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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심장기사단 1 (3화)
제1화 숲 속의 무법자들(3)


유크는 복부를 짓누르는 통증과 사지가 덜렁덜렁 흔들리는 어지럼증을 느끼면서 정신이 들었다. 그는 누군가의 어깨에 짐짝처럼 걸쳐 메진 상태였다.
눈에 익은 갈색 가죽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메고 가는 사람이 흑발의 남자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쩌다가 이 남자에게 실려 가는 것일까.
유크는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멈추라고 하는데도 남자가 멈추지 않았다. 이제 죽었구나 싶어서 비명을 지르다가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그때 뒤통수에서 퍽 소리가 나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뒤통수에 이는 충격과 함께 흑발 남자에 대한 공포로 졸도하고 만 것이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나니 뒤통수에서 극렬한 통증이 와락 몰려오기 시작했다.
“으으으…….”
뒤통수가 더욱 따끔거리는 것을 보니 흑발 남자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흑발 남자는 그를 계속 메고 갔다. 그렇게 몇 발자국도 안 돼 목책을 통과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유크는 고개를 들어서 주변을 살폈다. 조악한 통나무집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략 40여 채 정도.
‘여기는 어디지?’
약초 채집꾼인 그는 마투누스 산맥과 엘리고스 숲에 대해서 구석구석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근방 화전 마을의 위치는 모두 꿰고 있었다. 하지만 순수하게 통나무집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화전 마을은 그의 기억 속에 없었다.
유크는 마을의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서 먼 지형을 살펴봤다. 마을 뒤에 두 줄기로 흘러내리는 폭포가 있었다. 그런데 그 폭포가 상당히 눈에 익었다.
“어? 엘코크 폭포잖아!”
엘코크 폭포는 엘리고스 숲에서도 비경 중에 비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하지만 폭포가 쏟아내는 풍부한 물이 목마른 몬스터들을 끌어들였기에 엘리고스 숲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엘코크 폭포는 몬스터의 젖줄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사방이 아름다운 경치에 둘러싸여 있고, 마실 물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흑발 청년이 마을 한복판에 유크를 내려놓았다.
그는 다른 손으로 끌고 왔던 사슴을 마을 서쪽에 있는 공터로 가져갔다. 그곳엔 다른 사냥물들과 고기를 통째로 굽기에 적합한 바비큐 장치가 차지하고 있었다.
흑발 청년은 사슴을 던져 놓고 마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기…….”
유크가 주저하며 불렀지만 흑발 청년은 이미 마을에서 가장 큰 목조 주택으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난감한 얼굴이 된 유크의 주변으로 마을 사람이 지나쳐 갔다. 힐끔 한 번 시선을 던지는 것이 다였다.
또 다른 사람이 그의 앞을 지나갔다. 그 역시도 한 번 내려다본 것이 다였다. 그리고 뒤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듯했지만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표하지 않았다.
마을 한복판에 덩그러니 버려진 유크는 또다시 찾아든 황당무계함과 뜨악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 여긴 어디… 아, 엘코크 폭포가 분명한데, 마을은 대체 언제 생긴 거지? 그리고 이 마을 사람들은 어디서 온 것이고, 하나같이 죄다 왜 이래?’
유크는 자신이 언데드 마을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싶어서 하늘을 확인했다. 태양은 정중앙에서 약간 서쪽으로 비껴 있었다.
백주 대낮에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좀비나 언데드가 아닌 것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표정은 죽은 사람들처럼 무감정하고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꼬르륵.
어수선한 정신 속에서도 이놈의 밥통은 밥 달라고 아우성을 쳐대니 참으로 체면 없고 물색이 없는 놈이었다.
엘코크 폭포에 뿌리를 내린 이 마을 사람들에게 뭔가를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상처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조차 불편한 유크는 등에 지고 있던 약초 망태기를 내려서 꽤 큼지막한 자루를 꺼냈다.
행여 몬스터와 대면하게 되면 동굴 속이나 나무 위로 올라가서 몸을 피해야 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며칠을 버텨야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비상식량을 넉넉하게 준비하고 다녔다.
식량 자루는 부피가 상당히 커 보였는데 팔뚝만 한 빵 하나를 꺼내자 자루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물로 목을 축이며 팔뚝만 한 잡곡 빵을 조금씩 뜯어서 입에 넣고 꼭꼭 씹어 먹었다.
자박자박자박자박.
쿵쿵쿵쿵.
아까 그 작은 소녀가 새끼 오우거의 손을 끌고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 너로구나.”
