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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심장기사단 1 (11화)
제5화 심통 불감증Ⅱ(2)


베간커 자작 성.
챈디아 웬슬라니. 그녀는 두 달 전에 행방불명된 머기엄 베간커 자작의 처였다. 항간에 숨죽여 떠도는 소문으로는 베간커 자작이 죽었다고 하였다.
챈디아는 소문대로 베간커 자작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소망했다. 그만큼 머기엄 베간커 자작을 혐오하고 경멸하고 있었다.
두 달 동안 남편의 얼굴을 보지 않으니 먹지 않아도 살이 쪘고, 몸무게가 점점 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같이 가뿐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산 넘고 산이라고 했던가? 남편보다 더 혐오스러운 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남편의 이복동생이었다.
제 이복형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머저란 베간커가 턱을 오만하게 추켜세운 채 애써 우아한 동작을 연출하면서 아침부터 스테이크를 썰어댔다.
실제로는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를 긁으면서 접시가 덜거덕거리는 소리와 쇠 긁는 소리가 합쳐져 함께 식사하는 사람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반숙으로 익힌 에그 프라이와 따뜻하게 덥힌 우유로 간소한 아침을 들고 있던 챈디아는 나이프를 쥔 손을 부르르 떨렸다. 그녀가 아침부터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은 머저란의 천박한 식사 예절 때문만은 아니었다.
머저란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우뚝 솟은 가슴을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발정 난 수캐 같은 놈! 오크보다 추악한 놈! 썩은 고름을 줄줄 흘려내는 좀비보다 더 역겨운 놈!’
챈디아는 속으로 온갖 저주의 말을 남발하면서 입에 머금은 우유를 씹고 또 씹었다. 마치 머저란을 씹어 죽일 듯한 기세로 맹렬히 짓이겨 씹었다.
“형수님.”
“…….”
“친정인 웬슬라니 남작 영지가 파산 직전이라고 하지요?”
증오심으로 타오르던 챈디아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머저란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면서 말을 이었다.
“나 머저란은 운이 대단히 좋은 모양입니다. 이 시동생은 형님을 잃은 슬픔과 친정에 어려움으로 시름하는 형수님을 어떻게 도와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지 뭡니까.”
챈디아는 코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베간커 자작이 행방불명되고 죽었다는 소문을 접하자마자 그녀보다 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이가 바로 머저란이었다. 그리고 베간커 자작의 열두 첩들을 겁간하고 모두 제 것인 양 형의 모든 것을 차지했다.
머저란이 차지하지 못한 것이 유일하게 하나 있었다. 그건 형의 부인인 챈디아,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끊임없이 챈디아에게 추파를 던져 왔다.
그녀는 첩들과는 달리 정실부인으로 명색이 자작 부인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했고 강제할 수도 없었다, 아직까지는.
“저의 고뇌 어린 정성이 하늘에 닿은 것인지 200만 골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거금을 형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머저란이 미끼를 던졌다.
챈디아는 그게 미끼라는 것을 알면서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격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만큼 그녀의 아버지가 벼랑 끝까지 몰려 있었기 때문에 초연하게 대처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반응을 읽은 머저란이 자못 만족스럽다는 듯 더욱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작위 승계 권리를 넘기란 뜻인가요?”
작위 계승 제1순위는 베간커 자작의 죽은 전처가 낳은 외아들 글로불린이었다.
한 달 전 머저란은 글로불린을 데리고 수도로 갔었다. 베간커 자작의 죽음을 왕실에 보고하고 작위를 글로불린이 이어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글로불린은 수도로 올라가던 중 원인 모를 열병에 걸려서 그만 객사해 버리고 말았다.
왕실은 베간커 자작의 행방불명에 의문을 품었고, 또 시체를 회수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서 베간커 자작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후계자였던 글로불린의 죽음도 석연치 않다는 이유로 엄중한 수사를 해야겠다면서, 제2순위인 챈디아의 작위 계승 권한을 무기한으로 보류해 버렸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머저란이 무슨 짓을 했는지 왕실은 머저란을 베간커 영지의 대리로 세워 버렸다.
챈디아는 베간커 영지의 최고 신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지의 대행이 된 머저란이 영지의 재산을 통제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친정의 몰락을 외면할 수 없었던 챈디아는 몇 번이고 머저란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때마다 머저란은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면서 예산이 빠듯하다는 이유로 그녀의 청을 깡그리 거절했었다.
그러면서 챈디아에게 작위 계승권을 넘길 것을 은근히 압박했고,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잠자리를 요구했다.
머저란이 그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 자신의 작위 계승권이 제5순위였기 때문이다. 죽은 베간커 자작에게는 두 명의 배다른 형제가 더 있었고, 모두 머저란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순위도 뒤로 밀려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일시에 물리치고 머저란이 작위를 이을 수 있는 방법은 제2순위인 챈디아가 보증을 서는 것으로 순위를 양도받는 것이었다.
