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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2(25화)
7장 구천마련(5)


“이제 보니 구천마련의 졸개들이구나!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기어 들어왔더냐!”
하북팽가의 셋째 팽연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각진 턱과 온몸에 꿈틀대는 근육이 그가 게으름 피우지 않고 꾸준히 단련해 왔음을 보여 주었다.
팽가에서도 이번 천하영웅대회 참가자 명단에 포함시켰을 만큼 팽연호에 대한 기대가 컸다.
동시에 여인과 함께하고 있던 정파인들의 얼굴에도 분노가 일었다.
어차피 정도무림과 마련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관계였다.
혁련무광이 다시 한 번 침음성을 흘렸다.
어린것들은 저래서 문제다.
‘왜’라는 간단한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리려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언제 달려 나갈까만 생각하는 경주마처럼 단순하다 보니 이용해 먹기 딱 좋은 먹잇감인 것이다.
이로써 자신들이 구천마련임이 드러나 버렸다.
물론 여인의 말에 불과했지만, 자신들이 아니라고 변명한다 하여 믿어 줄 분위기도 아닌 듯했다.
더욱이 부인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자신들은 떳떳한 마련의 전사들이기 때문이었다.
싸움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혁련무광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기지수들쯤이야 지금 자신들의 전력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문제는 후기지수들을 인솔하기 위해 함께한 각파의 고수들이었다.
그들까지 상대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터.
그사이 무림맹 지부나 무당파에서 지원 세력이 온다면 몸을 빼기가 힘들 것이다.
장소가 관도인 탓에 보는 눈도 너무 많았다.
“흥, 주제도 모르는 애송이가 어딜 나서느냐! 지금 우리가 사정을 봐주고 있는 걸 정녕 모르겠느냐? 만일 련주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네놈은 이미 한 줌 핏물로 화했을 것이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왕추가 기세를 끌어 올리며 일갈했다.
단지 호통을 쳤을 뿐인데, 공력이 약한 후기지수들은 머리를 붙잡고 주저앉을 정도였다.
일행 중 무당파 도사들과 후기지수들의 안전을 위해 따라나선 각파 고수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왕추의 경지가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챈 것이다.
“실례지만, 고인께서는 함자가 어찌 되시는지요?”
그에 무당파 유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흥, 역시 말보단 주먹이 효과적이구나! 겁 없이 덤비던 어린것들도 이제야 저희 놈들이 호랑이 코털을 건드렸다는 걸 알고 오줌을 지리고 있지 않느냐! 크크크! 내 이래서 정파의 위선자 놈들이 싫은 게야! 좋은 말로 할 때 여인과 그 일행을 내놓고 썩 꺼지거라!”
왕추가 자신의 정체는 밝히지도 않고 정파의 무리를 비웃자 젊은 후기지수들의 얼굴이 벌게졌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양측 간의 오해는 더욱 깊어졌다.
왕추의 모습은 그야말로 홍의여인의 가문을 멸망시키고 그 씨를 말리려는 악적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팽연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너 같은 마교의 종자가 무엇이 두려울까! 네놈의 무공이 비록 대단하나 나 팽연호는 결코 목숨을 아끼는 겁쟁이가 아니다!”
팽연호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왕추에게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리석은 행위였다.
채챙!
하지만 미처 팽연호가 다가서기도 전에 왕추의 뒤에 시립해 있던 무사 한 명이 나와 두 번의 칼질을 여유롭게 막아 냈다.
“이익!”
팽연호가 이를 악물었다.
참으로 우스운 꼴이었다.
큰소리 치고 나섰으나 노인의 부하조차도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멈추게!”
유운이 팽연호를 재빨리 막아섰다.
하지만 양측의 무사들은 이미 모두 무기를 꺼내 든 뒤였다.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양측에 감돌았다.
“가문의 원수, 죽어라!”
그때, 홍의여인의 오른쪽에 있던 사내가 갑자기 들고 있던 창을 내던졌다.
슈우욱!
단창은 파공성을 내며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왕추를 향했다.
“흥!”
왕추는 코웃음을 쳤다.
제법 날카로운 기세를 품고 있었으나, 그래 봐야 자신에게는 어림없는 수작이었다.
왕추가 오른손을 펼쳐 창을 쳐 냈다.
휘이잉!
순간, 왕추의 눈이 부릅떠졌다.
갑자기 한줄기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창의 경로가 틀어지며 속도가 배로 빨라진 것이다.
“커억!”
단말마와 함께 뒤쪽에 서 있던 종리벽의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왕추가 다시 손을 쓰려고 했을 때는 이미 창이 종리벽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창에 꿰뚫린 종리벽이 이 장이나 뒤로 날아가 즉사했다.
“이익! 간악한 놈! 사술을 부리는구나!”
왕추의 두 눈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애초부터 놈이 노린 건 자신이 아니라 종리벽이었던 것이다.
결국 종리벽은 제대로 된 대응조차 못해 보고 죽었다.
아무리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종리벽도 절정의 무인이었다.
한데 손도 못 써 보고 당한 것이다.
창이 중간에 궤도와 속도를 바꿔 종리벽을 쳤기 때문이다.
상대가 이기어검의 고수가 아니라면 사술을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분노한 왕추의 양손에서 성명절기인 암혼장이 터져 나왔다.
퍼퍼퍼펑!
왕추의 공격을 재빨리 막은 무당파 도사들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뒷걸음질쳤다.
“비겁한 정파 무리들을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혁련무광이 분노에 차 명령했다.
이젠 더 이상 자신들의 임무를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마교의 부군사가 적의 비열한 기습에 죽은 것이다.
이 원한을 갚지 못하면 그들은 마련의 전사가 아니었다.
호위대 여섯과 숲에 숨어 대기하고 있던 스무 명의 암영단이 후기지수들을 덮쳤다.
무공이 약한 후기지수들은 구천마련 무사들의 검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이, 이런. 어째서 이런 일이!”
전력의 차이가 확실했다.
이 상태로 가면 정파 측이 전멸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유운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왕추의 공격을 막아 갔다.
혁련무광의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이 홍의여인에게 향했다.
“네 이년! 네년만은 결코 살려 두지 않겠다!”
보도인 혈암도를 뽑아 든 혁련무광이 동시에 두 가닥의 도기를 날려 홍의여인을 공격했다.
콰콰쾅!
폭음이 들리고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걷히자 도를 든 채 피를 토하고 있는 팽연호가 보였다.
주제도 모르고 홍의여인의 앞을 막아선 것이었다.
혁련무광은 짜증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분노를 가로막는 저들은 대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알고는 있을까.
뱃속으로부터 참을 수 없는 화가 끓어올랐다.
“이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애송이들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구나! 내 다 죽여 버리리라!”
순간, 혁련무광의 도에서 붉은 기운이 아른거렸다.
도기가 마치 불꽃처럼 타올랐다.
자연 팽연호의 안색이 흑색으로 변했다.
한 수조차 막지 못한 그가 혁련무광의 십성 공력이 담긴 공격을 받아 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흐압!”
츄아앙!
혁련무광의 기합성과 함께 붉은 도기가 팽연호를 향해 날아갔다.
도기를 날린 혁련무광은 팽연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홍의여인을 향해 돌진했다.
이미 끝났다 여긴 것이다.
쩌어엉!
한데 살이 갈리는 소리가 아닌, 기의 폭발에 의한 폭음이 들렸다.
팽연호에게 고개를 돌린 혁련무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약관도 안 돼 보이는 애송이 녀석 하나가 자신의 도기를 받아 낸 것이다.
바로 영호명이었다.
“크윽!”
비껴 막아 충격을 최소화했음에도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선 영호명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신음을 흘렸다.

