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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심장기사단 1 (12화)
제5화 심통 불감증Ⅱ(3)
두크는 전날 영주성으로 들어온 네 명의 청년들을 멀찍이서 목격했었다.
약간은 흥분한 듯 득의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고향 청년들을 봤을 땐 왠지 기쁨보다는 염려가 앞섰다.
당시 영주 집무실로 직접 인솔해 가는 수문장이 고향 청년들과 농담을 주고받았었다.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보았을 때 나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영주 집무실을 나올 때는 입에 재갈이 물리고 오라에 묶여 끌려 나왔다. 그리고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제야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두크였지만, 지금까지 은밀하게 해온 일이 있어서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섣부른 판단과 행동으로 자칫 공든 탑이 무너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지 먼저 알아보아야 했다. 청년들이 처한 사정도 알릴 겸 해서 들벅 마을로 사람을 보냈다.
그 일로 내내 정신이 뒤숭숭했던 참인데 챈디아가 그를 찾아왔다.
“정말로 죽였다고 했습니까?”
어지간해서는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는 두크가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래요. 머저란이 그렇게 말했어요. 미안해요, 두크.”
가슴 앞에 두 손을 얹은 챈디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결국 챈디아는 두크를 찾아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명예를 스스로 더럽힌 자는 귀족도 사람도 아닌 몬스터보다도 추악한 짐승이라고 결연한 모습으로 말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두크는 울상이 된 챈디아를 진정시키면서 그 스스로도 분노를 억눌렀다.
“다 돈에 눈이 먼 바보 같은 놈들의 잘못입니다. 아가씨의 잘못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크의 고향은요?”
“사람을 보내서 대피시키면 됩니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네… 저기, 두크!”
챈디아가 막 자리를 뜨려던 두크를 잡아 세웠다.
“아버지가 파산을 면치 못할 거예요. 아버지께서 노년을 보낼 만한 화전 마을이 없을까요?”
“알아보겠습니다.”
“두크가 직접 가세요.”
“저는 하고 있던 일이 막중해서 당장 베간커를 떠날 수가 없습니…….”
“아니, 저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옛?”
챈디아의 방금 말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것이었다.
두크는 챈디아의 심하게 떨리는 눈동자에서 그녀가 심하게 불안해 한다는 것을 그제야 읽어냈다.
“베간커 이름이 들리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 가서든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곳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러면 더더욱 지금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안전한 장소를 먼저 찾은 다음에 움직여야 합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그의 말에 챈디아가 기어코 눈물을 터트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요, 두크! 오늘이 아니면 늦을지 몰라요. 머저란이 절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 네? 두크!”
“좀 힘든 여행이 될 텐데… 견딜 수 있겠습니까?”
* * *
가스파르는 항상 동틀 무렵에 기상했다. 하지만 새벽에 잠을 방해받았던 이유 때문인지 동이 트고 한참이 지나서 눈을 떴다. 그나마도 냄새만 좋은 빵 굽는 냄새가 아니었다면 계속 잤을지도 몰랐다.
간밤에 소란을 피웠던 들벅 마을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고 없었다. 그들이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면서 돌아가는 소리를 잠결에 어렴풋이 들었었다.
가스파르는 아침을 먹기 위해서 공동 취사장으로 향했다.
공동 취사장은 2개월 전 베간커 자작이 식사를 하려 했던 그곳이었다.
가스파르와 그를 따르던 일행은 그곳에 차려진 요리를 먹었고, 병사들이 비상식량으로 싸온 식 재료를 그곳에서 요리해 먹었다. 식량이 떨어진 후부터는 사냥을 해서 또 같은 자리서 해먹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공동 취사장으로 고정되어 버렸다.
당시 300명이 넘는 병사들이 5일 동안 먹으려고 싸왔다가 남긴 군량은 꽤 많았다. 장장 6개월 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여행을 해온 가스파르는 오랜만에 접하게 된 곡물을 보자 무시할 수 없었다.
섬광을 일으킨 반지에 이어서 정착하게 된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이 식량 때문이었다.
마침 엘코크 폭포가 쏟아내는 물은 풍부하였고, 폭포와 이어진 높고 넓은 절벽은 후방을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는 천혜 요새와도 같았다.
살림살이도 있었다. 물론 그것이 모두 야전용 반합 같은 것들이었지만 먹고 자는데 쓰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초반에는 군용 막사에서 생활을 했었다. 평상시에는 밤이슬도 막을 수 있어서 좋았고, 불편함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비바람이 불어치자 막사가 흔들리고 물이 샜다.
무엇보다 몬스터가 사람의 냄새를 맡고 자주 쳐들어왔다. 가스파르도 그랬지만 주민도 제 천막으로 몬스터가 다가오지 않으면 먼저 나서지 않았다.
