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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2(24화)
7장 구천마련(4)
객잔을 나선 천성 일행은 무당산을 돌아 무한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우리를 따르는 자들이 있는 것 같구나.]
무숙이 천성에게 경고했다.
그에 천성은 영안을 끌어 올렸으나 특별한 기운을 가진 자들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관도이다 보니 수시로 사람들이 왕래하고 무림인들도 몇 명 보였지만, 의심스러운 기운의 움직임을 느낄 수가 없던 것이다.
[저 뒤에 봇짐을 멘 더벅머리사내 보이지?]
‘네. 하지만 그는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데요?’
[후후후, 잘 지켜보거라.]
천천히 움직이는 마차의 뒤로 사내가 점점 멀어져 갔다.
‘거 보세요. 괜한 걱정 아니세요?’
그때, 마차가 향하는 우측 삼십 장 정도 앞쪽으로 차를 파는 임시 다루가 보였다.
[이제 찻집에서 나오고 있는 중년 아낙을 보아라.]
천성이 살펴보니 그 여인에게서도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어긋남이 서서히 느껴졌다.
천성 일행의 마차가 중년 아낙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둘의 공통점이 무엇인 거 같으냐?]
천성이 미간으로 의식을 집중해 영안을 최대한 확장했다.
그러자 중년 아낙의 주변에 흐르는 기운이 보였다.
그곳에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기운들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아낙의 움직임 하나하나, 발걸음 하나하나를 살피던 천성이 이윽고 독특한 점을 발견해 냈다.
‘아, 호흡이 일반인들에 비해서 상당히 길군요!’
아낙의 호흡은 일반인보다 길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이제 알겠지? 아무래도 기운을 숨기는 데 익숙한 자들 같구나. 예를 들면 은밀한 침투나 남을 미행하는 데 특화된 이들 말이다. 저 특별한 호흡이 자연과 동화되는 것처럼 만들어 주는 듯하다. 하지만 결국엔 그 호흡조차 지우진 못했구나.]
무숙이 그것을 발견해 낸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놀라웠다.
무숙이 아니었으면 천성은 전혀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저런 게 은형술이군. 자객들이 쓰는.’
천성은 속으로 감탄했다.
과연 고수들조차 경각심을 가질 만한 자들이었다.
‘한데 대체 어느 세력에서 우릴 노리고 있는 걸까요?’
[그건 저들이 과연 누구를 쫓고 있는 것인가를 알아야 하겠지.]
무숙의 의미심장한 말에 천성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지금껏 저들이 자신을 따르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잘 생각해 보니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운도 다르고 생긴 것도 다른 흑의인과 자신을 어찌 연결시키겠는가.
물론 이것저것 연관성을 따지고 정보를 수집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천성이 흑의인의 모습으로 활동한 것은 겨우 세 번에 불과했기에 아직까지는 무언가를 추정할 만큼의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쫓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저들이 선검문에서부터 따라붙은 걸로 봐서는 네 형을 쫓는 것 같구나.]
‘선검문에서부터요?’
천성은 그렇게 멀리 오는 동안 자신이 알아차리지도 못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처음엔 나조차도 그냥 흘려보냈는데, 화산을 나서면서부터 저들의 존재를 눈치챘지. 주로 도시 근처에서만 일행을 주시하고 도시에서 멀리 벗어나면 거리를 백 장 이상 벌려서 우릴 쫓는 용의주도함을 보였거든. 그래서 쭉 지켜보다가 이제야 확신하게 된 것이지.]
‘대단하군요. 그렇다면 천룡 형님이 흑암문주를 물리친 것 때문일 확룰이 높겠군요.’
일행 중 선검문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천성과 천룡, 그리고 감석보 남매뿐이었다.
자신은 별다른 존재감을 보여 주지 못하였기에 관심을 끌 이유가 없었고, 감석보 남매는 그 행동이 튀긴 했으나 흑암문과의 대결에서 아무런 활약도 보여 주지 못하였으니 역시 관심을 가지고 쫓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갑작스레 등장한 정체불명의 청년 고수 궁천룡에게 모든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로운 고수의 출현은 여러 세력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문제였지만, 이렇게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한다는 것은 천룡이 그들에게 상당한 위험요소가 된다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천룡 때문에 가장 피해를 봤을 세력이 어디인가 생각해 보면 저들이 누구인지 대충 답이 나왔다.
바로 치우 일족인 것이다.
‘놈들!’
천룡이 이를 갈았다.
곡용천의 원수.
자신과는 양립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억울함 따윈 관심도 없었다.
자신들의 복수를 위해 다른 이의 아픔을 보지 않는다면,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 뿐이었다.
결국은 그들이야말로 수많은 원한을 만들어 내는 악의 근원인 것이다.
‘다음 마을에 들르면 놈들을 잡아 정체를 알아내야겠군요.’
천성의 생각에 무숙은 제동을 걸었다.
[그건 안 돼. 놈들이 네가 천룡이와 관계가 있음을 눈치챌 확률이 있어.]
천룡을 쫓던 이들이 영력을 사용하는 이에게 당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놈들은 더욱 천룡을 경계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되는 셈이었다.
‘젠장, 그럼 일단은 놈들의 다음 행동을 지켜본 후 어찌할지 결정해야겠군요.’
[아무래도 그게 낫지.]
