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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1(24화)
6장 결전(2)
흑암문과의 결전 당일.
선검문은 무거운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어떻게든 공동파의 지원이 오기 전까지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흑의인들의 습격 와중에 천룡의 활약으로 인하여 전력의 손실이 적었다는 것이다.
태상 문주 호천덕과 문주 호연백은 오늘부로 선검문이 그 이름을 섬서 땅에서 지우게 될지도 모르리라 여겼다.
결전을 앞둔 모든 선검문의 무사들과 도움을 주러 온 외부 인사들이 연무장에 모여 비장한 각오로 마지막을 준비했다.
호연백은 연단에 올라 장내를 한 번 둘러본 후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비록 흑암문에 그 힘이 미치지는 못하나, 사악한 무리들의 도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맞설 것입니다. 신념을 굽히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아 함께해 주시는 여러 강호 동도들께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나 호연백이 죽어서 넋이 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갚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저 사파 무리들에게서 살아남는다면 함께 밤새도록 술잔을 돌립시다!”
“우와아아아!”
호연백의 결의에 찬 음성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용기백배해 함성을 질렀다.
구석에 자리한 천룡과 천성도 검을 꼭 쥐었다.
며칠 전 활약으로 인해 천룡에 대한 의문은 그나마 많이 가신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무인들은 그날의 일은 고수들과의 일전에서 힘이 빠진 흑의인들을 천룡이 적절히 공격하였기에 가능했다 여기고 있었다.
사실 반은 맞는 말이기도 했다.
당시 천룡은 그다지 큰 힘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흑의인들의 빈틈을 노려 적절히 검을 뻗었을 뿐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적은 움직임과 힘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자야말로 진정한 고수인 것이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목숨을 아껴야 한다!”
궁혁도가 일행에게 단단히 일렀다.
“문을 열어라! 정정당당하게 앞장서 놈들을 맞을 것이다!”
선검문의 정문이 열리고 앞으로 걸어 나아가는 호연백을 따라 모두들 결연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검문의 무사들이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도에 이는 흙먼지 너머로 삼백여 명의 흑암문 무리가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검을 잡은 천성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실상 이렇게 대규모의 전투는 처음이었다.
암습자들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실력이 강하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생소한 상황에서 과연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긴장 말아라. 이 형님이 옆에서 잘 지켜 줄 것인데 뭐가 걱정이냐. 하하하!”
천룡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천성의 어깨를 툭, 쳤다.
피식!
천룡의 큰소리에 긴장이 풀린 천성이 미소를 띤 채 정면의 적을 바라보았다.
이십여 장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흑암문 무리의 전진이 멈췄다.
선검문에 비해 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인원이었다.
전면에 나선 열 명의 고수에게서는 살을 에는 듯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들이 뿜어내는 날카로운 살기에 선검문의 일반 무사들은 혈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두려움을 느꼈다.
천성에게 큰소리치긴 했지만 천룡도 속으로는 적잖게 긴장하고 있었다.
강호에 나와 처음 맞이하는 큰 싸움이었다.
드디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고, 이름을 알릴 순간이 온 것이다.
‘후후, 나 궁천룡의 이름이 드디어 강호를 진동시키겠구나!’
생각만 해도 흐뭇한 상상에 천룡의 눈이 가늘어지며 양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천성은 그런 형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선검문의 잡졸들은 당장 무릎을 꿇어라!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빈다면 목숨만을 살려 주마!”
장비수염을 한 거한이 양손에 도끼를 들고 앞으로 나서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흑암문의 절정고수인 염라쌍부(閻羅雙斧) 관패(關覇)였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어찌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제자 놈을 두둔한단 말이냐! 선검문의 영역에 멋대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백주대낮에 부녀자를 겁탈해 놓고 뻔뻔하게 우리의 죄를 묻는 것이냐?”
그에 질세라 선검문의 부문주 호연상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마주 호통 쳤다.
“누가 누굴 겁탈했다는 것이냐? 겁탈당한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는데! 비열하게 우리 제자를 죽여 놓고 어찌 억울한 누명까지 씌우려는 것이냐! 그리고 부현 땅이 모두 너희들 것이라도 된단 말이냐? 우리가 이곳에 오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냐!”
관패 역시 지지 않고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때, 흑암문주 옆에 자리하던 부문주 곡만종이 앞으로 나섰다.
“사실 너희 놈들을 모조리 쳐 죽여 억울하게 죽은 우리 제자들의 원혼을 달래야겠으나, 자비로우신 우리 문주님께서는 너희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기로 하셨다.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않고 무인답게 승패를 결정하려는 대승적 견지에서 양 문파를 대표한 다섯 무사 간의 대결로 이번 전투의 승패를 결정 짓도록 제안한다! 만일 너희가 이기면 우리는 이번 사건을 불문에 부치고 연안으로 돌아갈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기더라도 십 년간의 봉문을 대가로 너희의 목숨을 보장해 주겠다!”
생각지도 못했던 곡만종의 제안에 선검문 진영이 술렁거렸다.
