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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2(7화)
3장 화산파(1)
천룡 덕분에 궁혁도를 비롯한 철혈문도들도 덩달아 귀빈 대접을 받았다.
선검문을 돕기 위해 몰려든 강호인사들이 안면을 익히려 앞 다투어 달려왔다.
궁혁도와 일중, 천성도 절로 뿌듯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오오, 천룡 소협. 오늘의 주인공이 여기서 뭐하고 있습니까? 다들 소협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니 가서 함께 어울립시다!”
감석보가 여러 어른들과 인사를 나눈 후 구석에서 잠시 쉬고 있던 천룡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그의 옆에는 얼굴이 약간 상기된 감세령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천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 잠시 쉬는 중입니다. 하하…….”
천룡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감석보에게 답했다.
이 사람, 저 사람 인사하며 한 잔씩 받다 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칭송하고 이름을 날리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었으나,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상대를 하는 것은 귀찮고도 재미없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번거롭고 귀찮은 일은 도망 다니며 피하던 천룡에겐 그야말로 고역이었던 것이다.
‘흠, 그래도 영웅이 되려면 이 정도는 참아야지.’
천룡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 후 미소를 지었다.
“흥, 얼마 전까지 천룡 소협이 허풍쟁이라고 비웃던 사람이 누구였죠?”
보다 못한 감세령이 감석보의 뻔뻔함을 나무랐다.
“어허, 사실 나는 천룡 소협의 능력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일부로 숨기시는 듯하여 거기에 장단을 맞춰 드린 것뿐이야! 이 오래비의 깊은 뜻을 어린 네가 어찌 알겠느냐! 큼큼.”
동생의 면박에 무안해진 감석보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일전에는 저희가 알아보지 못하고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워낙 기운이 미약했던지라…….”
어느새 동생 호유설과 함께 다가온 호무강도 머리를 긁적이며 천룡에게 사과했다.
사실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기껏해야 약관의 나이로 보이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청년이 공력도 일천한 상태에서 절정의 고수니 어쩌니 떠들어대면―물론 천룡이 떠들어댄 것은 아니지만―젊은 치기로 허풍을 떤다 생각하기 십상인 것이다.
편협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는 태도로 보아 결코 속 좁은 이는 아닌 것 같았다.
“하하, 아닙니다. 저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의심했을 것입니다. 기세를 감춘 제가 원인을 제공한 것이지요.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천룡 또한 화통하게 호무강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거참, 형은 너무 마음이 넓단 말이야. 한 번쯤 쓴소리를 할 만도 한데.’
천성은 형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저런 점이야말로 주변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천룡을 좋아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하하하! 역시 천룡 소협은 대범하시군요! 이제 이곳의 일도 마무리되었고 뒤처리는 공동파에서 알아서 할 터이니 저희의 역할도 끝난 것 같은데,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감석보가 천룡에게 물었다.
그 옆에서 감세령 또한 잔뜩 궁금한 표정으로 천룡을 바라보았다.
감석보의 말처럼 이제 흑암문과의 일은 공동파가 마무리 짓게 될 것이었다.
이번 갈등으로 인해 공동파는 장로 한 명을 포함해 네 명의 문도를 잃었기 때문에 이대로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흑암문 입장에서는 참으로 곤란한 지경에 처한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사혈맹에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선검문조차 어찌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당 부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급한 건 흑암문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중재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복잡한 사정은 공동파와 흑암문, 그리고 사혈맹의 몫이었다.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천룡이 차분하게 말했다.
“무림맹에서 천하영웅대회를 개최한다 하니, 아우와 함께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천룡의 대답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천하영웅대회가 있었군요! 천룡 소협이라면 분명 상대할 자가 없겠지요!”
“아, 그렇다면 아버님께 소협의 이번 활약을 증명하는 추천서를 써 달라고 말씀드려야겠군요.”
호무강이 갑자기 생각난 듯 천룡에게 말했다.
