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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2(14화)
4장 재회(5)
천성이 원숭이가면에게 다가갔다.
한데 원숭이가면에게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놀란 천성이 얼른 원숭이가면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어찌 된 일이지? 얼마 전까지 분명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음, 놈이 독단을 물고 자결한 듯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원숭이가면의 턱 밑으로 검은 피가 흘러나와 있고, 피가 떨어진 자리는 검게 타들어 가 있었다.
천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욕설이 터져 나왔다.
복수에 대한 유일한 단서가 사라진 것이다.
대체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하면 주저없이 목숨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떤 비밀이 사람의 목숨을 걸고 지킬 만큼 중요하단 말인가.
놈들의 독하고도 치밀한 행사에 천성은 절로 치가 떨렸다.
‘이제 어쩌죠?’
천성이 어두운 표정으로 무숙에게 물었다.
그나마 한 가닥 실마리를 줄 것이라 기대했던 원숭이가면까지 죽어 버리자 막막한 느낌이었다.
[일단 저기 쓰러져 있는 녀석에게 놈들에 대해 들어 보는 게 어떠냐? 서로 잘 알고 있는 듯하니,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그 말에 천성이 벌떡 일어났다.
“그렇군요!”
무숙답지 않은 제법 괜찮은 의견이었다.
천성은 기절해 있는 사내에게로 급히 다가갔다.
숨소리가 약하고 불규칙적인 것이, 사내는 상당한 중상을 입은 듯했다.
[저자의 몸에 영력을 불어넣어 보거라. 아마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거야.]
사내의 힘은 영력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수한 천성의 영력이 들어간다면 크게 회복되지는 않더라도 도움은 될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어떻게 영력을 주입하죠?”
천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영력을 주입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아,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놈에 정신하고는.]
이어 무숙이 영력을 상대에게 주입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영력은 의지의 발현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영력은 여러 가지 성질의 힘으로 나타나게 된다.
해서 영력이 발현되는 경우, 시전자의 의지가 그 힘의 성격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천성이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영력을 발출한다면 마치 내공으로 내상을 치료하듯 사내의 몸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현재 천성의 수준으로는 영력을 그만큼 자유자재로 변환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상처가 악화되는 것을 막고 정신을 차리게 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천성이 영력을 끌어 올려 사내에게 집중했다.
후우우욱!
그러자 마치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듯 천성의 순수하고 부드러운 영력이 사내의 몸을 감쌌다.
쿨럭쿨럭.
사내가 검은 피를 토해 내며 정신을 차렸다.
“자, 자네는…….”
사내가 반쯤 감긴 눈으로 천성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천성은 우선은 이 사내의 정체부터 알아내야겠다 생각했다.
이자가 과연 적인지 아군인지 파악이 안 된 지금은 섣불리 도왔다가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사내가 좀 더 정신이 돌아온 듯 자세를 바로 했다.
“자네는…… 혹시 왼쪽 가슴에 소용돌이 문양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사내의 말에 천성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사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당신은 누구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천성이 당장에라도 출수할 듯 위협적인 자세로 사내에게 물었다.
“긴장하지 말게. 난 자네의 적이 아니네. 만일 적이라 해도 어차피 지금 내 상태로는 자내를 어찌할 수 없지 않은가. 콜록콜록.”
사내가 아직은 힘에 부치는 듯 기침을 해댔다.
“내 소개를 하지. 난 신농의 일족, 수(水)의 열쇠를 지키는 청룡좌 강휘성이라 하네.”
부상의 여파로 사내의 목소리는 여전히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사조이신 복희의 명을 받들어 그분의 유지를 지키고 오천 년 뒤에 나타나 우리 일족을 징벌에서 해방시켜 줄 구원자를 기다려 왔네.”
말을 하던 사내가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천성은 사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복희니 신농이니 하는 인물들은 신화시대의 전설이 아닌가.
그런데 그 일족의 후손이라니.
과연 그 말을 믿어야 할지…….
하기야 거의 죽었다 살아나고 머릿속에 무숙을 집어넣고 다니는 자신의 모습 또한 일반인들은 믿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천성은 좀 더 사내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이야기를 하자면 무척 길어질 테니 우선 안으로 들어가세. 나를 좀 부축해 주게나. 크윽.”
사내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다 고통이 심한 듯 다시 주저앉았다.
천성이 보기에도 상처가 워낙 커서 거동하기가 쉽지 않은 듯 보였다.
조금 께름칙한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사내의 표정이나 분위기가 천성에게 해를 입힐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다 자신은 사내의 목숨을 구해 주지 않았는가.
천성은 조심스럽게 사내를 부축해서 절벽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멈췄던 진이 다시 작동해서 입구가 사라졌다.
절벽 안쪽의 구조는 단순해서 반경 삼 장 정도의 공간에 석실이 두 개 있었고, 특별히 문은 없었다.