* * *

천성 일행이 도착한 건 구천마련 무사들의 검에 일곱 명의 후기지수가 목숨을 잃은 뒤였다.
천룡과 영호명은 머뭇거리지 않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한쪽에서는 서문유란과 제갈수련이 암영단 무사들과 힘겹게 대치하고 있었다.
서문유란의 무공은 후기지수 중 뛰어난 편에 속했지만, 암영단의 무사들은 최하 절정 이상의 고수들이었다.
그런 탓에 실력은 비슷했으나 경험 면에서 현저히 밀렸다.
장내로 뛰어들려던 천성이 멈칫했다.
그제야 서문유란을 발견한 것이다.
순간, 천성의 눈에 착잡함이 떠올랐다.
그녀를 보자 아직도 자신의 심장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 때문에 곡용천은 목숨을 잃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해서는 안 돼!’
“앗! 유란이와 수련이가 위험해요! 도와주세요!”
그때, 화설련이 서문유란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천성은 화설련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검을 빼 들었다.
이미 장내에 뛰어든 천룡이 화설련의 목소리를 듣고는 빛살처럼 날아가 일격으로 서문유란의 목을 향하던 검을 쳐 내고 이격으로 암영단 무사의 팔을 잘라 내고 있었다.
퍼퍼퍽!
연이어진 천룡의 발길질이 암영단 무사를 멀찍이 날려 버렸다.
비명도 없이 쓰러진 암영단 무사는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암영단 무사의 생사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천룡이 검을 횡으로 그었다.
콰아아앙!
“크으윽!”
그 순간, 제갈수련을 찔러 가던 암영단 무사가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 피를 토했다.
그제야 천룡은 호흡을 가다듬고 흐트러진 기운을 안정시켰다.
상황이 급박하다 보니 무리를 했던 것이다.
‘미인들이 다치게 놔둘 수는 없지!’
제갈수련과 서문유란은 갑자기 뛰어든 청년무사의 뛰어난 실력에 깜짝 놀랐다.
서문유란이 비록 여인이었으나 이미 절정의 경지에 도달할 만큼 뛰어난 무사였다.
한데 천룡은 자신이 간신히 막아 내던 암영단 무사들을 순식간에 두 명이나 쓰러뜨린 것이다.
제갈수련은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을 빛냈고, 자존심이 강한 서문유란은 자신의 상대를 가로챈 천룡에게 화가 나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도 일대일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문유란이 기어이 한마디 하려는 순간, 천룡의 신형이 사라졌다.
한숨을 돌린 천룡이 재빨리 몸을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영호명과 팽가의 고수들은 객잔에서 보았던 젊은 청년과 맞서고 있었는데, 힘에 부쳐 보였다.
내상을 입었음인지 영호명의 입가에는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천성이 암영단 무사와 맞서고 있는 모습도 보였으나, 신법이 뛰어나 당장에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한편, 중앙에서는 왕추가 무당파의 도사들을 압도적인 무력으로 위기에 몰아넣고 있었다.
두 중년 도사의 경지가 상당해 보였으나 왕추에게는 어림없었다.
이미 세 명의 젊은 도사는 땅에 쓰러져 있었고, 두 중년 도사 역시 상당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왕추를 상대할 사람은 천룡밖에 없는 것이다.
‘후후! 어디 한 번 해 보자! 사나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내가 정말 스승님들의 말처럼 영웅이라면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수십 가닥의 검기 다발을 쏘아 내어 제갈세가 일행을 위협하던 네 명의 암영단 무사를 뒤로 물린 천룡이 결단을 내렸다.
“아자자자자자!”
신검합일을 이룬 천룡의 신형이 왕추를 향해 거침없이 날아갔다.


<『영웅재천』 제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