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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2(21화)
7장 구천마련(1)
호북 운현에 아홉 필의 말이 들어섰다.
천성 일행의 마차를 지나친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근방에서 가장 큰 안빈객잔이라는 곳에 여장을 풀었다.
점소이는 사내들의 험악한 분위기와 무기를 보고는 굽신거리며 좋은 방으로 안내했다.
“씻을 물과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 주게.”
무리 중 얼굴에 검흔이 있는 중년의 사내가 점소이에게 주문했다.
인상에 비해서는 제법 정중한 말투였다.
일행들이 대충 몸을 씻고 일층에 내려오자 점소이가 얼른 음식들을 내왔다.
일행은 젊은 청년 한 명과 백발의 노인 하나, 일곱의 중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일행이 청년을 어렵게 대하는 것으로 보아 가장 윗사람임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아마도 어느 무가의 도련님을 모시고 나온 것이리라.
청년은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모에 양끝으로 솟아오른 굵은 눈썹이 인상적이었는데, 자신을 공경하는 일행의 태도를 당연시 받아들이는 모양새가 결코 어색하거나 거슬리지 않았다.
“흔적이 남동쪽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대로 내려간다면 무림맹에 가까워지지 않겠습니까?”
검을 찬 비쩍 마른 중년인이 청년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흥, 그깟 무림맹에 겁먹는 것이냐? 우리가 언제부터 정파 떨거지 놈들의 눈치를 보며 움직였더냐!”
그에 백발의 노인이 눈썹을 치켜올리고 호통을 쳤다.
식당 안의 사람들이 노인의 호통 소리에 시선을 집중했다가 살벌한 일행의 분위기를 보고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지 않아도 요즘 무림맹에서 저희를 견제하고 있는 참인데, 괜한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련주께서도 섣부른 행동은 자제하라 하셨으니 그에 따라야겠지요.”
청년의 왼쪽에 앉아 있던 통통한 중년인이 노인을 말렸다.
“부군사의 말이 옳습니다. 결국 놈들이 더 내려가기 전에 잡는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겠군요.”
청년이 부군사라 불린 통통한 중년인을 두둔했다.
“에잉, 이래서 내가 배운 놈들을 싫어하는 것이야! 뭔 생각이 그리 많아! 그냥 힘으로 돌파하면 그만인 것을!”
노인이 잔뜩 불만이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객잔 입구 쪽으로 다섯 명의 젊은이가 호들갑을 떨며 들어왔다.
“어허, 미래의 천하제일고수 철혈신룡이 허름한 객잔에서 머물 수야 없지 않겠소! 잔말 말고 나만 믿고 따라오시오!”
감석보의 목소리가 객잔을 쩌렁쩌렁 울렸다.
천성 일행이 이제야 운현에 도착한 것이다.
천룡이 호객꾼 꼬마를 따라 작고 허름한 객잔에 들어가려는 것을 감석보가 강호의 지위와 명성을 생각해야 한다며 이리로 끌고 온 것이다.
사실 두 여인도 이번만큼은 감석보의 행동에 속으로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한데 천성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객잔 안 손님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천룡 일행을 향했다.
감석보의 호들갑 탓도 있었지만 화설련의 미모가 워낙 출중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천성이 혼자서 여행 물품을 잘 구입해 올 수 있을까요?”
영호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천룡에게 물었다.
“걱정 말거라. 그 녀석은 나와는 다르게 어릴 때부터 숙부를 따라 이곳저곳 제법 돌아다녔으니.”
천룡의 말에 영호명은 걱정을 접었다.
천룡 일행을 주의 깊게 바라보던, 얼굴에 검흔이 있는 중년인이 청년에게 말했다.
“화산파인 것 같군요. 저 여인은 아마도 사봉 중 한 명인 화산일미 화설련인 것 같습니다. 허허, 소문대로 대단한 미인이로군요.”
영호명의 옷에 새겨진 매화 문양을 보고 알아차린 것이다.
