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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2(18화)
5장 드러나는 비사(秘史)(5)
기문을 다시 만든 천성이 눈을 떠 보니 이미 강휘성이 데려왔던 석실로 돌아와 있었다.
“후…….”
천성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다섯 개의 기문으로 이전보다 세 배는 됨직한 기운들이 들나며 천성의 온몸에 활력이 넘쳤다.
기문으로 출입하는 기운들을 영력으로 변환시켜 영안에 집중해보았다.
그러자 이전보다 커지고, 아직은 흐릿하지만 핵이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영안이 막대한 영력을 흡수해 밝게 빛났다.
심상에 잡힌 사물의 원근 역시 또렷하게 느껴졌다.
영안이 다시 만들어졌을 때와 비교해 인식의 범위는 같았으나 심상이 훨씬 선명해진 것이다.
[놀랍군! 네 상태가 아마도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의 사이인 듯하다! 이대로라면 두 번째 단계도 머지않아 돌파하게 될 것 같구나!]
무숙은 몹시 기뻐했다.
‘마치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 같군요.’
천성 역시 심상에 펼쳐진 세계를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색색의 기운들이 세상을 휘돌며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어떤 곳에선 불꽃놀이를 하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어떤 곳에선 뭉쳐서 회오리쳤다.
복희의 마지막 말이 걸리긴 했으나, 분명 열쇠로 인해 영력에 상당한 발전이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역시 자네가 스승께서 예언하신 구원자가 맞군.”
강휘성의 들뜬 목소리에 천성은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사실 천성은 아직도 복희의 제안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치우 일족에게 곡용천의 죽음에 대한 책임만 묻고 모든 일을 마무리 짓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던 것이다.
어차피 복희도 천성의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잔뜩 기대하고 있는 강휘성에게 ‘난 복희의 부탁을 거절하겠다’고 말하기는 너무도 미안한 일이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니가 저자들의 금제를 풀어 줄 수 있다 했으니, 복희의 유물에 대한 부탁은 모르겠으나 금제 정도는 풀어 주는 것도 괜찮을 듯싶구나.]
‘아, 그렇군요!’
천성이 보기에 무숙의 의견이 제법 괜찮아 보였다.
어떤 방법으로 강휘성의 금제를 풀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천성은 일단 영안을 열었다.
자신이 금제를 풀 수 있다 했으니 영안을 이용하면 분명 그 방법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 여겨진 것이다.
과연 강휘성의 몸 안을 도는 기운들이 보였다.
한데 이미 기문은 파괴되어 존재하지 않았고, 조금의 영력만이 느껴졌다.
자세히 더 살펴보니 강휘성의 정수리로부터 뻗어 나온 가느다란 영력의 실이 열쇠와 연결되어 있었다.
영력의 가닥 끝이 강휘성의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에게 내려진 금제의 원인이 바로 그것 같았다.
“제가 구원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잘하면 당신의 금제를 해결할 수는 있을 것도 같군요.”
천성이 강휘성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정말인가? 드디어 수천 년 숙원이 이루어지는 건가!”
“너무 기대는 마십시오. 일단 시도는 해 보겠으나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격앙되어 있는 강휘성의 큰 기대가 부담된 천성이 일단 그를 진정시켰다.
자신으로서도 강휘성과 복희의 말을 믿고 그저 시도해 보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일단 뒤로 돌아앉아 보십시오.”
그 말에 강휘성이 등을 보인 채 돌아앉았다.
이어 천성이 영안을 열고 강휘성의 목 바로 아랫부분인 대추혈(大椎穴)에 손을 얹었다.
열쇠와 연결된 영력의 가닥이 똬리를 튼 위치는 아문혈(啞門穴)에서 좀 더 안쪽으로 깊이 들어간 소뇌 부분이었으나. 한 번에 너무 직접적으로 건드릴 경우 혹시라도 위험하지 않을까하여 주변을 감싸며 조심스럽게 기운을 움직이려는 것이었다.
천성은 이참에 한 단계 발전한 영력을 시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영력은 힘과 기운의 두 가지 특성을 다 가지고 있었는데, 물체를 움직이고 기운을 조율하는 데는 특히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사실 염동력도 그러한 특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천성이 조심스럽게 영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몸 안에 가득 차오른 영력을 얇게 펴 압축하여 똬리 튼 가닥을 둘러쌌다.
새로운 기문을 생성하기 전이라면 이토록 세밀한 작업은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천성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세밀한 운용을 하다 보니 상당한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던 것이다.
