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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2(19화)
6장 무림맹을 향하여(1)
섬응은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다.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영력을 끌어 올리는 바람에 내부가 엉망이 되고 혈맥이 여기저기 끊어져 버렸다.
치우 일족은 복희가 인간을 벌할 때 기문과 영안을 잃었다.
그로 인해 살아남은 일족의 마지막 계승자와 그 추종자들은 힘을 되찾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그 결과, 기운을 온몸에 축적해서 혈맥으로 돌린 후 상단전을 이용하여 영력으로 변환시켜 사용하는 방법을 개발해 냈다.
그런 이유로 혈맥이 끊겨 버리면 영력의 사용에 제약을 받았다.
지금 섬응은 끊긴 혈맥들로 인해 기운이 새어 나가고 있었다.
외상보다 내상이 큰 상태였다.
점점 정신이 가물가물해져 갔다.
숨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섬응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열쇠만은 꼭 천황(天皇)께 전해야 했다.
또한 흑의인에 대해서도 반드시 천(天)에 알려야 했다.
섬응은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열쇠가 너무 허술하게 놓여 있던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이것저것 따질 시간이 없었다.
영력을 쓰는 복면인은 자신이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자처럼 영력을 쓰는 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도 못했다.
마치 무공을 익히듯 전투 중에 벽을 넘어서다니.
그것은 자신들의 세력에 앞으로 큰 위협이 될 문제였다.
음후(音?)는 아마도 죽음을 당했으리라.
워낙 큰 부상을 입은데다, 만약 살았다 해도 자결을 선택했을 터였다.
흐릿한 시야 속으로 마주 달려오는 치우의 무사들이 보였다.
“섬응 님, 어찌 된 일이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천신만고 끝에 본거지에 도착한 섬응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아버님, 섬응이 열쇠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소공녀 용혜란은 급히 회천궁(回天宮)이라 적힌 커다란 현판이 붙은 대전으로 뛰어들었다.
회천궁의 주인이자 치우 일족의 수장, 멸제(滅帝) 용천광이 부리부리한 눈을 빛내며 용혜란을 바라보았다.
“성공했구나! 어서 들라 이르라!”
“실은…… 부상이 심해 정신을 잃은 상태입니다.”
용혜란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섬응의 부상은 그야말로 살아 있다는 게 기적일 정도로 심했다.
만일 조금만 늦게 도착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음후는?”
용천광이 굳은 표정으로 나직이 물었다.
“음후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용혜란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부릅뜬 용천광의 눈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어찌 그런!”
용천광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돌아오지 않았다면 필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임무가 중요한 만큼 개인 행동을 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돌아올 수 없었다는 이야기.
그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상대에게 목숨을 잃었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팔신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팔신은 호법과 장로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뛰어난 전사였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직접 가르친 자식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전력의 손실도 컸지만, 사람을 잃은 슬픔이 더 컸다.
“신농의 수호자가 그렇게 강했단 말인가! 영침까지 가져갔거늘. 내가 오판한 것인가! 영침을 사용하면 둘이서 수호자 하나쯤은 충분히 상대하리라 여겼는데…….”
용천광이 의자에 기대어 머리를 붙잡고 자책했다.
“자세한 사항은…… 섬응이 깨어나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섬응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의원조차 섬응의 생사를 확언하지 못했다.
당장엔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저…… 열쇠를 보시겠습니까?”
용혜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 그래, 이리 가져오거라.”
용천광은 상념에서 깨어난 듯 용혜란에게 명했다.
음후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자신에게는 대대로 내려온 사명이 있었다.
열쇠의 모양은 삼각형의 금속판 두 개가 얇은 세 개의 기둥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금속판 사이에 푸른 구체가 떠 있는 상태였다.
바로 천성이 보았던 그 열쇠였다.
크기는 어른 손바닥의 두 배 정도 되는 넓이에 높이는 한 자 조금 못 되어 보였는데, 푸른 구는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용천광이 열쇠를 받아 들고 기운을 흘려보냈다.
파앗!
순간, 푸른빛을 내던 구체에서 작은 용의 형상이 솟구쳐 올라 한 바퀴를 맴돌았다.
그에 용천광의 눈이 빛났다.
“천률음보에 적힌 대로구나. 열쇠는 진품이 분명하다!”
신기한 현상을 몽롱하게 바라보던 용혜란이 아버지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사실 천률음보는 복희의 비동을 열 수 있는 열쇠의 위치를 알려 주는 지도였다.
복희의 유물이 있는 위치는 황제, 신농, 치우, 세 일족 모두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열쇠 없이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금지였다.
그래서 천율음보를 통해 열쇠를 찾아낸 자만이 그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었다.
“음후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구나. 이제 나머지 다섯 개의 열쇠만 찾아내면 복희의 비동을 열 수 있겠다. 우리가 비동을 열고 힘을 되찾는 순간, 세상은 음후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몇 배로 갚게 될 것이다.”
용천광이 두 주먹을 틀어쥔 채 다짐했다.
