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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2(12화)
4장 재회(3)


천룡과 영호명이 연무장 가운데 마주했다.
사실 결과는 이미 정해진 일전이었다.
화산파의 무인들조차 영호명이 이기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천룡의 실력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정도에 불과한 일전이었다.
물론 천룡은 영호명을 배려해 어느 정도 검을 맞대 주었다.
십여 수가 넘어가자 영호명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삼십여 수쯤 지났을 때, 영호명은 기진맥진해서 더 이상 움직일 여력조차 남지 않았다.
물론 천룡은 처음 그대로 말짱한 상태였다.
밀려드는 허무함에 영호명의 눈이 몽롱해졌다.
‘내가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패배라는 것을 겪어 본 적이 있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열두 살 때 다섯 살 많은 사형에게 패한 적이 있던 것 같다.
‘그때는 참 억울했는데…….’
한데 지금은 어쩐지 억울한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어느 정도여야 억울한 느낌이라도 들 텐데, 워낙에 실력 차이가 컸다.
‘나랑 기껏해야 한 살 차이에 불과한데 초절정이라…….’
영호명은 자신의 무공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봤다.
그동안 스스로 너무 자만―물론 결코 영호명은 자만하지 않았다―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재능이 부족한 것인가.
‘결국 그동안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구나.’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몇 대쯤 쥐어박고 싶어 할 생각을 영호명은 홀로 떠올리고 있었다.
영호명의 멍한 상태를 보고는 천룡이 검을 멈췄다.
“하하하! 좋은 승부였습니다!”
천룡의 말소리에 영호명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부끄럽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실력으로 주제도 모르고 소협에게 비무를 신청했군요.”
영호명은 얼굴에 홍조를 띤 채 천룡에게 마주 포권했다.
“하하, 영호 소협의 실력이 부끄럽다면 어느 후기지수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너무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운이 조금 좋았을 따름입니다.”
천룡은 기다렸다는 듯이 겸양의 말들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영호명을 위로했다.
“그럼 명이를 이긴 네놈은 뭐냐! 괴물이라도 된단 말이냐? 흐흐.”
그때, 언제 나타났는지 정체불명의 중년인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천룡에게 물었다.
천룡은 갑자기 나타나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듯한 중년인의 말에 당황했다.
‘이 노인네는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연무장 안에 나타날 때까지 중년인의 기운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는 필시 자신보다 높은 경지에 있거나, 아니면 무공을 모르는 자이거나 둘 중 하나인데, 이곳이 화산이니 전자일 확률이 높았다.
“매화신검(梅花神劍) 사백조께 인사 올립니다!”
영호명이 중년인의 등장에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주위의 화산 문도들, 심지어 장문인까지도 중년인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중년인이 바로 화산의 최고수이자 무림십대고수의 일인인 매화신검(梅花神劍) 낙조명이었기 때문이다.
“인사는 되었다. 특이한 기운이 느껴져서 내려와 봤더니 제법 재미있는 물건이 하나 있구나.”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은 매화신검이 천룡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영호명의 인사를 통해 중년인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게 된 천룡 역시 얼른 고개를 숙였다.
“삼선께 사사한 철혈문의 궁천룡이라 합니다. 매화신검 어르신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천룡은 스승과 사문을 먼저 밝혀 매화신검에게 자신의 존경을 표했다.
얼핏 보아도 괴팍하게 생긴 그에게 밉보이게 되면 두고두고 괴로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매화신검은 기껏해야 사십대로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는데, 동그란 눈과 턱밑에 자란 염소수염이 짓궂은 소년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오호, 삼선에게 사사했다고? 어쩐지 기운이 매우 특이하다 했다. 하기야 그 늙은이들 정도는 되어야 이런 괴물을 길러 낼 수 있겠지.”
매화신검은 삼선의 신위를 목격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매화신검의 나이는 이미 팔십을 넘기고 있었다.
그는 정마대전 때 마교 수뇌들과의 싸움에 참여했기에 삼선의 실력을 직접 볼 수 있던 것이다.
만일 그때 삼선이 나타나 그들을 돕지 않았다면, 백도가 마교에 패배했거나 잘해야 양패구상했을 것이다.
삼선의 모습을 기억해 내며 매화신검이 천룡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자 화경고수의 어마어마한 기세가 천룡을 압박했다.
“끄응.”
천룡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매화신검의 강렬한 기세에 반발하지 않고 견뎌 냈다.
순간, 매화신검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천룡이 특별히 진기를 끌어올리지 않고도 자신의 기세를 버텨낸 것이다.
물론 겨우 삼성 정도의 진기를 보냈으나, 어지간한 고수라 해도 진기를 끌어 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버틸 만한 위력은 아니었다.
이는 천룡이 익힌 심법이 독특하거나, 공력이 생각보다 뛰어나단 이야기였다.
진기를 거둔 매화신검의 눈에 다시 한 번 장난기가 어렸다.
“어험, 니가 내 아이를 때렸으니, 너희 스승에게 따져 봐야겠다!”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매화신검이 말하자 천룡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 실은 한 대도 때리지는 않았습니다만…….”