똬리를 감싼 영력의 망이 서서히 좁혀졌다.
스스스!
곧 천성의 영력이 강휘성의 소뇌에 자리 잡은 영력의 가닥과 접촉하여 서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천성은 영안에 의지를 집중하여 똬리를 움직이기 위한 시도를 했다.
이리저리 흔들며 건드려 보았지만, 열쇠로부터 시작된 영력의 덩어리는 처음에만 조금 반응하는 듯하다가 이후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별 효과가 없자 천성을 방법을 달리해 이번에는 영력을 가늘게 압축시켜 송곳 모양으로 바꿨다.
천성은 영력의 송곳으로 이곳저곳 찔러 보았다.
덩어리가 조금 좌우로 흔들리는 듯했으나 이내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지금 너의 능력으로는 힘들겠구나. 기를 더 자유롭게 조절하려면 두 번째 단계를 돌파해야 해.]
한참을 이것저것 시도해 본 천성도 결국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강휘성의 평생 염원인 금제라도 풀어 주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아직은 무리인 듯했다.
“하, 저의 능력으론 아직 무리군요. 괜한 기대만 품게 해서 죄송합니다.”
천성이 한숨을 내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네. 어차피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네. 자네가 나머지 열쇠와 유물을 찾아야 아마도 이 금제가 풀릴 것이네. 사조께서도 구원자가 유물을 찾게 되면 우리 신농 일족의 금제도 풀릴 것이라 말씀하셨네.”
조금은 실망한 표정의 강휘성이었지만 천성을 탓하지 않았다.
천성이 구원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유물을 찾게 되면 어차피 금제가 풀릴 것이다.
수천 년을 기다렸는데 불과 몇 개월 정도를 못 기다릴까.
강휘성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다른 열쇠의 위치는 모르네, 혹시라도 열쇠를 지키는 수호자가 당했을 때 한꺼번에 열쇠의 위치가 알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지. 아마도 자네 스스로 찾아야 할 거야. 어쨌든 자네를 돕지는 못하겠지만, 마음속으로나마 복희께서 이끌어 주시길 빌겠네.”
강휘성의 말속에는 간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휴, 아무래도 시간 나는 대로 열쇠와 유물을 찾아봐야겠군요.’
천성은 강휘성의 바람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그래. 어차피 열쇠를 찾을 때마다 오늘과 같은 발전을 이룰 수 있다면 너에게도 큰 이익이다. 태초의 파편을 노리는 자들을 상대하려면 빨리 실력을 높여야 되는 상황이니, 차마 거절하지 못하겠구나.]
무숙도 천성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지금 당장에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열쇠를 찾으러 갈 수 없습니다만, 시간 나는 대로 열쇠를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자네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하지만 이 늙은이의 욕심이 그만두라는 말을 못하게 하는군. 꼭 좀 부탁하겠네.”
천성은 강휘성에게 다짐한 후 절벽을 나왔다.
화산파를 벗어난 지 이미 한 시진이 넘게 지나 있었다.
천룡이 걱정할 것이 분명했다.
천성이 영안을 열고 음속으로 움직였다.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와 바위들이 예전과는 다르게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보였다.
장애물을 인식한 뇌가 반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거의 없는 듯했다.
장애물이 보이는 순간, 몸은 이미 그것을 피해 지나가고 있었다.
이 길고 긴 과정들이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졌다.
화산파로 돌아오기까지 숨 한 번 쉴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음속의 짜릿함이 천성의 온몸을 휘감았다.
‘이거, 정말 최곤데요!’
[너무 오래 사용하면 무리가 있으니 적당히 사용하거라. 속도에 대한 집중은 가장 섬세한 조절이 필요한 부분이라 잘못하면 정신에 충격을 줄 수도 있어. 되도록 반 각 이상 사용하지 말거라.]
‘네.’
힘의 사용은 항상 조절이 중요하다.
마치 양날의 검과 같아서 힘에 취해 절제하지 못하고 함부로 남용하게 되면 결국 스스로를 해치게 되는 것이다.
무숙이 미리 천성에게 경고하는 이유였다.
지금이야 아직 천성이 통제 가능한 정도였지만, 나중에 영력의 단계가 더 높아지고 그 힘이 커졌을 때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결코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천성은 무숙의 충고를 마음속 깊이 새겼다.
복희가 도와주어서인지 무숙은 예전보다 많은 지식을 천성에게 알려 주었다.