머저란이 말했다.
“당장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두고 거래를 하자는 건가요?”
“형수님은 미망으로 지내기에 너무 젊습니다. 또 아름답지요. 온갖 지저분한 놈들이 연약한 형수님께 달려들어서 이 베간커 영지를 조각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기까지 말한 머저란은 의도적으로 말을 끊고 침음을 흘리는 그녀의 난처함을 감상하면서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머저란이 경쟁자를 물리치고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그녀와의 공식적인 결합이었고, 그것은 보다 확실한 전략이었다.
레비우스 왕국에서 죽은 형제의 가족을 부양하고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대단히 존경받는 선행 중 하나로 추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저란의 교활한 계략을 알아차린 챈디아는 격분해서 소리쳤다.
“거절하겠어요!”
하지만 머저란은 빙글거리면서 강압적인 어투로 통보했다.
“제가 형수님의 정식 남편이 되어서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가련한 형수님과 영지를 지키고, 더불어 형수님의 친정인 웬슬라니 남작령도 구제하고요.”
“싫다고 했잖아요! 죽으면 죽었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일이면 웬슬라니 남작은 집도 절도 없는 거지로 나앉고 말 텐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이 비열한!”
“아하하하! 이미 형님에게 한 번 판 몸뚱이 아닙니까? 그깟 몸뚱이 닳기는커녕 오히려 물이 단단히 올랐구만, 숫처녀도 아니면서 내숭을 떨다니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몰락하는 아비의 처절함 앞에서 고결한 척 도도하게 구는 것은 자식 된 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무엇이 현명한 처사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지요.”
“이이익!”
그녀가 혐오스러운 베간커 자작에게 시집을 오게 된 동기는 그놈의 돈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베간커 자작보다 수십 배는 더 역겹고 야비한 머저란이 그것을 거론하면서 그녀가 내내 억누르고 있던 수치심을 끄집어냈다. 숙녀의 정절과 명예를 농락하고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주었다.
“결정이 나면 오늘 밤 제 방으로 오십시오. 아마 오늘 밤이 지나면 이 레비우스 왕국에서 웬슬라니란 이름의 지명이 지워져 버리고 말 겁니다.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어리석은 선택은 하시지 말길 바랍니다. 우후후후.”
그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머저란이 토하고 싶을 정도로 흉물스러운 웃음을 노골적으로 흘리면서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식사를 끝낸 머저란이 일어나려는 것이다.
챈디아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또다시 몸을 파는 것 같은 나락으로 자신을 내던지고 싶지 않았다.
“200만 골드가 갑자기 어디서 생겼다는 것이지요?”
그녀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머저란이 댄 변명이 있었다.
첫 번째 변명은 베간커 자작이 이끌고 나가는 바람에 함께 증발해 버린 영지의 기사와 병사들의 가족에게 보상해 줄 돈이 많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그 공백으로 영지의 치안이 위태하다면서 능력이 출중한 기사들을 새로 영입하고 병사들을 양성해야 하는데 많은 예산이 든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왕실이 베간커 자작의 행방불명 사건을 탐문 수사하라는 명령을 베간커 주변 영지에 내렸다.
명령을 받은 영주들은 각각 기사 십 수 명씩을 파견했고, 그렇게 해서 모인 100여 명의 수사단이 결성되었다. 그 수사단이 수사를 하는데 드는 일체 비용을 모두 베간커 영지가 부담해야 했다.
기사 1백 명이 먹고 마시는데 드는 경비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수사를 하기에 앞서 머저란에게 유리한 쪽으로 하게 만들기 위해서 추가의 자금이 필요했고, 수사를 마치고 각 영지로 귀환할 때도 섭섭하지 않게 수고료를 지불해야 했다. 그렇게 지출된 돈이 더 큰 것이다.
하지만 돈을 물 쓰듯이 처발랐던 수사단이 엘리고스 숲에 들어가서 또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렸다.
아무튼 머저란의 변명은 일견 타당했다.
그럼에도 챈디아가 변명이라고 하는 것은 베간커 영지의 금화가 겨우 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메마르지 않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200만 골드가 생겼다면서 선심을 쓰듯이 내놓겠다고 하였다. 그 또한 말장난인 줄 알지만 허점을 잡아서 반격해야 했다.
“영지의 재산을 마음대로 융통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지 않았던가요?”
“신이 이 머저란의 편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멍청이들이 제게 그 돈을 안겨주더란 말이지요.”
“그게 무슨 말이지요?”
“요전 수도에 다녀왔을 때 수배 명단을 영지 곳곳에 부착했던 것은 아시지요?”
“네.”