오른쪽에 위치한 석실에는 제단같이 보이는 돌로 이루어진 구조물이 한쪽에 놓여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무언가를 올려놓았던 듯 청동으로 된 받침대가 놓여 있었다.
나머지 한쪽 석실은 아마도 사내가 주거하던 공간인 듯 단출한 살림살이와 투박한 나무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저쪽으로 가세.”
사내가 천성을 제단이 있는 석실로 이끌었다.
“후우…….”
석실로 들어선 사내가 힘이 드는 듯 깊은 숨을 들이마시더니, 제단의 아래쪽에 새겨진 삼각형의 문양을 손으로 더듬었다.
기이이이잉!
순간, 삼각형 문양이 안쪽으로 쑥 들어가더니, 제단이 좌우로 갈라지고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드러났다.
“놈이 가져간 것은 열쇠가 맞긴 하나 복제품에 불과하네, 진짜는 여기에 있지.”
사내가 천성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자 사방 이 장 정도의 작은 석실이 나왔고, 그 중앙에 푸른빛을 내는 물체가 보였다.
위아래 삼각형 모양을 지닌 두 개의 금속판 사이로 투명하고 푸른 둥근 구가 허공에 떠 있었는데, 스스로 떠 있는 모습이 몹시 신비스러웠다.
중앙에서 조금씩 회전하고 있는 푸른 구체에서는 강력한 수기(水氣)가 느껴졌다.
여러 기운이 섞인 일반적인 자연지기와는 다르게 수(水)의 기운만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사조이신 복희의 유물이 숨겨진 비동을 열 수 있는 일곱 개의 열쇠 중 수(水)의 열쇠라네. 하나의 열쇠이면서 궁(宮), 상(商), 각(角), 치(緻), 우(羽)의 오음 중 우(羽)의 음을 내는 악기이기도 하지.”
[오, 대단하군! 정말 순수하고 농밀한 기운이로구나!]
열쇠를 본 무숙이 감탄했다.
천성 역시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열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설명을 하려면 이야기가 기네. 우선 편히 앉게.”
강휘성이 힘에 겨운 듯 한쪽 석실 벽에 기대앉았다.
천성도 어느 정도 경계를 풀고 반대편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그러자 강휘성이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조이신 태호 복희는 신의 사자일세. 어느 날 인간계에 홀연히 나타나 여러 가지 기술과 문명을 전파했네. 그때, 사조께서는 이 땅을 지배하던 세 종족의 수장을 자신의 제자로 삼고 우주의 기운을 몸에 받아들여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셨지. 그 세 일족이 바로 헌원, 치우, 그리고 우리 신농 일족이라네.”
천성은 강휘성의 이야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전설로 전해 오던 창세신화의 실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강휘성의 말에 의하면, 황제와 싸움을 벌인 치우가 같은 스승을 모신 사형제라는 이야기였다.
천성은 흥미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순간, 강휘성의 눈에 옛날을 추억하는 듯한 아련함이 떠올랐다.
5장 드러나는 비사(秘史)(1)
태호 복희는 아직은 어리석고 보잘것없던 인간들에게 문명을 전파했다.
글을 가르치고 음률을 가르쳤으며, 수많은 새로운 기술과 여러 법령들을 만들어 인간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베풀었다.
사조 복희가 가르친 지식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들은 수많은 기적과도 같은 일들을 행할 수 있었다.
그것은 복희가 세 일족에게 영안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영안을 열고 영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완성이 선행되지 않은 힘의 발전은 끝내 불행한 결과를 불러오고야 말았다.
세 일족은 힘에 취해 점점 더 큰 욕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헌원 일족과 치우 일족은 나머지 일족을 지배하고 자신들만이 힘을 독점하려는 야심을 갖게 되었다.
이를 눈치챈 복희가 그들을 크게 꾸짖고 힘의 사용을 함부로 못하도록 명을 내렸으나, 이미 커질 대로 커진 그들의 야심을 막을 길은 없었다.
얼마 후, 복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가 처음 나타났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리자 두 일족은 다시금 수시로 맞부딪치며 피를 뿌렸다.
심지어 두 일족의 우두머리는 스스로를 황제와 천황이라 칭하며 자신들만이 진정한 복희의 후계자라 주장했다.
복희가 사라진 지 두 달여가 지난 어느 날, 기어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헌원족과 신농족의 아이들 십여 명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두 일족은 분노했다.
당연히 가장 의심이 가는 자들은 치우 일족이었다.
신농 일족의 수장과 황제는 치우에게 이번 일을 함께 따지기로 합의했다.
두 일족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모두 합쳐 천이백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였다.
혹시라도 전면전이 발생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치우 일족은 세 세력 중 가장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신농이나 헌원 어느 한쪽이 혼자서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그러나 두 일족이 힘을 합한다면 치우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결국 두 일족의 연합 병력이 치우 일족의 성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