느낌이었는데.’
조심스럽게 문주전으로 향하던 중 천성은 무언가 끈적거리는 느낌에 정신을 집중하고 영안을 열었다.
[누군가 영력을 이용해서 너의 정체를 알아내려 한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런 불안정한 영력으로는 너의 영안을 이겨 낼 수가 없지. 오히려 타격을 입었을 게다. 후후!]
무숙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변신을 푼 천성은 재빨리 문주전으로 향했다.
“먼저 간다는 놈이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냐?”
일중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분명 자신들을 앞서 가던 천성이 이제야 나타났으니 당연한 물음이었다.
“아, 중간에…… 길을 잃어서요.”
천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얼버무렸다.
궁혁도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천성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숨겨진 힘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혹시라도 천성이 또 유가장에서처럼 함부로 나서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하하, 사실은 조금 겁이 나기도 하고…….”
천성의 말에 일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유가장에서 겪은 일도 있으니,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게로구나.”
그러고는 측은한 표정으로 천성을 바라보았다.
둘러보니 이미 흑의인들은 사라진 뒤였다.
장내에는 부상자와 시신들을 정리하는 이들만 남아 있었다.
한데 천룡과 문주를 비롯한 고수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형은요?”
“놈들을 쫓아갔다.”
아마도 흑의인들을 추적중인 듯했다.
천성은 영안을 열었다.
동시에 감각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혼란스러운 선검문 안팎의 상황이 한눈에 보였다.
천룡과 선검문의 고수들이 적들을 추적하다 말고 돌아오고 있었다.
천성은 범위를 더 넓혀 자신을 감시하던 느낌을 따라 위치를 추적해 갔다.
영안의 범위를 삼백 장 정도로 넓히자 자신을 기분 나쁘게 만든 기운의 꼬리가 잡혔다.
영안을 그곳으로 집중하자 급하게 달아나고 있는 암습자 무리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 확인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직은 영안의 범위가 삼백 장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 그들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분명 관제묘에서 보았던 무리들입니다!’
[그래, 마차 안에 있던 여인이 아마도 너의 정체를 보려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들은 태초의 파편과는 관계가 없는 듯하구나. 그자들이라면 이런 쓸데없는 일들을 벌일 이유가 없지.]
‘그럼 대체 저들은 누굴까요?’
[글쎄. 나도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구나.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필요가 있어. 혹시라도 태초의 파편를 노리는 자들과 어떠한 연관이 있다면, 너에게는 매우 위험한 일이니까.]
천성은 영안을 거두고 생각에 잠겼다.



6장 결전(1)


냉면검 좌공의 죽음으로 선검문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문제가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마지막에 목격한 이들에 의하면, 공동파가 머무는 곳에 침투한 흑의인은 단 세 명―천성도 침입자라 여긴 것이다―뿐이라 했다.
흑암문의 전력이 비록 강력하다 하나 문주인 공소추와 지도부들이 직접 공격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흑암문을 돕는 외부 세력이 개입했다는 이야기.
그렇지 않아도 전력 차가 나는 상황에서 냉면검을 죽일 정도로 뛰어난 외부 고수가 흑암문에 가세했다면, 이미 결과는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다.
물론 장로가 목숨을 잃었으니 공동파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될 것이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선검문은 피에 잠길 것이 분명했다.
선검문의 수뇌부와 초청 고수들은 고민에 빠졌다.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이로써 공동파와 흑암문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사이에 낀 선검문은 지금 상태로는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초청 고수들 중 몇몇은 간밤에 몰래 자신들의 문파로 돌아가기까지 하였다.
“참으로 이상하군.”
궁혁도가 검미를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흑암문이 공동파와의 전면전을 원할 리는 없는데.”
거기다 흑암문의 전력이라면 도저히 해내기가 불가능한 암살이었다.
만일 그런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굳이 암살을 할 필요도 없이 사흘 후 양 문파 간의 정면대결 때 그 힘을 드러내는 것이 전략적으로나 외부에 자신들의 당위성을 알리는 데 더욱 효과가 클 터인데, 어리석게도 공동파의 도사를 암살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결국 놈들은 문주전에 이목을 돌린 후 공동파를 노렸다고 보는 게 맞았다.
공동파가 이 싸움에 개입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흑암문의 입장과는 전혀 맞지가 않는 상황이었다.
“흠, 분명 흑암문은 아니군. 대체 어떤 세력일까? 사혈맹인가, 아니면 구천마련인가? 누구든 노리는 것은 어차피 양측의 혼란을 키우기 위한 것일 테지.”
“형님, 어쨌든 이젠 선검문은 매우 위험하게 되었군요.”
일중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궁혁도를 바라보았다.
다른 세력의 짓이라 해도 어차피 공동파는 이제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흑암문도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는 상황.
“잘못하면 정사대전이 벌어질 일이로구나…….”
일행은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 * *

