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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심장기사단 1 (14화)
제6화 외교, 그까이꺼(2)


꾸어엉! 꾸어어어엉!
“으억, 컥컥!”
엔젤은 새끼에 불과했다. 하지만 숲의 제왕의 후예답게 두크의 목을 조르는 완력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두크는 숨이 막혀 괴로운지 꺽꺽거렸다. 두 형제의 목을 조이고 있던 팔에 힘도 저절로 풀리면서 두 형제가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었다.
“커흐으! 사, 사람… 사사사, 살려어어!”
꾸어어엉!
엔젤은 두크가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신이 나서 꽉꽉 조였다.
가스파르는 촌장에게로 시선을 돌려서 물었다.
“베간커 자작군이 언제쯤 쳐들어온다고?”
“한 시간 전에 두 시간 거리까지 다가와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쯤은 한 시간 거리일 듯싶습니다요.”
“빨리 왔군.”
“아마도 자작 부인 때문인 것 같습니다요.”
“자작 부인?”
촌장이 건물에 숨어서 두크를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여인에게 시선을 던지며 설명했다.
“두크가 챈디아 자작 부인을 탈출시켜서 이곳으로 곧장 달려온 바람에 추격대가 선발로 쫓아오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요.”
가스파르는 챈디아에게 잠시 시선을 주다가, 그 뒤에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물짓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저 늙은 여인은 누구지?”
“유크 형제의 어미, 한나입니다요.”
한나의 품에는 커다란 보따리가 안겨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손에도 그것에 준하거나 더 큰 것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피난을 갈 참이었던 모양이었다.
“짐 풀라고 해.”
“네?”
촌장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지만 가스파르는 등을 돌렸다. 촌장은 무슨 의미인지 곧 납득을 했는지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짐을 풀라는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촌장은 와이번 무리에 섞여 있는 여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어린 샤넬리아와 새끼 오우거 엔젤을 보면서 한숨을 숨죽여 내쉬었다.
인원도 인원이지만 대체 여인들을 데리고 뭘 한다는 말인가. 특히 그중에는 만삭의 임산부도 끼어 있었으니 정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가스파르의 명령을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포악한 와이번을 마치 순한 양 다루듯이 하는 가스파르가 소름이 끼치도록 너무 무서웠다.
촌장은 숨을 돌리고 있는 유크를 향해 조심스레 손짓을 하면서 어눌한 목소리로 불렀다.
“유, 유크. 이리 좀 와보게.”
유크가 촌장을 향해 비칠비칠 다가왔다.
유크는 정신이 차리자마자 가스파르의 모습을 쫓았고, 촌장과 이야기를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촌장의 주눅이 잔뜩 든 목소리를 용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가스파르님께서 짐을 풀라고 하시는데 대체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지금으로서는 피신을 한다고 해도 추격대에게 금방 따라잡히고 말 거예요. 차라리 짐 보따리 대신 농기구를 들고 가스파르님과 함께 대적을 하는 게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을 것 같아요.”
유크의 말에 촌장은 답답하다는 양 가슴을 치면서 조금은 질책하는 투로 따져 물었다.
“새벽에 엘코크 마을을 찾아갔을 때 보니까 기사님들도 꽤 많던데 그들은 왜 모셔오지 않았는가?”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사들과 마을 사람들이 와이번 사냥을 떠난 후였습니다.”
“뭐, 뭣? 와이번 사냥을 가?”
촌장이 경악한 표정을 하였다.
“새삼 놀라실 일이 있나요? 저 와이번들도 그렇게 잡아다가 온순하게 길들인 건데요.”
“그땐 가스파르님께서 선봉으로 나서서 와이번을 생포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랬지요. 그런데 다른 분들도 그게 가능한가 봐요. 이번엔 아예 엘코크 마을 주민의 수만큼 잡아오겠다고 했거든요.”
“허헉! 그게 말이 되는가?”
불신의 눈초리로 쏘아보는 촌장을 향해서 유크는 오히려 마을 공터에 와이번들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저기 일곱 마리의 와이번은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지…….”
“말이 절대로 안 되지만 와이번들이 저렇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애교를 부리고 있잖아요.”
“허허.”
유크는 괴리감에 빠져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촌장을 다독이는 투로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엘코크 주민을 전부 합친 것보다 가스파르님 한 분이 더 강해 보였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말을 그 누구보다도 믿고 싶네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은가.”
