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영웅재천 2(20화)
6장 무림맹을 향하여(2)
섬서와 호북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관도를 한 대의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는 제법 커서 여덟 명 정도는 여유 있게 탑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부는 가끔 채찍질을 해 가며 네 마리의 말을 몰았다.
화산을 떠나 무림맹으로 향한 천성 일행의 마차였다.
여인이 두 명이나 있었기에 그들을 배려해서 마차를 한 대 마련한 것이다.
감석보가 나서서 마련해 온 마차는 일행이 모두 들어가도 자리가 남을 정도였다.
노숙을 할 경우를 생각해서 여인들이 누워 잘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생각한 것이다.
마부와는 무한까지만 계약을 했다.
무한에서의 일정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은자를 열 냥이나 주자 마부는 신이 나서 따라나섰다.
보통 평민들의 한 달 수입이 많아야 은자 한 냥 정도에 불과했으니, 말이 네 마리나 되는 마차라 한들 한 달 정도 여행에 열 냥이면 후한 가격이었다.
아직 천하영웅대회까지는 시간이 한 달 보름이나 남아 있었기에 일행은 여유 있는 여정을 보낼 수 있었다.
호북을 지나며 무당파에 들러 보고도 싶었으나, 화산파에서처럼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었던 천룡이 정색을 하고 말리는 바람에 그냥 지나쳐 가기로 했다.
마차 안에는 천성 일행이 한가로운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행을 나선 지 십여 일이 지나자 처음의 서먹서먹함도 많이 사라져 있었다.
덕분에 천룡은 감세령과 영호명의 질문 공세에 진땀을 흘렸다.
감세령은 마치 천룡의 모든 것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집념 어린 눈길로 끈질기게 천룡을 물고 늘어졌고, 영호명은 무공에 대한 궁금증을 쉴 새 없이 질문해 댔다.
천룡도 귀염성 있고 영특한 영호명이 맘에 들었기에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아낌없이 무리를 풀어 설명해 주었다.
화설련은 그런 천룡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뚫어져라 관찰했다.
그 와중에 천성은 감각을 가다듬으며 화산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황제, 치우, 신농의 은원, 복희의 부탁, 열쇠의 효과…….
어느 하나 예사롭지 않았다.
황제의 세력은 아마도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 숨어서 세상을 조종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황제에 대한 적의가 쉽게 와 닿지 않았다.
황제가 신농과 치우 일족에게 저지른 짓이 잘못된 일임은 분명하지만, 직접적으로 아무 관련 없는―넓게 보면 관련이 있을 수도 있으나―자신이 나서서 그 억울함을 풀어 줄 의무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치우 일족의 경우, 억울함을 당했고 복수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미 천성과는 유가장의 일로 씻을 수 없는 원한을 맺은 상태였다.
또한 신농은 본의 아니게 언젠가는 자신이 속박을 풀어 줘야 할 자들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옳고 그름으로만 따질 수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천성이 원하지는 않았으나 세 일족 중 이미 둘과 관계를 맺어 버렸다.
분명 세 일족 간의 분란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게 되리라.
천성은 앞으로는 조금 더 주의해서 주변을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의 정리를 대충 끝낸 천성의 눈에 어미 새에게 먹이를 달라 조르는 새끼 새처럼 천룡에게 붙어 있는 영호명이 보였다.
“명아, 형 좀 그만 괴롭혀라. 너 때문에 숨 쉴 틈도 없겠다.”
천성이 그간 친해진 영호명에게 투덜거렸다.
둘은 동갑이다 보니 금세 말을 놓기로 하고 가까워진 것이다.
영호명이 워낙에 샌님인 탓에 이리저리 놀리는 재미도 있었다.
“아, 아, 미안. 천룡 형님, 제가 너무 귀찮게 해 드렸네요.”
천성의 타박에 영호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열흘간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빼면 거의 천룡 옆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좀 심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간의 시간이 영호명에게는 화산에서의 몇 달보다 훨씬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벽을 깰 실마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다. 나도 네 질문에 대답하면서 무리를 정리하게 되니 꽤 도움이 되는구나.”
천룡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입술 끝이 살짝 떨리고 있음을 천성은 놓치지 않았다.
“아아, 그만하면 됐으니…… 명이, 너는 일각만 쉬어라.”
영호명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천성과 말을 놓고 친구로 지내기로 하자 자연스럽게 영호명은 천룡을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이렇게 세 사람은 제법 격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감석보가 자신만 빼놓았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세 사람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천룡 공자께서는 삼선께 사사하셨다 들었는데, 그럼 그동안 소화산에서만 지내셨겠네요?”