“그중에서도 가장 거금인 현상범을 목격했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가장 큰 현상금은 100만 골드가 아니었나요?”
“신고인에게 100만 골드, 그 사실을 수도에 보고하고 놈을 회유하거나 생포하는 영지에게 100만 골드. 모두 해서 200만 골드가 되는 것이지요. 즉 200만 골드는 이 머저란이 벌어들이게 될 돈으로, 순수하게 제 재산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기꺼이 형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아하하하!”
머저란이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감동 좀 해봐라, 라는 어투로 말했다.
챈디아는 모른 척하면서 머저란의 설명 중에 석연치 않은 부분을 지적했다.
“그러면 신고인에게 100만 골드를 줘야 한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200만 골드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신고인의 입을 다물게 하면 상금 전부가 놈을 포획한 자에게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지요? 설마 죽이려는 것은 아니지요?”
잔악한 머저란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머저란은 그녀의 동그랗게 뜨여진 눈을 보고 귀엽다는 듯이 음험하게 입술을 핥았다. 그리곤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우후후. 위험한 입은 빨리 다물게 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들은 이미 지난 저녁부터 영원히 함구하게 되었지요.”
“벌써… 어떻게…….”
챈디아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들이 죽은 게 도산에 처한 웬슬라니 영지 때문인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게 짓눌리고 가슴이 떨리는 것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겁에 잔뜩 질린 그녀가 딱하다는 듯이 머저란이 혀를 쯧쯧 차면서 말했다.
“그들은 방금 우리가 먹었던 소와 닭 같은 가축보다도 못한 버러지 같은 화전민입니다. 죄를 짓고 산속에 숨어들어 짐승처럼 사는 인간들로 세금 한 푼 안 내면서 무위도식하는 인간쓰레기 범법자들입니다. 왕국민으로서 사명과 의무를 저버린 자들은 극형을 처해도 무방하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신고인을 죽인다고 해도, 신고인 외에 다른 사람이 또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화전민을 임의대로 처벌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상금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면 어떻게 하죠? 그것도 직접 수도로 찾아가서 하소연을 하게 되면 머저란 경의 비양심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 텐데요?”
비양심이라는 말에 자칫 모욕감을 받을 수 있는데도 머저란은 더없이 유쾌하다는 양 웃었다.
“우후후!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곧 병사를 들벅 마을로 보낼 참이었으니까요.”
“들벅… 마을이요?”
들벅이란 이름이 왠지 귀에 익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들벅 마을 출신의 용병이자, 약초 채집꾼이자, 약재 관리사인 두크.
두크는 처음엔 용병의 신분으로 그녀의 친정인 웬슬라니 영지에 찾아왔었다.
그도 여타 얼간이들처럼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해서는 넋을 빼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 하나로 웬슬라니의 병사로 직업을 바꾼 아주 웃기는 남자였다.
하지만 두크는 보통 얼간이들과는 달랐다. 어느 날부터 병약한 웬슬라니 남작에게 약초를 구해다 주면서 아버지의 환심을 사고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베간커 자작에게 시집을 오게 되자 두크는 그녀를 따라와서 어느새 베간커의 신임받는 약재 창고 관리인이 되어 있었다.
머기엄 베간커 자작은 물론 현 영주 대행인 머저란에게까지 입에 발린 아부를 늘어놓고 정력에 좋은 약초를 구해다 주면서 단단한 신뢰를 쌓아가고 있는 두크였다.
동시에 베간커 영지에서 정을 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녀를 항상 위로해 주고, 그의 능력 한도 내에서 자잘한 도움을 주고는 하였다.
또한 아버지의 약은 그의 형제 중에 막내라는 유크가 구해준다고 하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챈디아는 두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와 아버지를 돕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변화무쌍한 남자, 두크의 고향이 바로 들벅 마을이었던 것이다.
머저란이 느물거리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들벅은 놈들이 사는 마을의 이름이지요.”
“마, 마을 사람 전부를 죽인다고요?”
두크의 고향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목소리가 절로 떨려왔다.
“필요하다면 모두 죽여야 하겠지요. 형수님의 친정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지금 누구를 동정할 때가 아닙니다. 한순간의 동정으로 일을 그르칠 엉뚱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형수님.”
“네에…….”
“혹여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현상범은 들벅 마을에 없습니다. 웬슬라니로 사람을 보내서 현상금을 가로챌 꿍꿍이는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자칫 소문이 퍼지면 다른 영지에서도 현상범을 잡겠다고 몰려들 테고, 시끄러워지는 만큼 놈들이 눈치챌 테니 도주하고 말 겁니다. 오히려 현상금이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조신하십시오.”
머저란은 그 경고를 끝으로 식당을 나갔다.
챈디아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버지… 아아, 두크! 어찌하면 좋아요? 제가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가요?’
챈디아는 아버지와 두크 사이에서 갈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