지척까지 다다른 몬스터가 자신을 해코지를 할 것 같다고 판단이 될 때야 비로소 천막을 베고 나와 몬스터의 대가리를 목에서 도려냈다. 그 결과로 막사의 절반은 주민이 작살내고, 절반은 몬스터가 망가뜨렸다.
결국 그들은 비바람과 이슬을 피할 집을 지어야 했다. 지천에 깔린 게 나무여서 건축자재를 구함에 있어서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건축 기술 없이 모양만 낸 것이어서 여전히 비가 오면 세고, 바람이 불면 들이쳤을 뿐이다. 오히려 막사에서 생활할 때보다 더 불편했다.
어쨌든 죽은 베간커 자작이 가스파르를 엘코크 폭포에 정착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 많은 식량을 남기지 않았다면 가스파르의 발이 계속해서 정처 없이 떠돌았을 테니까 말이다.
취사장 주변에는 실패한 빵들이 널려 있었다. 제법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것은 죄다 먹어 치운 게 분명했다.
가스파르는 실패한 것들 중에서도 그나마 빵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을 집어서 물어뜯었다.
와삭!
입안에서 빵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부서졌다. 맛도 딱 그 맛이었다. 그래도 배를 채우기 위해서 꿋꿋하게 먹었다.
가스파르는 문득 자신이 잃어버린 감정 중에서 그리움이란 것이 먼저 찾아올 것 같았다고 생각했다.
유크의 잡곡 빵에 대한 그리움.
빵을 가장한 썩은 나무토막을 잘게 부숴서 목구멍으로 간신히 넘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빅브래드를 비롯하여 이빨과 발톱이 빠진 암컷 와이번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집 밖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주드로도 여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가스파르는 계속해서 밀을 낭비하고 있는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사베나.”
“네?”
“모두 어디 갔지?”
“몰라요.”
사베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주드로와 기사들은 묻기 전에는 먼저 행선지를 알려주는 바가 없었다.
서로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지 않는 상황에서는 남의 일에 일절 간섭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생활 방식이었다.
“주드로가 와이번을 끌고 나갔어?”
“네.”
“기사들도 함께 갔어?”
“네.”
“어디로 갔지?”
“저기요.”
사베나가 제 머리 위에 허공을 가리켰다.
“조련 나간 건가?”
가스파르가 하늘에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을 보면서 중얼거리자 사베나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드로님이 기사들에게 평보, 속보, 질보, 쾌보를 시켰어요. 와이번들은 기사들의 도보 속도에 맞춰서 날게 했고요.”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라고 했다. 주드로는 그것을 몸소 실천하면서 증명해 보이려는 모양이었다.
와이번이 서식하는 붉은 협곡은 도보로 하루 거리였다. 하지만 조련된 빅브래드를 타고 가면 서너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으니, 딱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주드로는 점심때가 되서야 돌아왔다.
그를 따라나섰던 기사들 중에 도보 시범을 맡았던 조교 기사들은 쉰내가 풀풀 나는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허억허억!”
“학학학학!”
다리도 O자 모양으로 휘어서 후달후달 떨다가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사지를 늘어뜨리고 대자로 뻗어버렸다.
와이번을 타고 조련을 맡았던 기사들은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조련 기사들은 조교 기사들보다 상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모두 와이번이 착지를 하기도 전에 균형을 잃고 죄다 떨어졌다.
쿵!
털퍽!
“아으으… 그만 돌아라, 세상아! 그만 돌아… 우우웁!”
“우에엑! 켁켁!”
뒤늦게 도착한 주드로가 빅브래드를 깃털처럼 가볍게 착륙시켰다. 그리곤 유연한 동작으로 빅브래드의 등에서 뛰어내려서는 가스파르에게로 와 보고하였다.
“조련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가스파르님.”
“응.”
문득 가스파르는 궁금했다.
“돌아왔어?”
“무엇이 말입니까?”
“심통.”
“아니요.”
“정말?”
“네.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응. 혹시 심통이 돌아오긴 했는데 우리가 즐거움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닐까?”
“흐음. 그런 것일까요?”
“응.”
가스파르는 확신을 담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주드로의 와이번 비행 속도 조련은 전날 가스파르에게 당했던 것보다 배로 강도가 높은 것이었다.
가스파르에게 당했던 것에 대한 보복 심리가 작용하지 않고서는 부하들을 이렇게 몰아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심통이 분명했다.
“그럼, 가스파르님. 얼마나 더 굴려야 굴리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을까요?”
주드로의 질문에 땅바닥에 엎어지고 자빠진 기사들이 사지를 부르르 떨었다.
“역시 심통이 맞았어. 다만 심각한 심통 불감증에 걸려 있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
가스파르가 내린 추론에 주드로가 잠시 생각해 보는 기색을 띠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흠. 그래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면 애써 되찾은 심통이 다 무슨 소용이람. 뭔가 좋은 방법 없을까? 흠.”
가스파르의 고뇌 섞인 침음 소리에 땅바닥과 친화력을 쌓아가던 기사들이 또 파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