유크는 마을에서 자신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는 소녀가 너무 반가워서 빵을 든 손으로 흔들어 주었다. 한데 소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빵과 같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설마 빵이 먹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실제로 여자아이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고 잡곡 빵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그 자그마하고 예쁜 얼굴에 어떠한 감정이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유크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잡곡 빵을 큼지막하게 잘라서 소녀에게 건넸다. 소녀는 그제야 그와 눈을 마주치더니 빤히 응시했다.
‘아닌가?’
그가 무안하여 손을 거두려고 할 참에 소녀가 느릿한 손길로 빵을 잡았다.
‘휘유우.’
괜히 안도에 한숨이 나왔다.
소녀는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가 그랬던 것처럼 빵을 조금씩 뜯어서 입에 넣고는 오물오물 씹었다. 그 모습이 참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옆에 같이 쭈그려 앉은 새끼 오우거가 빵에 관심을 보였다.
끄옹!
새끼 오우거는 망설임도 없이 소녀의 빵을 잡았다. 그러자 여지없이 번쩍이는 포크.
푹!
까아아아아웅!
이번엔 단번에 새끼 오우거가 먹을 것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서러운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울부짖었다.
소녀가 그 모습이 또 측은했는지 빵을 조금 떼어서 우느라 벌어진 새끼 오우거의 아가리에 넣어주었다.
크옹?
우물우물 씹던 새끼 오우거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퉤!
크오옹!
빵을 뱉은 새끼 오우거는 맛이 없다는 양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소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제 빵만 열심히 오물거렸다.
유크는 새끼 오우거의 행동에 웃음이 났다. 뚱한 표정에 소녀가 어쩌면 새끼 오우거를 길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익숙한 발소리가 나고, 그 주인이 바로 유크의 앞에서 멈췄다. 그를 짊어지고 왔던 흑발의 남자였다.
“생명의 은인이시군요.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감사하단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유크는 부상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였지만 앉은 자세로나마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흑발의 남자는 그의 인사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그가 든 빵만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먹고 싶다는 거야, 뭐야?’
표정으로만 봐서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빵을 응시하는 것을 보면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제가 아직 점심을 안 먹어서요. 맛은 없지만 좀 드시겠습니까?”
유크가 조심스레 빵을 내밀자 흑발 남자가 쭈그려 앉으며 빵을 받았다. 그리곤 소녀처럼 조금씩 뜯어서 빵을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으으음.”
얼굴에 표정은 결여되어 있었는데, 빵을 씹어 넘기는 흑발 남자의 입에서 만족스런 신음이 흘러나왔다. 처음으로 나타낸 감정이었다.
‘겨우 빵 한 덩어리에? 허허.’
그가 빵을 씹을 때마다 오른쪽 뺨에 보조개가 깊이 파여 들어갔다.
‘저걸 보면 여자들이 환장하겠네.’
흑발 남자 자체가 거대한 보석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엇 하나 흠잡을 것이 없이 찬란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저벅저벅.
뚜벅뚜벅.
터덜터덜.
타박타박.
자박자박.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고 보니… 새까맣게 포위되고 말았다.
“헉!”
유크를 둘러싼 1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그를, 아니, 정확하게는 유크가 든 빵을 무미건조하게 응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무감정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유크에게는 흡사 싱싱한 먹잇감을 발견한 좀비 떼를 연상케 하였다.
‘이, 이를 어째?!’



제2화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1)


언뜻 그들의 뒤에서 다크 오라가 뭉클뭉클 일어나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유크는 비상식량 자루에서 아껴두고 아껴두었던 육포를 꺼냈다. 유크로서는 엄청난 선심이었다.
“저기, 얼마 안 되지만 이거라도…….”
마을 사람들이 육포를 힐끔거렸다. 다만 그것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다시 빵으로 모아졌다.
손이 무안하고 송구해서 거두려는데 육포에 관심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꾸옹!
새끼 오우거가 육포를 낚아채서는 입에 물었다. 몇 번 질겅질겅 씹던 새끼 오우거는 맛있다는 양 침을 질질 흘리며 게걸스레 씹어 먹기 시작했다.
빵은 떨어졌고… 알 수 없는 공포감을 밀어내기 위해서 유크는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새끼 오우거의 이름은 뭐라고 지었니?”
빵을 오물오물 예쁘게 씹던 소녀가 침을 질질 흘리며 육포를 씹는 새끼 오우거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참 빤히 응시하는 것을 보니 이름을 짓기 위해서 고민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드디어 소녀의 입이 열렸다.
