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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2(23화)
7장 구천마련(3)


우우우우웅!
막대한 마기가 군중들과 무사들을 찍어 눌렀다.
나무로 만든 창문은 부서질 듯 진동했고, 말들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천룡마저도 무극진기를 어느 정도 끌어 올려야만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었다.
사방의 군중들이 그제야 두려움을 느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미 기세를 버티지 못하고 실신한 자들도 제법 되었다.
“아이고, 살려 주십시오! 무식한 것들이 고인을 몰라 뵈었습니다!”
왕추의 호통에 군중들이 덜덜 떨며 용서를 빌었다.
“흥! 너희는 이들에게 변명할 기회라도 주었더냐? 같은 사람이 어찌 서로에게 이리도 모질게 군단 말이냐! 내 너희를 모조리 쳐 죽여 앞으로 어느 누구도 신교도를 함부로 건들지 못하게 하리라!”
왕추가 기세를 더욱 끌어 올렸다.
이미 마음먹고 끌어 올린 기세였으니 일반인들이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때, 천룡이 무극기를 더욱 끌어 올려 왕추의 기운을 막아섰다.
“어르신, 이들도 힘없고 어리석은 백성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들을 죽인다면 양도문 무리들과 다를 게 무엇이겠습니까?”
“제법이구나! 니가 감히 조금 재주가 있다 하여 나를 막아 보겠다는 것이냐?”
살기 띤 미소를 입에 문 왕추가 십성의 공력을 끌어 올리자 흑의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우우우우웅!
사실 왕추는 구천마련의 사대호법 중 한 명으로 화경 중엽의 고수였다.
구천마련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력한 고수인 것이다.
거기에 광무패왕이라는 별호처럼 그야말로 무에 미친 인물이 바로 그였다.
천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왕추는 자신보다 훨씬 윗줄의 고수.
만일 왕추가 손을 쓴다면 자신의 목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초절정과 화경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려운 가운데 한편으로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호승심이 일어났다.
강력한 상대와 싸우는 것은 모든 무인들의 소망이 아닌가.
‘그래! 미래의 천하제일고수 궁천룡!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고 강호에 우뚝 선 자! 음하하하하!’
천룡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전의를 끌어 올렸다.
“어르신, 지금 중요한 건 무림맹에서 지원이 오기 전에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빨리 서둘러야 합니다!”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해 있던 천성이 급히 소리쳤다.
아무래도 왕추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었다.
“……!”
천성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왕추가 불길이 이는 눈으로 떨고 있는 교도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자신들도 운현을 벗어나야 했다.
가까운 곳에 무림맹 지부가 있고, 무당파의 영역에서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언제 정파 무인들과 도사들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특히나 정체를 숨겨야 하는 입장에서 꼬리를 잡힐 만한 위험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순간, 혁련무광이 왕추와 눈빛을 교환하더니,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잠시 후 방립을 쓴 스무 명이 나타났다.
여인과 아이들의 상태가 좋지 않아 거동하기 힘들어 보였기에 뒤따르던 암영단을 불러 돕게 하려 한 것이다.
‘아까 멀리서 숨어 뒤따르던 자들이로군.’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거라!”
청년의 명령에 방립인들이 여인과 아이들을 한 명씩 안아 들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귀신같은 그들의 움직임에 군중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나저나 네 녀석은 제법 마음에 드는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왕추가 천성을 보며 물었다.
“하하! 이름을 알려 드리려면 왜 복면을 했겠습니까? 사정이 있음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부를 이름이 마땅치 않으시면 그저 무명자(無名子)라 불러 주십시오.”
“큼큼, 그렇지. 우린 복면을 했지. 어험!”
그때, 혁련무광이 동그란 철패 하나를 천성에게 던졌다.
“우리는 은혜를 잊지 않소. 그대로 인해 우리 교도들이 구함을 받았으니 언제라도 그 패를 가지고 신강으로 찾아오시오! 그럼 형제의 예로 맞이하겠소!”
척!
천성이 철패를 받은 후 살펴보니 중앙에 마(魔)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주변을 정교하게 조각된 두 마리의 혈룡이 둘러싸고 있었다.
“하하하, 한 일에 비해 너무 과분한 인사입니다. 훗날 반드시 찾아뵙고 좋은 술 한 잔 대접받도록 하겠습니다.”
천성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이들의 행동을 보니 마교도가 알려진 것처럼 괴물이거나 사악한 무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저 과격하고 거칠 뿐, 오히려 행동 하나하나는 순수해 보이지 않는가.
사귀어도 괜찮을 사람들 같아 보였다.
“좋구나! 그럼 다음에 보자!”
인사를 나눈 천성과 혁련무광, 왕추가 각기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휴, 그 노인이 물러나서 다행이군.”
그제야 천룡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한편으론 한 번쯤 승부해 보고 싶다는 아쉬움도 있었으나. 쓸데없는 호승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것은 원치 않는 일이었다.
“정말 무서운 기세로군요. 마치 사백조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영호명 역시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았는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말했다.
일행은 기절한 감석보를 깨워 객잔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린 양도문의 무사들은 부끄러움도 모른 채 운현의 무림맹 지부로 이 일을 따지겠다며 우르르 몰려갔다.
혁련무광과 왕추는 이미 객잔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라? 안에 있네. 내가 잘못 봤나? 분명 저 노인네 같았는데.”
감석보가 커다랗게 혹이 난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그에 왕추와 혁련무광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때, 천성이 짐을 한 보따리 짊어진 채 객잔으로 들어섰다.
“뭔 일 있었습니까? 왜 이리 어수선한 거죠?”
“아, 글쎄요!”
감세령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성에게 그간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흠, 그것참 문제로군요. 무림맹에서는 왜 그런 참가 조건을 내세워서 분란 거리를 만든 걸까요? 이런 상황을 미리 예상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문제가 생긴 뒤에 다시 바로잡을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이런 일들을 조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군요.”
천성이 얼굴을 찡그리며 이야기했다.
“어중이떠중이가 대회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조건을 만든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 조건도 이렇듯 편법을 이용하는 자들로 인해 무용지물과 같지 않습니까?”
영호명도 의문을 제기했다.
“아마도 무림맹에서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원했겠지. 온 강호가 마교도를 사냥하고 구천마련에 대한 증오를 키우기를. 모두가 마교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 여기도록 말이지.”
천룡이 턱을 매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휴, 저런 일들이 이곳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일어날 텐데요. 이번 무림맹의 처사는 참으로 지나친 면이 있군요.”
화설련도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은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올라갔다.

