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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2(9화)
3장 화산파(3)
“호오!”
접객당주 진명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천룡을 바라보았다. 기운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으나 단단한 몸과 자세에서 천룡의 경지가 예사롭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장문인께서 자네들을 만나 뵙고 싶어 하시네. 나를 따르게.”
천성 일행은 깜짝 놀랐다.
장문인을 뵐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은 전혀 못했기 때문이다.
감석보의 대연문이 화산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속가이긴 했으나, 대연문주가 온 것도 아닌데 장문인이 직접 자하궁(紫霞宮)으로 초대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자하궁은 장문인의 거처이면서 화산의 중요 대소사가 결정되는 곳이었다.
그러니 일행이 안내된다는 것은 그만큼 화산파에서 천룡을 중히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뜻밖이군요. 설마 이 정도로 화산에서 신경을 쓸 줄은 몰랐는데.’
천성은 갑작스러운 환대가 조금은 어리둥절했다.
[아무래도 섬서에선 화산의 눈을 피할 수 없는 법이지. 이미 네 형의 활약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을 테지. 천룡의 실력이 소문대로인지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야. 만일 사실이라면 앞으로 강호에 상당한 바람을 일으킬 테니까.]
어느새 무림의 박사가 된 양 점잖게 이야기하는 무숙의 목소리에 천성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무숙이 한 이야기만큼은 제법 일리가 있었다.
어떨 때는 정신이 나간 듯 보이다가도, 어떨 때는 천하의 현인처럼 이야기하는 무숙의 모습에 천성은 도대체 어떤 것이 진면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빨리 내 정체를 알고 싶다.]
‘또 제 생각을 읽었군요.’
[어허, 일부러 읽은 게 아니야. 다 들리는 걸 난들 어쩌란 말이냐?]
천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숙의 말대로 화산은 이미 선검문의 일을 상세히 전해 들은 상태였다.
구파일방이나 팔대세가의 제자가 아닌, 이름 없는 변두리 문파에서 오룡 급의 신진 고수가 나타났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서 같은 목적을 공유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천룡의 실력과 성향,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천재는 자칫 그들의 체재를 무너뜨릴 수도 있었기에.
늘 그렇듯 자신들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인재라면 애초에 싹을 잘라 버릴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랜 세월 동안 구파일방과 명문세가들이 그 위세를 유지할 수 있던 방법이기도 했다.
천룡 일행은 떨리는 마음으로 자하궁으로 향했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나는데, 맞은편에서 천성의 눈에 익은 소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머, 설련 언니!”
감세령이 아는 체를 하며 반갑게 달려갔다.
“아, 세령아. 석보 사형도 오셨네요. 어머, 진명 사숙과 명 사제까지 있네? 다들 어인 일이세요?”
화설련이 감세령과 감석보를 보고 놀라 다가와 물었다.
“석보가 손님을 데리고 왔구나. 철혈문의 궁천룡 소협과 그 동생 궁천성 소협이시다. 서로 인사 나누거라.”
화설련의 시선이 천룡 형제에게로 향했다.
곧 천성의 얼굴을 알아본 화설련이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때 유가장의 그 무사분이시군요.”
“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천성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유가장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쓰렸기 때문이다.
“그때 함께 계시던 분은 안 보이네요?”
“그날 흑의인들에게 당해서…….”
“아…….”
화설련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차피 강호인이란 늘 죽음과 함께하는 자들.
어찌 보면 일상과도 같은 일인 것이다.
천성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 화설련의 시선이 천룡을 향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천성의 형인 것 같았는데, 동생과는 다르게 빼어난 용모와 기품을 지니고 있어서 절로 호기심을 느껴진 것이다.
“사매, 바로 이 공자가 철혈신룡 궁천룡 소협이야! 흑암문주를 물리친 영웅이지! 궁천룡 소협, 이쪽은 사봉 중 화산일미(華山一美)라 불리는 화설련 소저입니다. 제 사매지만 정말 예쁘지요? 핫하하! 물론 우리 유설 낭자만큼은 안 되지만. 큼큼.”