말투 또한 많이 진중해져 있었기에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화산파로 돌아온 천성은 문도들에게 물어물어 일행이 머무는 숙소로 돌아갔다.
“어허,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건가! 천룡 공자의 비무 결과가 궁금하지도 않은가?”
감석보가 정색을 하며 천성을 나무랐다.
“남자라면 뒷일은 아무 곳에나…….”
막 이야기를 하려던 감석보를 천룡이 막았다.
“하하,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다. 별일은 없었느냐?”
“미안해, 형. 화산의 경치가 하도 수려해서 여기저기 둘러보다 그만 시간가는 줄도 몰랐지 뭐야.”
천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천룡에게 사죄했다.
“그럴 줄 알았소! 역시 내 말이 맞지요? 이 화산파에서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앞으로 뒷일은 아무 곳…….”
참으로 끈질긴 감석보였다.
상대하기조차 귀찮다는 듯 천성이 재빨리 감석보의 말을 잘랐다.
“물론 형이 이겼겠지? 사실 실력 차가 너무 나서 보나마나였겠지만. 하하!”
“그래도 꽤 마음에 드는 녀석이야. 실력도 출중하고. 앞으로 우리 여행에 동행하기로 했다. 너와 동갑인 것 같으니 잘 사귀어 보도록 해라.”
천룡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천성의 어깨를 툭, 쳤다.
천성은 영호명이 일행이 합류한다는 말에 조금은 놀랐으나, 별다른 반감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천하영웅대회에 참여하려는 이유가 많은 사람을 만나 강호 경험을 쌓기 위함이었으니.
* * *
화산에서 하룻밤을 지낸 일행은 아침 일찍 떠날 채비를 하고 장문인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자하궁으로 향했다.
그곳엔 일행에 합류하기로 한 영호명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장문인께서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잘 쉬고 갑니다. 이번에 배풀어 주신 화산의 은혜는 기회가 되면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천룡이 대표로 장문인에게 인사를 했다.
“하하, 그저 방 몇 칸 내줬을 뿐인데 은혜랄 것까지야. 오히려 우리 아이들을 맡겨야 하는 입장이니 잘 부탁하네.”
화선학이 사람 좋은 웃음으로 천룡에게 답했다.
‘가만, 아이들? 영호명 혼자가 아닌가?’
장문인의 말에 의구심을 느끼며 영호명을 바라보던 천성의 표정이 구겨졌다.
“저도 천하영웅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함께 동행하게 됐으니 아무쪼록 잘 부탁드려요.”
영호명의 뒤편에는 경장 차림의 화설련이 배시시 웃고 있던 것이다.
알고 보니 화설련은 장문인 화선학의 금지옥엽이었다.
천룡이 마음에 든 화설련은 장문인인 아버지를 졸라 함께 동행을 하게 된 것이다.
화선학 역시 천룡 정도라면 딸의 배필감으로 충분하다고 여겼기에 동행을 시켜 친분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다.
하지만 천성에게 있어 화설련은 유가장의 일로 조금은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녀를 보면 곡용천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화설련 같은 보기 드문 미인이 일행에 합류하면 가는 곳마다 시선을 끌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귀찮은 일들이 벌어질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어머, 언니도 함께 가는군요. 그럼 나도 심심하지 않아서 좋겠네요.”
감세령이 펄쩍 뛰며 좋아했다.
일행 중 자신만 여자인 관계로 사실 불편한 점이 많았다.
아무리 일행이 배려해 준다고는 하나 젊은 남자들이 여자의 일을 세세히 알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오빠인 감석보 외에 천룡 형제는 말이 그리 많지 않아서 마침 무료하던 차이기도 했다.
“하하. 이거, 아름다운 화 사매가 동행한다면 나야 좋지! 귀찮은 녀석들이 많이 꼬일 테니, 천룡 공자와 나의 영웅담이 차곡차곡 쌓이겠구나!”
감석보가 엉뚱한 상상을 하며 화설련을 반겼다.
천룡도 화설련의 합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 가까운 곳에서 자세히 지켜보며 다른 사봉들과 비교해 보는 거야! 과연 누굴 첫째 부인으로 삼을 것인가!’
천룡이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천성은 서먹서먹한 화설련의 동행이 썩 내키지 않았으나 딱히 반대할 명분이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이렇게 여섯으로 늘어난 천룡 일행은 화산 문도들의 배웅을 받으며 무림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