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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2(15화)
5장 드러나는 비사(秘史)(2)


“치우의 수장 용비는 당장 나와서 잘못을 사죄하고 납치해 간 아이들을 풀어 주도록 하라!”
당시 신농의 수장이었던 강회가 앞장서서 소리쳤다.
황제와 강회는 분노에 차 치우 일족의 성문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을 납치해 간 것이 치우 일족이라 믿고 있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성문이 열리고 천여 명에 가까운 무리가 걸어 나왔다.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치우의 전사들을 모두 불러 모은 것이다.
치우 전사들 앞에는 용비와 서른여섯 명의 전귀(戰鬼)가 살기를 뿌려대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들 서른여섯의 전귀는 달리 삼십육신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모두 영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일당백의 전사들이었다.
도깨비 혹은 동물들이 그려진 가면을 쓴 그들의 기세만으로도 헌원과 신농의 무사들은 상당한 압력을 느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왜 우리에게 너희 아이들을 찾는단 말이냐! 네놈들이 어리석어 아이를 잃어 놓고, 감히 그 화를 우리에게 돌리려는 것인가!”
치우의 수장인 용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헌원과 신농의 무리를 비웃었다.
“흥, 네놈이 정녕 죄를 인정하지 않는구나! 지금 우리 아이들이 단체로 가출이라도 했단 말이냐? 너희 놈들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우리 아이들을 해코지 하겠느냐!”
헌원족의 수장인 황제 희천옥이 분노에 찬 표정으로 용비에게 일갈했다.
“크하하하! 도대체 우리가 그대들의 아이를 데려갔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우리 치우 일족은 비열한 행동을 경멸하는 전사의 일족이다! 만일 우리가 너희들을 치려고 마음먹었다면 복잡하고 귀찮은 방법을 쓸 필요도 없이 힘으로 모조리 쓸어버렸을 것이다!”
희천옥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용비의 말은 곧 자신들의 능력을 무시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회는 치우의 수장인 용비의 말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 말대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치우 일족이 아이들을 납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것도 없거니와, 저들의 성격상 그런 치졸한 행동을 할 일파도 아니었다.
치우 일족은 결코 물러설 줄 모르는 자들이다.
죽을지언정 뒷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전사의 일족인 것이다.
순간, 불안한 감각이 강회의 머리를 옥죄었다.
아무래도 이 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강회가 일족에게 일단 무기를 내리라 명령하려는 찰나였다.
“사악한 치우 놈들을 죽여라!”
갑자기 헌원 일족 일부가 고함을 치며 앞으로 돌진했다.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었기에 강회가 미처 손을 쓸 틈조차 없었다.
퍼퍼퍼펑!
불꽃과 빛줄기가 치우 일족에게로 날아갔다.
칠백여 명의 헌원족 무사들이 공격을 시작하자 강회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는 것이다.
“감히! 놈들에게 우릴 건드린 대가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 줘라!”
용비가 치우의 전사들에게 반격을 명했고, 곧이어 신농의 일족도 싸움에 휩쓸려 버렸다.
“크아아악!”

양쪽 합쳐서 이천삼백에 이르는 대규모의 전력이 격돌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비명이 난무하고 대지는 피로 물들었다.
여기저기에 쓰러져 뒹구는 자들은 얼마 전까지도 함께 술을 마시거나, 실없는 농담을 나누던 형제며 친구였다.
강회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헌원의 일족은 멋대로 공격을 한 것인가!’
이런 대규모 전면전은 전혀 원하지 않던 상황이다.
자신들의 아이를 찾고 치우 일족에게 이번 일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온 것이다.
대규모 전력을 이끌고 온 것은 치우 일족을 적당히 압박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전면전을 하게 되면 양측 모두에게 손해였으니.
그런데도 헌원 일족은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강회는 전장을 자세히 살피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헌원 일족 무사들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처음에 강력한 일격을 펼칠 때와는 달리 일각여가 가까워지자 힘도 못 쓰고 치우 일족에게 당해 쓰러졌다.
신농 일족의 분전으로 간신히 백중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피해 또한 심했다.
신농과 헌원이 머릿수는 더 많았으나, 삼십육신의 강력한 무력에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장내를 지켜보던 강회는 그 순간 황제 희천옥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방금 전까지 있던 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런! 뭔가 음모가 있구나!’
강회의 머릿속에서 경고성이 울렸다.
“다들 전투를 멈추고 물러나라!”
강회는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곧이어 터진 폭음에 묻혀 버렸다.
콰아아앙!
“이게 무슨 일이냐!”
용비가 놀라 소리쳤다.
자신들의 가족이 있는 성의 뒷편에서 폭음이 터진 것이다.
“꺄아아악!”
성 밖으로 어린아이와 아녀자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치우의 종자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라!”
희천옥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치우 일족의 뒤를 친 것이다.
지금 성에는 외곽 지역을 경계할 최소한의 병력만이 남겨진 상태.
분명 신농과 헌원의 병력은 성 앞쪽에 집중되어 있었고, 천이백이 넘는 병력이라면 두 세력의 팔 할이 넘는 전력이었기에 설마 뒤를 칠 여력이 있으리라고는 결코 상상도 못했다.
한데 성의 뒤쪽을 공격당했다는 것은 두 일족이 그동안 상당한 인원의 전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애초부터 치밀하게 준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헌원 일족의 공격으로 가족들의 거처가 습격당하자, 당황한 치우 전사들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순간, 신농 일족과 함께 전장에 있던 헌원 무사들의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폭음과 함께 산산이 터져 나갔다.
콰앙! 쾅!
“폭멸공(爆滅功)!”