돈 많은 감석보가 방을 세 개나 잡아 일행은 한방에 두 명씩 편하게 쉴 수 있었는데, 부득불 천룡과 한방을 쓰겠다고 우기는 감석보 때문에 천성은 영호명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천성은 겸손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영호명이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영호명은 천성의 무력이 자신보다 떨어짐―영호명의 입장에서는―에도 결코 무시하거나 잘난 척 하지 않았다.
“천룡 형님은 어릴 때부터 저렇게 뛰어난 분이셨어?”
“풉!”
천성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영호명에게 천룡은 이미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천성은 그러한 영호명의 환상을 깨뜨리고 싶은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짐짓 진중한 표정을 지은―웃음을 참기 위해―천성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했지. 철혈문을 떠나 삼선께 가기 전에도 항상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었지. 수련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백부님이 극구 말리실 정도였어. 결국 너무 많은 수련은 오히려 몸에 독이 된다고 판단하신 삼선께서 형님을 데려가 체계적으로 가르치신 거야. 하하하하!”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니 정말 재미가 있었다.
‘역시 명이는 놀려먹는 재미가 있어.’
그런 줄도 모르고 영호명은 동경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천성의 말을 경청했다.
“아, 나도 과연 천룡 형님처럼 될 수 있을까?”
영호명이 아련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천룡과 자신의 격차는 너무도 멀어 보였다.
천성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허참, 분명 형님은 괴물이지만, 너도 그 못지않은 괴물이야.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고 있잖아. 특별히 수련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형과 대화하는 것만으로 말이지. 이런 네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욕할 거야.”
천성이 미소 지으며 영호명을 격려했다.
“하하, 그런가?”
영호명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헛소리 말고 잠이나 자자.”
그렇게 객잔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가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섰다.

* * *

무림맹 맹주 집무실.
남궁영은 군사 제갈휘가 가져온 보고서들을 읽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남궁영이 미간을 찡그렸다.
보고서에 양도문의 일이 적혀 있던 것이다.
“흠, 뭔가 예사롭지 않군. 마교가 왜 운현에 나타난단 말인가?”
“글쎄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것이, 그들이 무당파의 세력권에서 무리해서 무언가를 할 이유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아무래도 놈들이 다른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다가 양도문에 끌려가는 마교도들을 우연히 보고 구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제갈휘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어쩌면 이번 천하영웅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는 것일 수도 있겠군.”
남궁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번에 운현에 나타났던 흑의복면인들의 무공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합니다. 게다가 처음 나타난 무명자라는 흑의인이 양도문 무사들을 모두 제압하는 데는 숨 한 번 쉴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합니다. 뒤에 나타난 백발복면인의 기세 또한 최소 초절정에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그들의 목적이 천하영웅대회를 방해하는 것이라면, 상당한 위험요소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번 운현의 소동에는 세 명의 흑의인과 스무 명의 방립인이 참여했다.
그 정도 인원으로 천하영웅대회를 직접 방해한다는 것은 무리였으나, 소수의 고수들을 이용하여 참가자들을 공격하려 한다면 대응하기가 만만치 않을 터였다.
“흠, 쉽게 볼 놈들이 아니겠군. 거기다 그들이 전부가 아닐 경우도 생각해야 해. 일단 만반의 대비를 해야겠네. 각 후기지수들이 여정 중간에 공격받을 경우를 상정하고 백호단과 청룡단을 파견하여 마중 나가도록 하라. 그리고 각 지부의 병력을 동원하여 두 단을 지원하도록.”
“존명!”
남궁영의 명을 받은 제갈휘가 빠른 발걸음으로 맹주전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