“100만 골드의 현상금이 걸리게 되었던 동기를 떠올려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유크는 100만 골드의 위력을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촌장은 여전히 석연치 않은 표정을 하였다.
“하아아. 지금에선 1,000만 골드라고 해도 위안이 안 되네.”
가스파르의 귀에 촌장의 염려 섞인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그럼 마을을 버리고 떠나던가.”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요?”
“응. 대신 버린 마을은 내가 줍는다?”
“네, 넷? 뭐라고요?!”
촌장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소리쳐 물었지만 가스파르는 곧 버려지면 주워 가질 마을을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장대비가 와도 지붕이 새지는 않겠군. 마음에 들어.”
그의 옆에 여자들이 고개를 일제히 끄덕였다.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겠어요.”
“샤넬리아도 좋아요.”
“……!”
저런 벼룩에 간을 내 먹을 인간들이 있나?!

가스파르의 중얼거림을 들은 들벅 마을 사람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정찰을 나갔던 사내들이 마을로 황급히 뛰어들어 왔다.
“빌어먹을! 왜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거야?!”
걸걸하게 성깔을 부리는 60대 전후에 남자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머리칼의 반은 갈색이고 반은 흰색이었지만, 몸은 젊은이 못지않게 건장하고 당당했다.
그는 출입구를 빠르게 통과해 건물을 돌아서 마을 중앙 공터로 오다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으헉! 와, 와이번 떼가! 저 빌어먹을 것들은 다 뭐야?!”
건물에 가려져 있고, 애교를 부르느라고 고개를 땅바닥에 길게 붙이고 있던 와이번들을 이제야 발견을 한 모양이었다.
“장크!”
“아버지!”
그를 장크라고 부른 이는 촌장이었고, 아버지라고 부른 이는 다름 아닌 유크였다.
“가스파르님께서 도와주신다고 하셔서 저희 형제는 피난을 가지 않기로 했어요. 마을에 남아서 함께 싸우기로 합의를 봤어요.”
“그럼 마을 사람들은?”
“그건 촌장님이 결정하실 일이고요.”
그 말에 장크가 촌장을 보았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촌장이 장크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젠장! 그러게 이 우유부단한 영감탱이야, 나한테 촌장 자리를 양보하라고 했었잖아!”
“아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이따위 촌장 자리 진작 자네에게 넘겨줄 걸. 지금이라도 자네가 촌장하게나!”
“싫어! 마을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때에 불명예스러운 촌장 자리는 절대로 사양이야!”
듣다 못한 유크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조그맣게 비아냥거렸다.
“자경단 대장이나 촌장이나, 마지막이면 그게 그거지.”
“저눔 시키가?”
장크가 유크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때에 촌장이 절박하게 재차 물었다.
“어떻게 할 건가, 장크?”
“마을을 지키는 자경단 대장으로서 나도 남아서 결사항전을 하겠다! 마을 사람들의 안위는 자네가 결정하라구, 빌어먹을!”
가스파르는 유크 형제들이 장크를 닮아서 단순하다는 것을 한눈에 파악했다. 물론 그 자신이 유크 형제와 장크를 합친 것보다 더 단순하다는 사실은 안중에 전혀 없었다.
촌장은 마을을 떠나겠다는 쪽으로 말했는데 장크가 자신은 남겠다는 식으로 말을 하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었다.
일이 잘못 되었을 때 같이 책임을 져줄 사람이 필요했기에 장크를 몰아세울 참이었는데 장크가 너무 허무하게 떨어져 나가서 속이 탈 지경이었다.
‘어차피 다 죽으면 원망할 자도 남아나지 않겠지. 에라, 모르겠다.’
촌장은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얼마 도망가지 못해서 따라잡힐 바라면 남아서 싸우는 것이 낫겠군.”
힘겹게 말하는 목소리는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런 것은 마을에 남겠다고 한 장크와 그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유크.”
“네? 사베나님.”
유크를 부르는 사베나의 목소리에 가스파르의 고개도 돌아갔다. 그의 시선은 곧장 치마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는 사베나의 미끈한 다리에 고정되었다.
“이거 봐.”
“허헉!”
