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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2(10화)
4장 재회(1)


화산 문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룡과 영호명이 연무장 한가운데 마주 섰다.
하지만 이번 대결은 어차피 승패가 빤해서 천성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랬기에 천성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문파답게 수많은 건물들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었다.
천성은 기문을 활짝 열어 화산의 맑은 기운을 한껏 호흡했다.
‘후우, 정말 맑고 정순한 기운이군요.’
[그렇구나. 이곳은 기운이 다른 곳과 비교해 훨씬 응집되어 있고 흐름이 격렬하구나. 응? 이것은 영력의 흔적인데!]
무숙의 외침에 천성이 영안을 열었다.
이내 미세한 영력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곧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천성은 깜짝 놀랐다.
‘엇! 나비인데요?’
한 마리 노란 나비가 천성의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마치 따라오라는 듯 멈칫 멈칫 움직는 것이 아닌가.
[흐음, 묘하군. 낯설지가 않아.]
무숙이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했다.
‘쫓아가 볼까요?’
천성은 어쩐지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반드시 따라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천성을 사로잡았다.
[무언가 익숙한 기운이야. 이상하게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구나. 최대한 조심해서 영안을 열고 뒤따라가 보자.]
비슷한 기분을 느낀 무숙도 천성의 뜻에 동의했다.
천성은 감석보에게 잠시 뒷간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곤 연무장을 살짝 빠져나왔다.
나비는 의외로 속도가 빨랐다.
너풀거리며 요리조리 바위와 나무 사이로 묘기를 부리듯 날았다.
천룡은 나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영안을 열고 속도를 높였다.
사사사삭!
그때, 천성의 감각에 미세한 움직임이 잡혔다.
“엇, 누군가 움직이고 있는데요.”
[이 기운은! 저번 그놈들과 비슷한 기운이구나!]
영안에 잡힌 것은 두 명이었는데, 불완전한 영력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공동파 도사들을 죽인 자들과 연관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천성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거리를 충분히 유지한 채 놈들을 뒤따랐다.
신기하게도 놈들의 기척을 찾자마자 나비는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상한 일이군. 나비가 나를 저자들에게 인도한 것인가.’
아직 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 기척으로 보아 점점 더 깊숙이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젠 화산파에서도 제법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흠, 형님이 걱정하시겠군.’
벌써 시간이 이각이 넘게 지난 상태였다.
하지만 놈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
혹시라도 선검문에서처럼 음모를 꾸미려는 것이라면 천룡과 일행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성이 반 각가량 더 움직였을 때,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 앞에 그자들이 멈춰 섰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 명은 매의 가면을 쓴 자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원숭이 가면을 쓴 자였다.
두 명은 흑의 경장 차림이었는데 벽 앞에 서서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가만, 동물 가면이라면…….’
천성의 눈이 부릅떠졌다.
유가장을 공격했던 흑의인들도 동물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중 뱀 가면을 쓴 자가 곡용천의 목숨을 앗아 갔던 것이다.
그때는 천성이 영력을 사용하기 전이었기에 그들의 기운을 파악할 수가 없어 선검문과 연관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선검문에서는 놈들이 가면을 쓰지 않고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때 보았던 뱀 가면과 호랑이 가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로 관계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놈들!’
곡용천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밀려왔다.
놈들을 잡는다면 뱀가면의 정체를 알아낼 수가 있을지도 몰랐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놈들을 족치고 싶었으나, 이럴 때일수록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침착하게 대응해야만 했다.
이미 한 번 섣부른 움직임으로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던가.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천성은 급히 청력을 집중해서 그들의 말소리를 들었다.
“이제 그만 나오시지. 이미 다 알고 왔다. 이깟 결계 따위로 우리의 눈을 속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지?”
매의 가면을 쓴 자가 벽을 향해 이야기했다.
“좋아, 정 그렇게 버티시겠다면 실력행사를 할 수밖에!”
말이 끝나자 원숭이 가면을 쓴 자가 등에 메고 있던 기다란 봉을 꺼내 벽에서 오 장 정도 떨어진 곳에 꽂았다.
봉을 땅에 세워 둔 원숭이가면이 마보와 비슷한 자세로 양주먹을 옆구리에 붙인 채 절벽을 향해 섰다.
좀 더 자세한 상황을 보기 위해 천성이 삼십 장 정도 가까운 거리로 이동했을 때였다.
“우어어어어어어어어!”
갑자기 원숭이가면의 입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우어어어어어어어어어!”
처음엔 작은 돌들이 땅 위에서 들썩거리더니, 온 대지가 부르르 떨리며 진동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쿠르르르르르!
커져 가는 괴성의 위력에 차츰 땅이 갈라지고 절벽마저 크게 흔들려 돌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크윽!”
대기의 진동이 천성이 숨어 있는 삼십 장 밖까지 전해질 정도로 강력한 음파였다.