“실로 경국지색이란 말이 모자랄 미인이군. 오히려 소문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반도 표현하지 못했어.”
청년 또한 화설련의 미모에 감탄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말이라도 걸어 봤을 터인데, 맡고 있는 임무가 워낙 중요하다 보니 안타까운 탄성만 흘릴 뿐이었다.
“저들이 섬서에서 예까지 무슨 일로 온 것일까?”
“젊은이들뿐인 걸로 보아 아마도 천하영웅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무한으로 가는 길인 듯합니다.”
검흔의 중년인이 청년의 말을 받았다.
운현까지 오는 동안 천하영웅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무한으로 향하는 젊은 무사들을 제법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온 중원 땅이 천하영웅대회로 떠들썩했다.
“어차피 어린애들이니 신경 쓰지 말고 일단 앞으로의 일이나 논의해 보지요.”
한데 그 순간, 백발노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천룡을 바라보았다.
“재밌는 녀석이 있구나. 크크크.”
그 말에 청년의 눈에서도 이채가 떠올랐다.
백발노인이 관심을 가질 정도의 인물이라면, 최소한 오룡 급의 고수가 저 중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무공이 뛰어난 인물 외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왕 호법님의 관심을 끌다니, 대단하군요.”
말과 함께 청년이 일행을 자세히 살폈다.
매화검수의 표식을 소매에 새긴 소년의 기세도 제법이었으나, 그 옆에 절제된 기운을 풍기는 천룡의 모습이 왠지 눈에 들어왔다.
“고수군요.”
청년은 단숨에 천룡이 기세를 자연스럽게 갈무리할 수 있는 경지임을 알아차렸다.
천룡의 경지를 알아보았다는 것은 그 역시 그에 못지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흥!”
백발노인이 잠시 천룡 일행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청년도 아쉽지만 관심을 거두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일행과 의논했다.
“아아악!”
감석보와 천룡 일행이 방을 잡고 막 계단을 오르려는데, 객잔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스런 웅성거림이 들려오고 호통 소리 사이로 아이와 여인의 비명 소리가 계속되었다.
“무슨 일일까요?”
검흔의 중년인이 객잔 입구를 바라보았다.
“괜한 일에 휘말려 임무를 그르칠 순 없으니, 관심을 거두도록 하게.”
청년이 조용히 중년인을 진정시켰다.
그때, 밖에서 다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이 더러운 마교의 종자 놈들,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하겠느냐!”
그 순간, 청년이 벌떡 일어나서 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소주!”
일행이 얼른 청년을 따라나섰다.
객잔 밖에는 다른 사람들도 소란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 다들 나와 있었다.
객잔 앞에는 한 무리의 무사들이 밧줄로 묶인 여인과 아이들을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하며 끌고 가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이들이 땅바닥을 뒹굴고, 무공도 없어 보이는 여인과 아이들이 무사들의 모진 발길질과 손찌검을 당하며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무사들은 가슴 한복판에 촌스럽게 양도문이라 쓰여진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리 유명하지 않은 소규모 지방 문파인 듯 보였다.
“나으리, 살려 주십시오! 이 어린것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흑흑!”
밧줄에 묶인 중년 여인이 무릎을 꿇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사들에게 애원했다.
“흥! 어차피 마교의 종자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 안 그러면 독버섯처럼 퍼져서 온 중원 땅을 시커멓게 물들일 것 아니냐!”
“죽어라, 마교의 더러운 종자들!!”
“퉤! 마교의 잡종들!”
주위를 둘러싼 군중들이 돌멩이를 던지며 욕을 해댔다.
사실 그들이 마교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거나, 마교가 세상에 큰 해악을 끼쳤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고, 특히 지금 끌려가고 있는 여인과 어린아이들은 더더욱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똑같은 어머니요, 힘없는 아이들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대하는 양 돌을 던지며 침을 뱉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이 나라와 강호의 전통 있는 문파들이 마교란 악이며 사라져야 할 괴물들이라 규정 지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실 마교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지만 마교로 인해 나라가 어지럽고 강호가 혼란스러우며, 마교가 잔혹하게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는다고 배워 왔고, 당연히 그것을 사실이라 믿고 있었다.