선검문 입장에선 고민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호연백이 주위에 모인 고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공소추를 상대할 고수가 우리에겐 없지 않습니까? 필패입니다. 그대로 부현을 넘겨주는 꼴입니다.”
먼저 호무강이 반대하며 나섰다.
“어차피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아니더냐. 그나마 문도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면 그깟 십 년 봉문이 무슨 문제더냐. 잠시의 굴욕을 참고 견디면 다시 일어설 기회가 올 것이다. 복수는 그때 해도 늦지 않다.”
호천덕이 결연한 표정으로 문도들에게 말했다.
봉문을 하게 되면 이권을 모두 포기한 채 강호 활동을 일체 할 수 없게 된다.
십 년 동안은 마땅한 수입 없이 소작농들의 세금만으로 버텨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규모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진다.
제자들을 해산시켜야 할 상황도 올 것이다.
“태상 문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에겐 오히려 좋은 제안입니다. 공동파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덧없이 희생될 젊은 문도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당연히 저들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봅니다.”
부문주 호연상이 호천덕의 의견에 찬성했다.
“사파의 무리가 과연 약속을 지키겠습니까?”
걱정스런 표정으로 총관 추관호가 물었다.
“저들 또한 전력을 보전하기 위해 저런 제안을 한 것일 테니 쓸데없이 전면전을 벌이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우는 수밖에!”
호천덕의 눈에서 광채가 일었다.
“그럼 저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문주 호연백이 최종 결정을 내렸다.
“좋다! 너희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호연상이 크게 소리쳐 흑암문 진영에 자신들의 결정을 알렸다.
대결은 처음 한 명씩 무사를 내보내 싸운 후 이긴 자에게 다음 사람이 도전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결국 먼저 다섯 명의 무사가 모두 제압당한 쪽이 패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초절정고수인 공소추가 있는 흑암문에게 유리한 제안이었으나, 선검문으로선 딱히 반박할 입장이 아니었다.
“우리 흑암문의 첫 번째 무사로는 염라쌍부 관패가 나설 것이다!”
“우와아아아아! 관패! 관패! 관패!”
흑암문도들이 함성을 지르며 관패를 연호했다.
그 기세가 사뭇 대단하여 선검문 측 무사들은 몸에 잔뜩 힘을 준 채 마른침을 삼켰다.
전력상 어쩔 수 없는 차이가 있는데다 기세마저 압도당하고 있으니,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반은 지고 들어가는 셈이었다.
“제가 첫 번째로 나서게 해 주십시오!”
용검단주 곽오량이 나섰다.
용검단은 정예화된 소수의 무사들로 이루어진, 선검문을 대표하는 무력 단체였는데, 구성원은 단주를 포함해 열한 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나 단원 중 무려 여덟 명이 일류 고수여서 선검문 최고의 무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단주인 패력검(覇力劍) 곽오량은 절정의 고수로, 호천덕의 영향을 받아 마치 도를 사용하듯 검을 휘둘렀다.
“조심하게. 놈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니. 안 될 것 같으면 패배를 시인하고 물러서게.”
호연백이 곽오량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당부했다.
하지만 곽오량의 성격상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결코 패배를 시인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호연백이었기에 착잡한 심정으로 곽오량의 결연한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크하하하! 겨우 네깟 놈이 이 관패 님을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이거야 원, 너무 시시하구나! 적어도 문주나 태상 문주가 직접 나서야 나도 손을 쓸 맛이 나지 않겠느냐!”
관패가 쌍부를 양어깨에 걸친 채 곽오량을 비웃었다.
관패는 절정 중반대의 고수.
곽오량에게는 조금 무리한 상대였다.
“흥,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아는 법!”
곽오량이 검을 빼 들고 신중하게 자세를 잡았다.
긴장에 검을 잡은 양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삼 초를 양보해 주마! 어디 마음껏 덤벼 보거라!”
관패가 도끼를 늘어뜨린 후 곽오량을 도발했다.
곽오량의 눈썹이 치켜올라 갔다.
“이놈!”
곽오량의 검이 관패의 머리를 반으로 쪼갤 듯 강력한 파공성을 내며 떨어져 내렸다.
쩌엉!
관패가 가볍게 한 손의 도끼를 들어 곽오량의 검을 막았다.
약간 움찔하긴 했으나 그다지 충격을 받은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검과 도끼가 부딪치는 순간, 재빨리 손을 거둬들인 곽오량이 자세를 낮추며 관패의 허벅지를 가로로 베어 갔다.
관패가 나머지 한쪽 도끼로 검을 막는 순간, 곽오량이 갑자기 상체를 일으켜 머리로 관패의 얼굴을 들이받아 버렸다.
검을 쓰는 곽오량이 설마 머리로 공격을 해 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관패가 서둘러 피했으나, 결국 코에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퍽!
“크윽!”
재빨리 대처하는 바람에 큰 상처는 모면했으나 코피가 흘러나오는 우스운 꼴을 보이게 되자 관패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제법이구나! 이제 재롱은 다 피웠느냐? 지금부터는 내 차례닷!!”
잔뜩 흥분한 관패의 쌍부가 큰 원호를 그리며 곽오량을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