“엔젤?”
“…….”
유크는 뜨악함에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소녀는 음미하듯 다시 중얼거렸다.
“엔젤.”
“…….”
“엔젤!”
이번에는 마음을 정한 듯 확고한 음성으로 새끼 오우거의 이름을 불렀다.
끄옹?
새끼 오우거, 엔젤이 반응을 보이자 소녀는 착하다는 양 게걸스레 육포를 씹고 있는 엔젤의 대가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엔젤.”
끄로롱, 끄옹!
엔젤은 소녀가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아니면 손길이 좋은 것인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가르랑거렸다.
유크는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홱 저었다. 그런 그의 눈에 일제히 쭈그려 앉은 마을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흑발 청년과 소녀가 먹고 있는 빵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그들 역시 자신이 쥔 빵에만 시선을 두었다.
자칫 시선을 잘못 돌렸다가 누군가와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엔 빵을 빼앗기고 말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양 저희들이 든 빵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만삭의 여인이 두 손으로 허리를 받치고 다가왔다. 그리곤 흑발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흑발 남자의 시선은 그저 빵에만 꽂혀 있었다. 임산부의 존재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양 행동했다.
‘헛! 저런 독종이 있나?!’
남자란 동물은 여성에게 많은 것을 양보를 해왔다. 여성이 예쁘면 목숨을 불사하는 수도 있었다. 그리고 새 생명을 품고 있는 임산부란 존재에게는 더 큰 배려를 한다.
흑발 남자 앞에 꿇어앉은 여인은 미인인 데다가 임산부였다. 능히 목숨을 불살라 빵을 양보할 수 있어야 하건만 흑발 남자는 묵묵히 빵을 먹었다.
무엇보다 경악스러운 것은 환장하도록 느린 속도로 빵을 조금씩 떼어서 오랫동안 꼭꼭 씹어 먹는다는 점이었다, 마치 약 올리듯이.
‘야! 이 야박한 놈아! 지금 이 험악한 분위기에서 어떻게 그걸 아껴 먹을 수가 있느냔 말이야?!’
유크는 갑갑증에 내심 발악 따져 물었지만 소리 없는 외침에 불과했다. 흑발 청년과 소녀는 마을 사람들의 눈빛 압박 속에서도 꿋꿋하게 빵을 먹었다.
덕분에 정적이 오랫동안 이어졌고, 한 시간이 훌쩍 넘겨서야 빵이 드디어 그 존재감을 감췄다. 모두 두 사람의 위장에 안착된 것이다.
“후아아!”
유크는 숨을 터트렸다. 마을 사람들도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막 떠나려고 할 때 흑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맛있었다.”
“…….”
소녀가 동감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 무뚝뚝한 흑발 남자와 괴기스러운 소녀가 짜고서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약을 올리고 있는 것인가?
“빵을 먹어야 한다.”
“…….”
유크는 흑발 남자가 빵을 더 달라는 소린가 싶어서 움찔거렸다.
“돈을 벌어야 한다.”
“예?”
도무지 두서가 없어서 어떻게 대꾸를 해줘야 할지 난감했다.
“회의를 시작하라.”
흑발 남자의 종잡을 수 없는 말에 유크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빵을 먹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돈을 버는 방법을 의논하자는 것이고? 근데 왜 아무 말도 않는 거야? 벙어리는 아닌 것 같은데…….’
흑발 남자는 상당히 젊어 보였다. 이제 겨우 청년이라 봐 줄 수 있는 나이에 접어든 듯했다.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에게 명령조로 말을 하고, 마을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반응… 자체가 없다. 젠장!
사람들은 그저 도로 주저앉았을 뿐이다.
그게 다였다.
일대는 정적이 흐르고 시간은 또 느리게, 아주 느리게 달팽이와 경주를 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나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표정 없는 얼굴과 초점 없는 눈빛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뭐야, 이놈의 동네는 대체 왜 이래??’
어쩌다가 이상한 마을 사람들의 한복판에 끼이게 된 것일까. 화근은 모두 망할 놈의 빵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을 사람들의 눈이 점차 나른히 반쯤 감겨들었다. 졸려서 그런 것인지 생각을 깊이 하느라 그런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갑갑함에 결국 유크가 입을 열고 말았다.
“저기… 저 가죽들을 팔면 돈을 조금 벌 수 있어요.”
40여 채에 통나무 지붕 위에는 모두 짐승 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토끼, 꿩, 매, 사슴, 노루, 늑대, 곰, 표범, 호랑이 등등 짐승들의 가죽은 참으로 다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