폭력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두려움은 대상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출발한다.
상대를 잘 알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에 대한 대응 방법이 생기기 때문이다.
귀신과 도깨비를 무서워하고 천재지변(天災地變)을 두려워하는 것은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그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가위 눌린 것과 같은 상태가 두려움을 불러오는 것이다.
결국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그 대상을 배척하고 공격하여 실체를 부정하려 한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통치자와 권력 집단은 군중의 원활한 통제를 위해 두려움의 대상을 만들어 자신들에 대한 불만과 증오가 그리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마교는 명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을 정도로 그 힘과 세력이 막강했다.
명 태조 주원장은 마교의 강력한 전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자신의 왕권에 가장 위협이 되는 세력이라 여겼다.
하여 마교를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바로 백성들의 두려움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마교를 악으로 규정하여 사악하며 잔혹한 무리, 인육을 먹고 아이의 피를 빠는 무리로 여론을 조성했다.
나라에서 조성한 여론은 금세 백성들 사이로 퍼지고 군중은 그것을 당연시 여겼다.
개인은 똑똑하지만 군중은 우매(愚昧)하다.
혼자일 때는 많은 생각을 하며 삶에 대해 고민하던 사람도, 군중에 휩쓸리면 ‘나’를 잃어버리고 ‘전체’가 되어 버린다.
함께하니까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행동이 아니라, ‘모두’가 하니까 당연히 나도 해야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마교는 백성들에게 있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절대악이 되었다.
지금 양도문이라는 이름 없는 문파에 끌려가고 있는 힘없는 여인과 아이들도 군중의 눈에는 악귀의 씨앗으로 보였기에 서슴없이 돌팔매질하고 악에 받친 욕을 해대는 것이었다.
“이익!”
객잔 밖으로 나온 청년이 화를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부군사가 막았다.
[참으십시오, 소주. 저희의 임무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어깨를 잡은 부군사가 전음으로 청년을 말렸다.
[저들이 대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저들은 무공도 모르는 일반 신도일 뿐이야!]
구천마련의 소공자 혈기린(血麒麟) 혁련무광이 자신을 말리는 부군사 종리벽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도 이번 임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이번 임무는 구천마련의 사활이 달린 일.
정파의 세력권 한가운데에서 움직여야 하는 임무였다.
그러니 여기서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면 더 이상 임무를 진행할 수가 없게 된다.
결국 혁련무광은 속으로 분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저런 쳐 죽일 놈들!”
성격이 불같은 백발노인, 광무패왕(狂武覇王) 왕추도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 뿐, 임무의 중요성을 알기에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당장에 저놈들을 쳐 죽이고 교도들을 구할 수는 있겠으나, 이곳은 무당의 영역권.
금세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게 될 터이고, 그렇게 되면 임무는 실패하게 되리라.
혁련무광을 둘러싼 마련의 무사들 역시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분함을 삼켰다.
그때, 역시나 소란 탓에 객잔 밖으로 나온 천룡이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시오. 철혈문의 궁천룡이라 하오. 무슨 일로 이들을 끌고 가시는 것이오? 보아하니 무공도 모르는 일반인 같은데, 대체 어떤 잘못이 있길래 이리 모질게 대하는 거요?”
무사들의 행동이 못마땅했던 천룡이 약간은 삐딱한 말투로 물었다.
“난 양도문의 하군보라 하오! 이들은 사특한 마교의 식솔들이오! 문파의 후계자이신 진용화 소공자께서 이들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내셨고, 마교도 놈들을 모두 제압하여 무림맹으로 압송하는 중이오! 그러니 괜한 참견 말고 비켜서시오!”
한쪽 뺨에 콩알만 한 점이 있는 무인이 뒤쪽에 있는 눈이 찢어진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청년이 아마도 진용화라는 양도문의 소공자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