사실 이번 천하영웅대회는 무분별한 참가를 막기 위해 몇 가지 제한을 두고 있었다.
우선 서른 살 이하로 제한된 나이가 그 첫째였고, 두 번째로는 강호에서 최소한 한 번 이상 사마의 무리를 척결하는 데 활약한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이번 천하영웅대회가 구천마련의 준동에 맞추어 개최되는 성격이 강한지라 젊은 인재들에게 사파와 마교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 세력이 있는 문파의 제자들은 추천장으로 자신들의 활약을 증명하면 충분했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자신이 도운 사람들의 추천장을 받아 오든가, 사마의 무리들을 직접 잡아 무림맹으로 끌고 가야 했다.
어찌 보면 기본적인 실력을 가릴 수 있는 제법 적절한 방법이었다.
천룡이 선검문에서 보인 활약은 당연히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아,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천룡이 호무강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험, 내 것도 부탁하네!”
그때, 감석보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호무강이 그런 감석보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부터 천룡 소협과 함께 강호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로 결정했다네! 음하하하하!”
짐짓 호탕한 광소를 내뱉는 감석보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의 표정 역시 구겨졌다.
“나도 따라갈래!”
이때다 하고 감세령이 얼른 나서서 감석보 옆에 섰다.
“넌 또 왜! 넌 천하영웅대회 참가할 실력이 안 되잖아!”
“흥! 난 천룡 소협을 응원하러 가는 거야! 예전부터 모든 영웅들의 탄생에는 아녀자의 내조가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고!”
당돌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억지를 부리는 감세령을 보며 천성은 문득 감씨 집안의 내력이 의심스러워졌다.
결국 끝까지 바락바락 우긴 감석보와 감세령을 떨쳐 내지 못한 천성 일행은 무림맹까지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감석보는 이제 스무 살이었고, 감세령은 열여섯에 불과했다.
둘 다 천룡과 비슷한 또래이다 보니 함께 여행하는 것도 심심하지는 않을 듯했다.
게다가 두 남매는 돈이 제법 많았다.
천성도 그 부분에서는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한 철혈문의 여행 경비라 해 봐야 빤했기 때문에 거의 노숙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들 남매와 함께하면 도시마다 들러 객잔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가 있었다.
다음 날, 호연백은 천룡과 천성, 그리고 감씨 남매를 추천하는 친서를 작성해 주었다.
궁혁도와 헤어진 천성 일행은 곧바로 호천덕과 호연백에게 인사를 하고 선검문을 나서 무림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용과 도깨비가 조각된 기둥 여덟 개가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웅장한 대전.
소공녀라 불리던 면사의 여인과 매의 가면을 쓴 섬응이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 앞에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 서 있었다.
사내는 한참 동안 두루마리를 유심히 읽었다.
한데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과연 그가 화를 내고 있는지 어떤지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호목(虎目)에 진한 눈썹, 선이 굵은 얼굴이 무척 인상적인 사내였다.
상투를 튼 머리는 용 문양이 새겨진 황금 비녀로 고정시켜 놓았는데, 귀밑머리가 어깨 근처까지 늘어져 있었다.
“혜란아, 고생이 많았구나. 몸은 괜찮으냐?”
차분한 목소리로 사내가 소공녀에게 물었다.
“네, 아버님.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괜찮다. 어차피 일이라는 게 항상 성공할 순 없는 법이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것도 수많은 실패들을 딛고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더냐.”
사내가 자상하게 소공녀를 다독였다.
순간, 소공녀의 볼에 주르륵 눈물을 흘러내렸다.
“이제껏 수많은 세월을 기다려 왔는데 조금 늦어진다 한들 어떠하리.”
사내가 허공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그래, 이 보고서의 내용이 사실이더냐? 영력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고?”