용혜란은 아버지의 모습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오천 년이 넘는 한을 이어받아 스스로를 버린 채 오직 일족의 사명만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른 용천광이 무거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혜란아, 네가 움직일 때가 왔다.”
이제 숨어 있는 헌원 일족을 찾아내야 했다.
놈들은 신분을 숨긴 채 어딘가에서 세상을 조율하고 있을 것이다.
정황상 무림맹에 놈들의 손길이 닿아 있을 확률이 높았다.
상대의 꼬리를 먼저 잡는 쪽이 싸움의 우위를 점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
이제 그 역할을 용혜란이 해내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놈들의 정체를 알아내겠습니다.”
용혜란은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대전을 물러났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용천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 길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나아가야 했다.
여기서 자신이 흔들린다면 일족의 미래는 없다.
그런 결심과 함께 용천광은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았다.
“환사!”
용천광의 부름에 뱀 가면의 사내가 환영처럼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천황!”
“조사는 어떻게 되었느냐?”
“죄송합니다. 영력을 사용하는 자는 도무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검문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으나 그들 중 영력과 연관이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황제 쪽과 관계가 있을까 하여 흔적을 살폈으나, 이 역시 정보가 너무 부족한 터라 별다른 단서가 없습니다. 다만, 그자가 공동파의 도사들을 도왔으니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입니다. 송구스럽게도 그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정체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할 듯합니다.”
환사는 용서를 청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용천광은 원체가 부하들에게 너그러운 사람이었기에 자신을 크게 탓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지금 상황이 답답하고 용천광에게 면목이 없었다.
“큰일이군. 아직까지 그자로 인해 큰 피해는 없으나 느낌이 좋지 않아.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영력의 사용자는 자칫 변수가 될 수도 있어. 빠른 시일 안에 그자의 정체를 알아내야 해.”
용천광이 턱을 어루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만일 그가 천성이 화산의 일에도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렇듯 여유를 부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섬응이 의식이 없는 상태인지라 아직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흑암문주를 꺾은 애송이는 알고 보니 삼선의 제자였다 합니다.”
환사의 말에 용천광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삼선? 그자들이 왜 갑자기 제자를? 산속에나 처박혀 있을 것이지 뭣 하러 세상일에 관여를 하는 것인가.”
천황 용천광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삼선을 욕했다.
삼선은 상당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궁천룡이라는 아이인데, 철혈문이라는 감숙 외곽의 무관 출신입니다. 그런데 아주 어릴 때 삼선의 눈에 띈 모양입니다. 열 살 때 삼선 밑으로 들어가서 구 년 동안 수련하였다 합니다. 공소추와의 대결로 추정해 볼 때, 초절정을 넘어선 것이라 짐작됩니다.”
“삼선이 괴물을 만들어 냈군. 열아홉의 나이에 초절정이라…….”
하지만 대계에 지장을 줄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
나이가 많긴 해도 구천마련의 후계자와 남궁가의 소공자 역시 초절정의 경지였다.
후기지수 중 뛰어난 정도로는 천의 행사에 위협을 줄 상대는 아닌 것이다.
다만, 천룡으로 인해 흑암문이 패배하게 되는 바람에 생각보다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축소되어 버렸다.
아마도 사파연맹의 중재하에 흑암문에서 공동파에 어느 정도 보상하는 선에서 절충하게 되리라.
공동파에선 선검문이 승리를 거둔 상황인데다 흑암문의 보상으로 체면치레까지 하게 되면 더 이상 무리를 할 이유가 없었고, 어차피 사파연맹의 입장에서도 이번 일을 통해 흑암문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둘 수 있으니 손해라 할 것이 없었다.
섬서를 전란에 휩싸이게 한다는 본래의 계획과는 완전 틀어져 버린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용천광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혹시 모르니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특별한 움직임이 있을시에 반드시 보고하라.”
“존명!”
대답을 마친 환사가 다시 사라졌다.
“아예 미리 제거해 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어느새 들어왔는지 문 쪽에 대기하고 있던 구공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치우 일족 중에 유일하게 천황인 용천광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회천궁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구공이었다.
그는 용천광의 아버지 때부터 천황을 모시던 제일의 가신이었으며, 강력한 영력을 가지고 있는 치우 일족의 최고수 중 한 명이었다.
“글쎄, 아직은 우리에게 위협을 줄 정도의 실력은 아니지 않는가. 조금만 더 지켜보세. 이제 겨우 열아홉의 아이네. 괜한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아.”
딸의 모습이 생각난 용천광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그 아이로 인해 섬서의 일이 틀어졌습니다. 훗날 위험요소가 될 소지가 충분합니다.”
구공이 다시 한 번 청했다.
“그건 우리가 그 아이의 존재를 미리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네. 현재 우리에겐 그 아이의 처리보다 우선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용천광이 손을 내저으며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알겠습니다…….”
구공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대전에서 물러났다.
천황은 마음이 너무 여리고 우유부단했다.
복수의 길을 가는 자가 주변을 생각하다니.
피의 길을 걸어야 할 그가 피를 흘리는 것을 꺼려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구공마저 물러가고 용천광 홀로 남은 대전에는 적막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