감석보가 특유의 허풍을 섞어 두 사람을 소개했다.
화설련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얼마 전 들었던 놀라운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철혈문의 궁천룡입니다.”
천룡이 포권을 취하며 화설련에게 인사했다.
화설련의 미모는 사봉이라 불리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열 살 이후로는 소화산에 틀어박혀 수련만 해 온 천룡이다 보니 화설련 같은 미녀를 접해 보았을 리가 없었다.
‘오, 정말 아름답구나. 이 여인이야말로 나 궁천룡의 배필에 어울리지 않은가. 아니지. 사봉이라면 이런 미인이 세 명이 더 있다는 이야긴데, 나머지 세 명도 전부!’
이 순간, 천룡은 영웅이 되는 것 외에 또 하나의 목표를 세웠다.
“화산의 화설련이에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화설련 또한 천룡을 유심히 살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조각 같은 몸매, 진중한 말투와 예의 바른 행동, 거기다 소문과 같은 실력까지 겸비했다면 여인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배필감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화설련의 볼이 붉게 상기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 정도면 남궁 오라버니에게도 절대 뒤처지지 않겠어. 과연 소문만큼의 실력만 있다면 놓치기 아까운 사람이야.’
화설련은 천룡이야말로 자신의 운명을 걸어 볼 남자라고 생각했다.
열여덟 소녀의 방심을 녹일 만큼 모든 조건을 갖춘 멋진 사내인 것이다.
다만, 흠이 있다면 이름 없는 문파 출신이라는 건데, 그 정도는 천룡의 능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장문인과 여러 어르신들을 뵈러 자하궁으로 가는 길이니 너도 함께 가자꾸나.”
“네.”
화설련이 이때다 싶어 얼른 대답한 후, 일행과 함께 자하궁으로 향했다.
* * *
자하궁 안쪽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장문인이 불렀다는 말에 얼떨결에 따라온 천성 일행은 대전 안에 자리 잡은 많은 사람들로 인해 상당히 당황했다.
특히 천룡은 이 많은 사람들이 결국엔 자신을 보기 위해 모였다는 사실이 난감하면서도 상당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자하궁 입구에 발을 들여놓자 묵직한 기운이 사방에서 천룡을 짓눌렀다.
대놓고 압박하지는 않았으나 은연중에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고 천룡의 기를 죽이려는 것이리라.
그 사이로 중앙에 앉은 장문인이 미소를 지으며 천룡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게. 우리 화산파에 온 걸 환영하네. 본인은 화산의 수장인 화선학이라 하네.”
장문인이 차분하게 천룡을 반겼다.
화산의 장문 화선학은 무척 인자해 보이는 인상의 장년인이었는데, 남화건 아래로 백발의 귀밑머리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는 백면검군(百面劍君)이라는 별호처럼 자상한 인상 뒤에 여러 가지 다른 면모를 감추고 있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강호에서는 화선학을 일컬어 결코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무서운 자라 평하곤 했다.
사실 그가 장문이 되기까지 여러 소문들이 많았다.
함께 후보로 꼽히던 몇몇의 사형제들 중 그가 가장 무공이 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대 장문인은 결국 화선학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 결과를 두고 화산의 문도들은 화선학이 실력이 아닌, 시류에 편승하는 능숙한 처세술과 교활한 술수로 장문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수군거리고는 했다.
“철혈문의 궁천룡이라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천룡이 정중히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뒤를 이어 천성과 나머지 일행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화선학에게 인사했다.
천룡을 유심히 관찰하던 화선학이 물었다.
“그래, 이번 선검문과 흑암문의 결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자네같이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인재가 사파를 물리치는 데 앞장서니, 우리 정파 무림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는 것 같구만!”
화선학은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천룡을 치하했다.