유크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같이 동그랗게 뜨다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것은 그 주변에 있던 한크와 두크 형제는 물론 그들의 아버지인 장크도 마찬가지였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늘씬하게 쭉 뻗은 다리. 사베나가 만삭의 임사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다리에 현혹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르륵!
“흐음?”
한참 멍하니 뚫어져라 응시를 하다가 팔등으로 코 밑을 훔쳤다. 팔뚝에 붉은 코피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부자들이 전투도 치르기 전에 과다하게 피를 보고 있었다.
“두, 두크!”
“여보오오옷!”
자작 부인 챈디아와 장크의 아내 한나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커허흠흠!”
“아흐흠흠!”
두크는 펄쩍 놀라서 고개를 돌렸고, 장크는 아쉬움이 가득한 헛기침을 하면서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한크와 유크도 정신을 수습하면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사베나는 남자들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가스파르는 사베나가 왜 저러나 싶어서 물었다.
“뭐가?”
“부가티가 기운이 없을 때 제가 다리를 보여주면 힘이 펄펄 났어요.”
사베나의 죽은 남편의 이름이 부가티였다. 그러니까 제 남편의 기억을 떠올리고서 전투에 앞서 유크들이 기운을 차리라고 사베나가 제 다리를 보여줬다는 뜻이었다.
엘코크 여자 중 여섯 명의 여자가 동감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남편도 그랬어.”
“내 남편도.”
그리곤 사베나가 그랬던 것처럼 또 죄다 치마를 걷어 올렸다. 그녀들 역시도 한때는 유부녀였다가 현재는 미망인 신세였다.
“헉!”
“흡!”
“하악!”
들벅 마을의 남자들은 격하게 숨이 들이켰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같이 휘둥그레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사베나가 마을 남자들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기운이 나?”
“…….”
누구 하나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이번엔 마을 남자들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서 아직 시집도 안간 엘코크 처녀들도 치마를 걷어 올렸다.
“아으으으!”
“어흐흐흐!”
모두 괴로운 신음만 흘렸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게 웬 횡재인가 싶은 얼굴로 뚫어져라 응시하는 자들도 있었다.
들벅 마을의 남자들은 어깨서부터 녹아내리듯 팔이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다리는 풀려서 O자로 휘어져 후달후달 떨었다. 뚫어져라 응시하던 눈동자도 점점 몽롱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베간커 자작 영지의 무자비한 군대가 자신들을 몰살시키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다는 현실이 뇌리에서 깡그리 지워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깨끗이 잊혀졌다.
심지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포악한 창공의 제왕 와이번들이 마을 한복판에 죽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게 되었다.
가스파르는 사베나를 비롯한 엘코크 여자들의 돌발 행위가 참으로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전투에 앞서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이토록 훌륭한 응원이 다 어디 있을까?
그는 엘코크 여자들이 마을 간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이토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외교 사절단으로서 본분을 잊지 않고 있었구나.’
가스파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사베나가 알 수 없다는 투로 그에게 물었다.
“저 남자들은 왜 부가티와 다른 거죠? 오히려 어깨가 축 쳐졌어요.”
뒤에 여자들도 궁금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여 물었다.
“가스파르님은 기운이 나세요?”
그 질문에 가스파르는 엘코크 여인들의 다리를 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몸 상태를 꼼꼼히 점검해 보았다.
“별로.”
딱히 기운이 난다거나 마을 사람들처럼 역효과(?)가 나는 일이 없었다. 그녀들이 옷을 겹겹이 껴입거나 그 반대로 다 내놓고 다녀도 마찬가지일 듯싶었다.
“기억을 떠올려보니까 난 샤피엘라하고 함께했을 때 힘이 넘쳤던 것 같아.”
샤피엘라는 그의 약혼녀였다.
그녀와 함께할 땐 정말이지 지옥의 문을 열고 마계에 쳐들어가서 마왕의 목이라도 벨 수 있을 만큼 항상 자신감이 넘치곤 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었다.
그의 힘의 원천이었던 샤피엘라는 죽어서 그의 곁에 없게 되었다.
가스파르의 대답에 엘코크 여인들이 치마를 내렸다.
“그럼 남편이나 연인에게만 효과가 있나 봐요.”
그녀들이 치마를 내렸을 땐 들벅 마을 남자들은 이미 전멸을 면치 못했다. 대체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이란 말인가.
그때 대지를 북처럼 사정없이 두들기는 기병대의 말발굽 소리가 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