‘한데 확실히 무숙은 복희를 만난 후 훨씬 똑똑해진 것 같군요. 후후.’
예전의 무숙이라면 이런 생각들을 해냈을 리가 없었다.
[나 원래 똑똑하다. 단지 그동안 기억에 문제가 있었을 뿐이야.]
무숙이 뻔뻔스러운 목소리로 점잖게 말했다.
그 모습이 도무지 이전의 경망스러운 말투와 조화가 되지 않았다.
천성이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정리했다.
비록 천룡이 뛰어난 고수라고는 하나 전혀 다른 힘과의 대결에서 쉽게 우위를 점할 수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공동파의 고수인 좌공도 섬응이란 자에게 너무도 어이없이 당하지 않았던가.
‘저들이 천룡 형님을 노린다면 앞으로 더욱 조심해야겠군요.’
[그래. 천룡이 아무리 고수라 하여도 화산에서와 같은 무리들이 나타난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게다.]
챙! 챙!
그때, 관도 앞쪽에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혁련무광은 자신들 앞에 버티고 선 자들의 면면을 살펴보곤 검미를 찡그렸다.
“음…….”
혁련무광의 일행 앞에는 삼십여 명에 이르는 무리가 마주 보며 대치하고 있었는데, 그 면면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들은 천하영웅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나선 무당파와 제갈세가의 후기지수들과 그들을 보호하고 인솔하기 위한 각파의 고수들이었다.
거기에 하북팽가와 기타 중소 문파의 참가자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그중 익숙한 얼굴도 한 명 보였는데, 바로 유가장에서 천성의 마음을 흔들었던 서문유란이었다.
서문유란의 옆에는 푸른 경장 차림의 한 떨기 수선화와도 같은 청초한 미인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제갈세가의 금지옥엽이자 사봉 중 지봉(知鳳)이라 불리는 제갈수련이었다.
서문유란과 제갈수련은 십여 년이 넘게 친분을 쌓은 지기였다.
그런 이유로 천하영웅대회에 함께 가기 위하여 서문유란이 제갈세가를 방문해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녀들은 갑작스러운 지금의 상황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혁련무광의 두 눈은 무당파 도사들의 오른쪽에 서 있는 붉은 옷의 여인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그녀의 흑진주 같은 두 눈이 혁련무광의 시선을 마주했다.
육 척이 넘는 큰 키에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이십대 후반의 여인은 그녀의 옷차림처럼 붉은 입술을 양옆으로 말아 올린 채 혁련무광을 비웃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혁련무광 일행의 목표였다.
“끄응…….”
혁련무광은 침음성을 흘렸다.
지금 상황은 그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또한 달갑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자신들이 쫓던 자들이 정파의 무리들과 함께하다니!
‘그렇다면 결국 무림맹의 농간이었던가? 아니야. 정파가 무엇 때문에?’
현 시점에서 정파는 전성기를 구사하고 있었고, 일부러 분란을 만들어 자신들의 체제에 혼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혹시 정마대전이라도 일으키려는 건가?’
많이 가진 자가 적게 가진 자를 칠 때는 그에 따른 이익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한데 무림맹이 신강에 가만히 처박혀 있는 구천마련을 건드려서 얻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신강까지 차지하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혹시 정파 세력의 단합을 위해?
현 백도 세력은 구파일방과 팔대세가, 그리고 무림맹을 중심으로 견고한 지배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특별한 불만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감히 기존의 지배층에게 도전하려는 간 큰 무리 또한 전무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무림맹이 무리수를 둔단 말인가.
‘그렇다면 전혀 다른 제삼 세력이란 이야기!’
그때, 대치하고 있는 무리 중 도사 복장의 중년인이 정중하지만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무당의 유운이라 하오. 그대들은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천하영웅대회로 향하는 후기지수들을 함부로 막아서는 것이오?”
무당파의 유운이라면 일대제자이자 무당칠자의 한 사람으로, 청풍검협(淸風劍俠)이라 알려진 초절정의 고수였다.
그의 옆에는 또다른 중년 도사―유운의 사형제로 보이는―와 세 명의 젊은 도사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상대하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 고수들이었다.
‘무당파라…….”
혁련무광이 무거운 얼굴로 도사를 바라보았다.
“우린 저 붉은 옷의 여인과 두 명의 일행에게 볼일이 있을 뿐이오. 저 여인이 우리의 물건을 훔쳐갔소. 다른 분들께는 어떠한 용건도 없으니, 저 여인과 우리의 일에 상관하지 말아 주시오!”
이미 대강의 상황 파악을 마친 부군사 종리벽이 재빨리 정중하게 이야기하며 두 무리를 분리하려 시도했다.
백도의 세력권 중심에 들어온 현 상황에서 저들과 척을 지는 것은 최악의 결과를 불러올 것임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저, 저들이 바로 저희 가문을 멸문시킨 구천마련의 무사들입니다!”
순간, 어이없게도 홍의여인이 몸을 움츠린 채 뒷걸음질치며 외쳤다.
“그대의 가족을 몰살시켰다는 마교의 무리들이 저들이오?”
여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청년이 앞으로 나서며 호통 쳤다.
정황상 아마도 홍의여인이 ‘가문이 구천마련에 의해 멸문당했으며 마련의 무사들에게 쫓기고 있다’고 이야기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