“그래, 자네 나이가 지금 어떻게 되는가?”
“이제 열아홉입니다.”
천룡의 대답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워 보이는 천룡의 외모에 적어도 스물둘이나 셋은 되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한데 겨우 열아홉의 나이로 초절정고수를 꺾다니, 참으로 경의로운 일이었다.
장문인 화선학 역시 놀란 표정으로 천룡에게 물었다.
“허어, 겨우 명이보다 한 살 많을 뿐인데…… 대단하구만. 그대의 사문은 어떻게 되는가?”
순간,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과연 천룡의 무공이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지 다들 궁금한 것이었다.
철혈문 출신이라 자신을 소개했지만, 그런 변두리 문파에서 천룡을 키워 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에 분명 따로 스승이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삼선께 가르침을 받았으나 제가 많이 부족하여 스승님들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문인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장내의 인사들 역시 놀란 표정으로 천룡을 바라보았다.
‘삼선의 제자라면, 사문도 결코 무시할 곳이 아니야.’
화설련의 눈빛이 빛났다.
그나마 한 가지 흠이었던 빈약한 사문의 문제까지 해결되자 화설련은 천룡에게 더욱 욕심이 생겼다.
“흐음, 삼선의 제자라……. 삼선께서 제자를 들이시다니, 의외로군. 허허, 하기야 그 양반들 정도 되니 이런 인재를 키워 내셨겠지.”
삼선의 제자라면 함부로 대할 상대는 아니었다.
삼선이 비록 무림에 이렇다 할 세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많은 강호 무인들이 경외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실력 또한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고개를 모로 돌려 무언가 생각을 하는 듯하던 화선학이 천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이렇듯 찾아와 주었으니 화산파를 구경하며 편히 쉬다 가게.”
그러고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이왕 화산파에 들른 김에 우리 젊은 제자들의 안목도 넓힐 겸 간단한 비무를 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 새로운 무공을 접해 보는 것은 자네에게도 제법 도움이 될 것이네.”
미소를 지으며 화선학이 천룡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영호명의 눈이 빛났다.
그러지 않아도 천룡의 실력은 과연 어떨지 한 번 부딪쳐 보고 싶은 터였다.
그로서는 또래의 청년 고수와 검을 맞댈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과는 경지 차이가 많이 나서 항상 일대제자나 사숙들과 비무를 하곤 했다.
그런 영호명에게 천룡과의 비무는 또래의 청년과 마음껏 검을 맞대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소문대로라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을 터.
무인은 항상 자신보다 높은 고수와의 겨룸을 갈망하는 존재였고, 영호명 역시 그랬다.
“하핫, 그것참 좋겠습니다. 천룡 공자, 사형제들의 안목도 높여 주실 겸 화산파에 소협의 멋진 실력을 한 번 보여 주시지요!”
감석보가 또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하하하! 화산의 무공을 견식할 기회를 주신다면 저에게도 영광이지요!”
천룡이 호탕하게 웃으며 화천학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무공을 접한다는 것은 그에게도 즐거운 일이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하, 화통해서 좋구나. 그렇다면 누가 천룡 공자와 대결해 보겠느냐?”
화선학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영호명이 얼른 나섰다.
주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지었다.
영호명이라면 젊은 제자들 중에서도 실력이 가장 앞서고 있는 아이였다.
또한 비슷한 또래이니 승부에서 패한다 해도 화산의 이름에 흠집이 날 일도 없었다.
제법 괜찮은 상대가 될 것이었다.
“호오, 명이 정도면 좋은 상대가 될 것 같구나. 그래, 이번 기회에 천룡 공자에게 많이 배우도록 해라. 그럼 장소를 연무장으로 옮겨 볼까요? 자네들도 함께 가세.”
화선학이 영호명의 출전을 허락하고는 천룡 일행과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궁에 모인 사람들 역시 천룡이 과연 소문의 실력을 갖추고 있을지 궁금했던 터라 일행을 따라 연무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