“당장 부문주를 불러오너라!!”
흑암문주 공소추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지경이 된 것인지.
그렇지 않아도 넷째 제자 놈의 죽음과 관련하여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죽은 놈은 죽은 놈이고, 어차피 이 기회를 이용해 선검문을 압박하면 제법 이득을 취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사고를 쳐 버린 것이다.
공소추는 당연히 공동파가 두려웠다.
아무리 흑암문이 사파에서 제법 세력이 크다고는 하지만, 공동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문주님, 접니다!”
그 순간, 부문주 곡만종이 급하게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젠장, 혹시 너 이번 일에 대해 아는 것 좀 있냐?”
곡만종은 공소추가 처음 연안에서 건달패 생활을 할 때부터 이십 년을 넘게 함께한, 가장 믿을 만한 측근이었다.
무공도 절정에 이를 정도로 뛰어났고, 주먹패치고는 머리도 좋아 흑암문이 지금의 세력을 쌓는 데 있어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었다.
“아직 정확한 상황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소문에 의하면, 복면인들 중 한 명은 최소한 초절정 이상의 무공을 지닌 고수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정도 실력을 지닌 곳이라면 그리 많지 않지요. 구천마련이거나 저희와 앙숙 관계에 있는 혈영문(血影門)이 가장 유력하지 않겠습니까?”
곡만종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혈영문은 사혈맹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큰 문파였다.
문주인 일소일살(一笑一殺) 사진도는 초절정 끝자락의 고수이며, 그 밑으로도 두 명의 초절정고수가 있었고, 절정고수는 무려 열 명이 넘어가는, 그야말로 사파제일을 다투는 문파였다.
그런 사진도는 한참 전부터 흑암문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들이라면 충분히 암살자를 보내 공동파 장로를 죽이고 흑암문을 곤란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네 생각엔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나?”
이마를 손으로 누르며 공소추가 물었다.
“휴, 현재 상황으로는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공동파에 우리가 한 짓이 아니라고 한 후 물러서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모양새도 그렇고, 적지 않은 손해를 봐야 할 듯합니다. 또한 그리한다고 하여 공동파가 믿어 준다는 보장도 없지요. 믿는다 해도 우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구요.”
물론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번 일이 흑암문이 아닌 외부 세력의 음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할 것이다.
하지만 항상 음모론이 음모론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빤한 수작이야말로 정보를 혼란시키고 두 세력을 분열시키는 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몇몇 똑똑한 자들이 그럴싸한 이유를 대며 의문을 제시하겠지만, 결국은 기득권을 가진 수뇌들에 의해 정보는 통제되고 묵살될 것이다.
사파는 항상 사악하고 잔인한며, 싸우기 좋아하는 무리임으로 충분히 이런 일을 일으키고도 남는다는 논리를 내세우면 나머지 사람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신을 믿듯이 광신도가 되어 사파를 멸하자며 외치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이 바로 정파든 사파든 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이 방법이었다.
적이 존재해야 지도부에 쏟아지는 불만을 돌릴 수 있고, 그 균형을 적절히 유지함으로써 구성원들이 딴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다.
“니미럴, 그렇다면 어차피 이판사판 아닌가. 마침 공동파 놈들도 없으니 일단 놈들을 치고 선검문을 장악한 후 사혈맹에 지원을 요청하는 수밖에!”
공소추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뱉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듯합니다. 사혈맹 입장에서도 무림맹이 구천마련에 신경 쓰고 있는 지금이 세력을 늘리기에 적당한 시기이기도 하고, 또한 섬서 유일의 사파인 저희가 무너지게 되는 건 원치 않을 테니까요. 단, 되도록 최소한의 피해로 선검문을 제압해야 합니다.”
곡만종이 공소추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럼 어찌하면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겠나?”
“전면전으로 가면 승리하는 건 어렵지 않겠으나 우리 쪽도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렇지.”
“차라리 두 문파에서 각각 다섯 명씩의 무인을 내보내 겨뤄서 승패를 결정하는 것으로 하면 서로에게 이득이지요.”
곡만종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어차피 고수의 실력이 우리가 위에 있는데 선검문에서 그 제안에 응하겠는가?”
“선검문 입장에서는 이러나저러나 패하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문도들의 목숨을 보장해 주고 십 년간 봉문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면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할 것입니다. 멸문하는 것보단 나은 선택이니까요.”
“흠, 그럼 공동파가 문제인데…….”
공소추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선검문이 봉문한 상태라면 공동파를 상대하기도 더욱 쉬워질 것입니다. 사혈맹만 도와준다면 공동파도 함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선검문이라는 거점이 없어진 탓에 어려운 싸움을 하게 될 테니까요.”
한참을 생각하던 공소추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잉, 자네 말대로 하세. 그리고 당장 사혈맹에 전서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게.”
“알겠습니다!”
“크으, 대체 어떤 잡것들인지 정체만 알아내면 내 이번 일을 몇 배로 단단히 갚아 주마!”
공소추가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