그저 검을 몇 수 나눈 것뿐인데 마치 자신이 영호명을 호되게 몰아붙인 듯 따지는 매화신검을 보며 천룡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늙은이가 왜 시비지?’
저 괴팍한 노인의 속셈이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마치 맞고 온 자식을 데리고 때린 자식 부모를 찾아가겠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크흠, 아무튼 우리 명이가 네놈 때문에 심적으로 타격이 심해서 자신감을 잃게 되었으니, 우리 화산의 미래에 심대한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니 삼선에게 반드시 이를 따져야겠다!”
콧바람까지 날리며 투덜대는 매화신검이 이젠 화산의 미래까지 들먹여 가며 천룡에게 따졌다.
화산파의 장문인과 다른 문도들도 매화신검의 갑작스런 행동에 조금은 당황했지만, 원체 자유분방하고 장난기가 많은 분이니 그러려니 했다.
하나 매화신검을 처음 만난 천룡으로서는 그 의도를 알 수 없기에 몹시 난감한 입장이었다.
물론 진실로 매화신검이 찾아간다 하여도 스승들은 꿈쩍도 않을 테지만, 천룡의 입장에선 까마득한 어른인 매화신검의 비위를 거스를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매화신검의 말투나 표정을 보아하니 나쁜 뜻을 가지고 자신을 대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흠흠,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죄를 청해야 하겠습니까?”
천룡이 머뭇거리며 매화신검에게 말했다.
매화신검의 눈동자가 빛났다.
“호오, 네놈이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지? 조금은 기특하구나. 가만 보자, 그렇다면 무슨 벌을 내릴까…….”
매화신검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네놈이 저 아이의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으니,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겠다!”
매화신검은 손뼉을 짝! 치며 자신이 정말 좋은 생각을 해냈다는 듯 기뻐했다.
천룡은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매화신검을 바라보았다.
“명이야, 넌 앞으로 저놈의 옆에서 한 치도 떨어지지 말고 꼭 붙어서 따라다니거라! 물론 저놈을 꺾을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난데없는 말에 장문인과 화산 장로들이 깜짝 놀랐다.
물론 천룡도 마찬가지였다.
매화신검의 말은 앞으로 영호명과 동행하라는 이야기였으니.
“왜, 싫으냐? 설마 이제 와서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것이냐? 끌끌.”
매화신검이 실실 웃으면서 천룡을 바라보았다.
“어르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조금 찝찝하긴 했으나 천룡도 일행이 한 명 더 늘어난다고 하여 문제될 것은 없었기에 흔쾌히 허락했다.
무슨 괴상한 일을 시킬까 하여 걱정했는데, 화산파의 기재인 영호명의 합류라면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화선학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명은 분명 기재이나 아직 나이도 어리고 강호 경험도 적어 자신의 껍질을 깨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화산 내에서는 실력이 비슷한 또래들을 찾을 수 없었기에 마땅한 비교 대상조차 없었다.
하지만 천룡과 함께하다 보면 많은 자극을 받게 될 것이고, 결국 스스로 벽을 깰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거기다 이미 겪어 본 바, 걱정했던 것과 달리 천룡의 성품 또한 나무랄 데가 없어서 정파무림의 현 체재에 문제를 일으킬 반골(反骨)의 소지는 전혀 없어 보였다.
또한 삼선의 제자이니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었다.
결국엔 앞으로 영호명과 함께 백도를 이끌어 갈 기둥이 될 아이였다.
그러니 지금부터 우의를 다지고 서로의 마음을 맞추는 것 또한 좋은 일이라 생각되었다.
“제자, 사백조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영호명이 밝게 상기된 표정으로 매화신검의 명에 대답했다.
천룡과 함께하게 된다 생각하니 몹시 기대가 되었다.
천룡의 무공을 곁에서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되리라.
그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언젠가는 천룡을 넘어설 것이라 다짐하자 영호명은 잃었던 자신감이 서서히 다시 차오르는 걸 느꼈다.
장로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화산의 미래를 짊어질 영호명이었다.
그런 그가 앞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고 있는 것이다.
“잘 생각했다. 그럼 앞으로 우리 명이를 잘 부탁하마. 만약에라도 네놈이 실력이 더 앞선다고 홀대했다가는 내가 당장 쫓아가서 몽둥이질을 해 줄 테다! 알겠느냐! 큭큭큭.”
매화신검이 흡족한 표정으로 천룡에게 당부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힘차게 대답하고 일행에게 돌아온 천룡은 문득 천성이 보이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감 공자, 혹시 천성이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아까 뒷간에 간다며 사라졌는데, 지리를 잘 몰라서 헤매고 있는 모양입니다. 거, 사내가 아무 데나 숲 속에 그냥…… 큼, 대충 처리할 일이지. 흠흠.”
감석보가 말하면서 마치 옆에서 냄새라도 나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곧 오겠지요. 설마 화산에서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아마도 볼일을 마치고 화산의 경치에 취해 여기저기 구경하는 모양입니다. 하하!”
감석보의 말마따나 화산파에서 별일이야 있겠는가.
혹시라도 쓸데없이 아무데나 함부로 기웃거리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조금은 걱정되었으나, 천성이 그 정도도 판단할 줄 모르는 아이는 아니라 생각되어 천룡도 걱정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