강회는 일이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폭멸공의 위력은 실로 막강해서, 한순간에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수백 명이 갈가리 찢겨 육편으로 흩어지는 잔혹한 모습은 보는 이들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폭멸공은 자신의 진원진기를 격발시켜 짧은 시간 동안 몇 배의 영력을 발휘하고, 끝내는 자폭하여 상대를 격살하는 독랄하고 무서운 수법이었다.
사방이 폭멸공으로 사라져 버린 자들의 파편과 내장 조각, 신음하는 부상자들의 피로 가득했다.
신농과 치우, 양측은 폭멸공에 의해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아, 이럴 수가…… 황제에게 속았구나!”
그제야 강회는 이 모든 게 황제의 음모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황제는 이제 막 입문한 제자들을 골라 폭멸공을 익히도록 하고 하인과 낭인들을 섞어 병력을 구성해 정면으로 내보낸 뒤, 진정한 전력을 후위로 돌려 치우 일족의 거처를 급습한 것이다.
처음에는 황제가 함께하고 있었기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장로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게 기억이 났다.
강회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했다.
설마 칠백에 가까운 식솔들을 버리는 패로 쓸 줄이야.
그 냉정함과 교활함에 치가 떨렸다.
성안을 순식간에 정리한 황제의 병력이 성문을 열고 치우 전사들의 뒤를 쳤다.
그 중심에 승리의 미소를 입가에 드리운 황제가 팔장을 낀 채 여유롭게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비열한 놈!”
치우의 수장인 용비가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황제에게로 달려갔다.
그의 양손에서 십여 줄기의 빛무리가 뻗어 나갔다.
앞을 가로막던 황제의 졸개들이 반 토막이 되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열 명의 장로가 앞을 가로막자 용비도 전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이이익!”
용비는 분노에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영력이 강력하긴 하나 열 명의 장로를 혼자 물리칠 정도는 아니었다.
치우의 전사들은 이제 그 수가 얼마 남지 않았고, 그마저도 황제의 졸개들에게 둘러싸여 한 명씩 죽어가고 있었다.
황제는 그동안 전력의 상당 부분을 숨기고 있던 듯, 예상보다 두 배나 많은 정예 무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치우 일족과 거의 대등한 전력이었는데, 폭멸공으로 인해 피해를 입고 신농 일족과의 전투에서 많은 전사들을 잃은 치우 일족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전세가 기운 상황인 것이다.
치우 일족의 성에서는 이제 비명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 죽어 버린 것이리라.
용비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으아아아아아!”
용비가 온몸의 힘을 폭출시켜 앞을 가로막는 황제의 졸개들에게 쏘아 냈다.
눈부신 빛줄기가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정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최후의 모든 것을 담아 펼친 일격이었기에 그 위력 또한 대단하여, 열 명의 장로 중 여섯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고, 나머지 넷 중 둘은 팔다리를 잃어야 했다.
한 번의 공격을 끝낸 용비가 석상처럼 버티고 선 채 핏발이 맺힌 두 눈을 부릅뜨고 황제 희천옥를 바라보았다.
“놈을 막아라! 놈의 목을 베는 자는 새로이 장로의 자리에 임명하겠다!”
용비의 놀라운 신위에 간담이 서늘해진 황제가 다급히 명령했다.
하나 황제의 명령에도 헌원의 무리는 쉽사리 용비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뭣들 하느냐! 당장 놈의 목을 쳐라!”
황제가 악에 받쳐 소리치자 살아남은 장로 둘이 마지못해 용비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이 천천히 용비를 향해 다가감에도 용비는 어떠한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일 장 정도의 거리에 이른 그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용비를 살폈다.
“황제시여, 놈이 이대로 죽은 듯합니다!”
두 장로 중 한 명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용비의 마지막 공격은 자신의 생명조차 불사른 일격이었다.
황제의 간악한 음모에 속아 일족을 지키지 못한 분노와 자책으로 결국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린 것이다.
용비의 죽음은 치우 일족으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토록 만들었다.
결국 치우 일족의 최고 전사라 불리던 삼십육신도 제대로 힘을 못 쓴 채 어이없게 목숨을 잃었다.
폭멸공의 여파에 휩쓸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대여섯 명의 적에게 둘러싸여 하나둘씩 허무하게 쓰러진 것이다.
“하하하하하! 이제 이 땅의 주인은 나 황제 희천옥이니라!”
크게 웃어젖힌 황제가 망연자실해 있는 신농의 수장 강회를 바라보았다.
“일족을 살리려면 나에게 복종하라!”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희천옥이 말했다.
“크윽!”
강회가 분노로 이를 갈았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치우 일족은 물론, 신농 일족까지도 화를 입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어찌 된 것이오!”
“그들은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다. 너희가 나에게 복종을 맹세하면 다시 돌려보내 줄 것이다.”
“허…….”
강회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짐작은 했지만, 결국 아이들을 납치한 것도 헌원의 무리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이성을 잃고 너무 섣불리 움직였다.
어리석은 자신의 판단에 일족 전사들의 반이 목숨을 일었다.
당장에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황제를 앞에 두고도 강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직 가족과 살아남은 전사들이 있으니 그들을 지켜야 했다.
여기서 황제와 부딪친다면 치우 일족과 같은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 신농 일족은 황제를 따를 것이오!”
강회가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하하! 잘 생각했느니라! 내 모든 인간들에게 사조 복희의 뜻을 전파하고, 함께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해 주겠노라! 오늘 영광스러운 승리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삼 일간 잔치를 벌이겠다! 모두 마음껏 먹고 마셔라!”
“우와아아아아!”
헌원 일족의 함성이 사방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