“그러하옵니다. 그자의 능력은 실로 놀라워서 섬응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고, 저의 천안과 미랑의 제혼술을 단숨에 깨뜨려 버렸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능력이 한 가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사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력을 통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개인의 특성과 소질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로 인해 한 사람이 한 가지 이상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조직 내에서도 오직 자신을 포함한 세 사람만이 두 가지 이상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흠, 대체 그자의 정체가 무엇인가…… 혹, 황제의 졸개 같지는 않더냐?”
“그들은 영력의 사용을 금제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육신으로는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영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속단은 금물이다. 그간의 세월을 생각하면 놈들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을 수도 있어. 우리도 수많은 연구 끝에 미흡하지만 영력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지 않았더냐.”
사내의 말에 다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열쇠를 찾기 전까지는 되도록 놈들의 시선을 끌어선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사건을 일으킨 이유도 결국 열쇠로부터 놈들의 주위를 돌리기 위한 방책이었지 않은가.
아직 놈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정확한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자신들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면 매우 위험했다.
“흐음…….”
“환사!”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던 사내가 외치자 대전 중앙에 뱀의 가면을 쓴 자가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서 있던 것처럼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는 천률음보를 훔쳐 갔던, 바로 그 괴인이었다.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목적은 무엇인지 비영들을 최대한 동원하여 알아내도록 해라!”
“존명!”
환사라 불린 자가 사내가 고개를 숙인 채 읍했다.
“흑암문주를 제압한 녀석에 대한 정보는 있는가?”
“현재로서는 감숙의 철혈문이라는 변두리 문파의 제자라는 것밖에 별다른 정보가 없습니다. 비영들에게 놈에 대해 상세히 파악하도록 명을 내려놓았으니 곧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후, 하늘이 아직 우리의 복수를 원치 않는 것인가……. 혹시라도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놈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라!”
사내는 한차례 한탄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천률음보의 해석은 어디까지 진행되어 있는가?”
“이제 첫 번째 열쇠의 위치를 해석하였고, 나머지도 생각보다 빠른 시간 안에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대전 뒤쪽에 서 있던 주작이 수놓아진 흰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곧 열쇠들을 찾을 수 있겠구나. 한 개는 이미 우리가 확보하고 있으니 나머지 여섯 개의 열쇠를 찾고 나면 복희의 유진을 얻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지. 구공(究工), 자네가 수고가 많네.”
“송구하옵니다!”
중년인이 사내의 치하에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섬응은 음후(音?)와 함께 첫 번째 열쇠를 확보해라! 열쇠의 수호자는 강력한 영력을 가지고 있을 테니, 만일을 대비해 영침을 가져가도록 해라!”
“존명!”
“공동파와 사혈맹 간의 전쟁이 무산된 이상 마련을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번 천하영웅대회를 이용한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겠지?”
“이미 팔신 중 두 사람이 호북성에서 암계를 펼치고 있습니다. 놈들은 결코 빠져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구공이 눈을 빛내며 답했다.
“이번 천하영웅대회는 무림맹에 잠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혜란, 너는 다른 임무를 중지하고 천하영웅대회에 직접 참여하도록 해라.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황제의 졸개들이 무림맹과 연계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놈들의 정체를 밝힐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림맹에 우리의 사람을 심을 필요가 있다. 그를 위해서는…….”
사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무거운 표정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영력의 봉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도 잘 알겠지?”
황제의 무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영력을 봉인해야만 했다.
이럴 때를 위해 이들은 따로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이다.
“저는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어요.”
용혜란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영력의 봉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당한 고통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명을 내리는 사내로서도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승리를 위해서는 너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내가 슬픈 눈으로 용혜란을 바라보았다.
“일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결의가 느껴지는 단오한 목소리로 용혜란이 답했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구나.”
사내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놈들의 심장에 비수를 꽂고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을 것이다! 일족의 복수가 머지않았으니 너희는 모든 것을 바쳐 대계를 수행하라!”
“존명!”
“존명!”
사내의 명을 받은 소공녀와 섬응이 대전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