천성의 타박에 영호명이 질문을 멈추자 화설련이 이때다 싶어 눈을 빛내며 천룡에게 물었다.
“네, 이번이 첫 강호행입니다. 그래서 제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니 감 공자와 화 소저께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짐짓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천룡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때,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감석보가 끼어들었다.
“하하하, 역시 천룡 공자는 사람 보는 눈이 있구려! 세상 경험이라면 이 감석보에게 맡기시오! 내 이십 평생 동안 수많은 일을 겪었고 어릴 때부터 가출을 밥 먹듯이 했기 때문에 사회의 쓴맛을 제대로 경험했지요! 궁금하거나 고민되는 일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상담해 드리겠습니다. 음하하하!”
자랑을 하는 건지, 자학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감석보였다.
‘저 인간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건데.’
화설련은 천룡과 대화를 하려 할 때마다 쓸데없이 나서서 이야기를 끊는 감석보를 노려보았다.
“우와, 그럼 그동안 계속 무공 수련만 하신 건가요?”
자신의 오라비를 사뿐히 무시한 감세령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자신 같으면 어린 나이에 구 년 동안 무공만 수련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질려 버릴 정도로 재미없고 따분한 일인 것이다.
천룡은 감세령의 질문에 소화산에서의 암흑의 나날들이 떠올라 가슴이 서늘해졌다.
당장에라도 스승들이 강호에 출도해 자신을 다시 잡아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놈! 강호의 혼란을 막으랬더니, 결국 농땡이만 쳤구나!
무지의 고함 소리가 귓가를 때리는 듯했다.
‘스승님들이 강호에 절대 나오지 못하게 내가 난세를 막아야 한다!’
천룡의 가슴속에서 갑자기 뜨거운 의욕이 샘솟았다.
“이제 다시는! 절대! 수련은 없습니다!”
갑작스런 천룡의 외침에 일행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그것이…… 실전을 통한 경험을 쌓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하하하!”
자신의 실책을 느낀 천룡이 식은땀을 흘렸다.
“역시! 형님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시는군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천룡을 바라보는 영호명의 모습에 천성은 혀를 찼다.
“쯧쯧, 네가 형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된다면 잘못된 이상에 청춘을 낭비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어허, 동생. 형의 위대함을 시기하는 겐가?”
천룡이 준엄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흔들었다.
“호호호, 두 형제분이 우애가 좋으신 것 같아요.”
화설련이 두 사람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천룡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응? 뒤쪽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무리가 있군요!”
두두두두두!
지축을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며 아홉 필의 말이 천성 일행의 마차가 움직이고 있는 관도 뒤쪽으로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말에 탄 자들은 몸에 검과 도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 자세가 무척 안정되어 있고 절도가 있는 것이, 상당한 고수들로 보였다.
뒤쪽 창문을 열어 그들을 확인한 일행도 긴장한 채 상황을 주시했다.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관도여서 별다른 일이야 없으리라 생각되었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여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사이, 천성은 영안을 열어 그들을 살폈다.
‘어라? 저자들의 기운은 조금 독특하군요.’
천성이 살핀 그들의 기운은 지금까지 만난 무인들과는 달랐다.
상당히 거칠고 패도적이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무언가 거친 느낌이 있어. 일부러 기세를 안으로 갈무리시켜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숨기고 있는 것 같구나.]
‘응? 백 장 정도 거리를 두고 스무 명 정도가 더 있는데요?’
그때, 천성의 영안에 비슷한 기운을 가진 스무 명의 움직임이 잡혔다.
앞서 달리는 아홉 인물과 보조를 맞추는 듯 그들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살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 마차를 노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나는 길인 것 같군요.”
천룡이 일행을 안심시켰다.
정황상 운현이 코앞이니 아마도 해가 지기 전에 여장을 풀기 위해 서두르는 것인 듯했다.
“해가 거의 떨어지고 있으니 우리도 조금 더 서두르는 게 좋겠군요.”
천성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마부에게 좀 더 서둘러 달라 이야기하자 마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에이!”
말을 탄 사내들이 마차를 스치듯이 지나쳐 가자 아쉽다는 듯이 감석보가 한탄을 했다.
이번에야말로 한 번 영웅담을 제대로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또 허탕인 것이다.
“생긴 건 험악해 가지고. 얼굴값도 못하네!”
감석보가 투덜거렸다.
“분명 고수들 같은데, 기세를 느낄 수 없는 걸 보면 일부러 숨기는 것 같군.”
천룡이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심상치 않은 무리가 마차를 스쳐 지난 후 다시 일행은 평온하게 담소를 나누며 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