[허허, 엄청난 파괴력이구나!]
‘으으, 일반인이라면 벌써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충격이군요.’
매의 가면을 쓴 사내 또한 멀찌감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를 막은 채 버티고 있었다.
[저 정도라면 얼마 못 가 절벽이 무너지겠구나.]
절벽에도 차츰 금이 가기 시작할 때였다.
순간, 절벽 가운데에서 세로로 한 줄기 황금빛 선이 생겨나는 듯싶더니, 서서히 절벽이 좌우로 벌어졌다.
그르르르릉!
갈라진 절벽 사이로 온통 푸른색으로 도배를 한 듯한 외모의 사내가 나타났다.
머리카락부터 눈썹, 수염 할 것 없이, 심지어는 눈동자마저 푸른색을 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내였는데, 그는 매우 화가 나 보였다.
“네놈들은 누구냐!”
놀랍게도 사내에게서는 영력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가면을 쓴 자들과는 조금 달랐지만, 분명 영력이었다.
[허, 또 다른 영력을 사용하는 자로구나!]
무숙이 놀라 소리쳤다.
그사이,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대체 어떻게 영력을 사용하는 것이냐! 황제의 졸개들은 영력을 박탈당했을 텐데…… 설마!”
사내의 푸른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아니지. 그들은 이미 다 죽었는데, 그럴 리는 없어. 웬 놈들인지 모르겠으나 이곳은 아무나 함부로 오는 곳이 아니다!”
사내가 흑의인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아마도 그는 가면을 쓴 자들과 적대하는 세력에 속해 있는 듯 보였다.
사내의 영력은 가면 쓴 자들에 비해서 상당히 미약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면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저자 역시 완전치 않군. 이상해. 이렇게 영력을 사용하는 무리가 많은 것도, 거기다 모두 불완전한 방법으로 힘을 얻었다는 것도.]
다행히 태초의 파편을 노리는 자들과는 관계가 없는 듯 보였으나, 만일을 대비해 그들의 연원을 확실히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매가면과 원숭이가면이 사내의 좌우 정면에 삼각형을 이루며 자리를 잡고 섰다.
“흥, 우리는 여기 올 자격이 당연히 있다. 네놈들의 간악한 술수에 천황과 그 일족이 모두 멸족했다 생각했겠지! 하지만 다행히도 그분의 마지막 핏줄이던 넷째 공자께서 살아남으셨다! 천황의 적자인 우리 회천(回天)이야말로 열쇠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
매가면의 말에 사내가 눈에 띄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녕 너희가 그의 후손이란 말인가?”
떨리는 목소리로 절벽에서 나타난 사내가 물었다.
“그렇다. 우리는 그때 부당하게 잃은 모든 것을 다시 되찾을 것이다. 또한 너희가 우리에게 했던 것처럼 한 놈도 남기지 않고 피로 씻을 것이다!”
매가면이 이를 갈며 분노를 토했다.
‘아무래도 양측이 맞붙게 될 것 같군요.’
천성은 어떻게 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당장에 가면인들을 잡아 유가장의 일에 대해 추궁하고 싶었으나, 지금 나선다면 푸른 눈의 사내를 돕는 꼴이었다.
아직 사내의 정확한 정체를 모르는 상황에서 그를 도왔다가 자칫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었다.
차라리 두 무리가 싸우고 난 후에 힘이 빠진 놈들을 제압하는 편이 나았다.
그때,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실로 오랜 시간 후회하며 살았다. 그때, 황제에게 속아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후 스스로 세상과 단절한 채 사조님의 유훈을 지키며 속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대들이 비록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일족이 죽임을 당했다 하나, 사조님의 명을 어기고 사형제에게 칼을 겨눈 원죄에서는 그대들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하니 그대들 역시 열쇠의 주인이 될 자격은 없다!”
사내가 굳은 얼굴로 가면인들에게 말했다.
“흥, 비열하게도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남김없이 도륙한 네놈들이 감히 우리에게 자격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매가면의 말에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조사의 유훈만 아니라면 이미 오랜 시간을 살아온 목숨 따위야 그대들을 위해 바칠 수 있으나, 내겐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내 손에 묻힌 피의 대가로 받은 영원의 사슬이니, 결코 이를 거역할 수는 없다!”
천성은 양측의 이야기에 점점 흥미가 느껴졌다.
‘황제와 관계가 있다면 어느 황제를 말하는 것일까? 혹시 개국공신들을 무차별하게 숙청했던 홍무제 주원장을 말하는 것일까?’
홍무제는 명을 세운 후 피의 숙청을 감행했다.
그 와중에 억울한 죽음도 많았을 것이고, 수많은 원한들을 낳았을 것이다.
“흥, 어차피 말은 필요 없지. 내놓지 않겠다면 강제로 빼앗을 수밖에!”
매가면과 원숭이가면이 영력을 끌어 올리며 사내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