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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3



영웅재천 3(1화)
1장 구천마련(1)


쉬이이익!
천룡의 검에 대기가 신음을 흘리며 갈라졌다.
그 날카로운 기세에 무당 도사들에게 장력을 날리던 왕추가 신형을 돌렸다.
“흐흐흐!”
왕추의 눈에서 혈광이 일었다.
“운현의 그 애송이 놈이로구나!”
가소롭다는 듯 한마디를 뱉어 낸 왕추가 여유 있게 두 손을 펼쳐 천룡의 공격을 막았다.
쩌어엉!
순간, 검과 육장이 부딪쳤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크윽!”
천룡이 신음을 토해 내며 왕추의 우측으로 돌았다.
화경고수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가는 스승인 삼선과의 대련에서도 충분히 겪어 본 천룡이었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대결은 비무와는 전혀 달랐다.
단 한 번의 격돌만으로도 천룡은 내기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이를 악문 천룡이 멈추지 않고 연속으로 검격을 쳐 내었다.
까가가가강!
요란스런 쇳소리가 울리며 순식간에 십여 회의 검격이 왕추의 장에 부딪쳤다.
두 사람의 충돌에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일반 무사들은 파악하기조차 힘든 속도의 공격을 왕추는 마치 거목인 양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여유롭게 막아 냈다.
그럴수록 천룡의 안색은 어두워져만 갔다.
‘역시 힘든 일인가. 곧 무림맹에서 지원이 올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는데…… 노인네가 너무 강해. 젠장.’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은 수비만 하고 있지만, 왕추가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 시작하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검격을 멈추고 훌쩍 뒤로 물러난 천룡이 온몸의 진기를 최대한 끌어 올렸다.
뒤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에 처음부터 최선을 다할 생각인 것이다.
후우우웅!
이 갑자 반의 내공을 가진 천룡이다 보니 한꺼번에 막대한 진기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스아악!
검기가 이 장 가까이 솟아오른 천룡의 검이 왕추의 허리를 베어 갔다.
콰아아아앙!
오른손을 뻗어 천룡의 검을 막은 왕추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손에서 전해져 오는 충격이 상상 이상이었던 탓이다.
“허, 약관도 안 된 나이에 이런 공력이라니!”
공력만 따지면 자신에게 크게 뒤지지 않았다.
물론 아직 그 운용이 미흡했기에 왕추에게 큰 위협을 주진 못했다.
하지만 정파에 저토록 뛰어난 후기지수가 있다는 건 마련에게는 위협이 되는 일이었다.
이대로 십 년, 아니, 오 년만 지나도 천룡을 상대할 자가 몇이나 될까.
왕추는 이번 기회에 아예 싹을 잘라 버려야겠다 마음먹었다.
“안 되겠구나! 네놈만은 반드시 죽여야겠다!”
왕추의 눈에서 살기가 일었다.
아까운 인재이기는 하나 마련의 미래를 위해 필히 없애야 했다.
“네 운이 없음을 탓하거라!”
어린 천룡의 실력이 제법인지라 잠시 놀아 주려던 생각을 지우고 왕추는 본격적으로 공력을 끌어 올렸다.
우우우우웅!
그러자 대기가 진동하며 양손을 묵빛 강기가 뒤덮었다.
암혼장 최후 절초 중 하나인 암혼쇄심장(暗魂碎心掌)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끝을 보려는 것이다.
“장강(掌|)!”
잔뜩 구겨진 얼굴로 천룡이 소리쳤다.
왕추가 진정한 실력을 발휘하려는 것이다.
“크윽! 젊은이, 우리도 돕겠네!”
무당의 두 도사가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싸움에 합세했다.
슈우우우욱!
순간, 왕추가 양손을 앞으로 힘차게 밀어냈고 두 개의 묵빛 수강이 천룡을 향했다.
암혼쇄심장의 강력한 기세가 천룡과 무당 도사들의 몸을 옭아맸다.
콰아아아아앙!
“크윽!”
무지막지한 일격에 무당의 두 도사와 천룡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간신히 왕추의 일격을 받아 낸 세 사람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두 도사는 검붉은 피를 토해 내는 것이,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듯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왕추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신의 암혼쇄심장을 받아 낸 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크하하하하! 그래, 세 명은 되어야 나도 손쓸 맛이 나지!”
즐거운 듯 광소를 터뜨린 왕추가 검게 물든 양손을 연달아 휘둘렀다.
콰콰콰콰쾅!
천룡과 두 도사는 창백한 표정으로 사력을 다해 몸을 피했다.
십여 개의 장강이 순식간에 주변을 초토화시켰고, 마련이고 정파고 할 것 없이 모두 혼비백산하여 왕추의 장강을 피해 도망쳤다.
이것이 왕추에게 광무패왕이라는 별호가 붙은 이유였다.
싸움 중에 흥이 나면 주변을 상관하지 않고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이다.
일이 이 지경이 되면 아무도 왕추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인 것이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장강의 소나기 속에서 천룡 역시도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삼선에게 사사한 환영보(幻影步) 덕에 간신히 피해 내고는 있었으나 결국엔 한계에 달할 것이 분명했다.
그저 무림맹의 지원이 빨리 도착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천룡과 무당의 두 도사가 장강을 피해 도망치는 데만 급급하자 재미가 없어진 왕추가 눈썹을 꿈틀하더니 다시 한 번 공력을 끌어 올렸다.
우우우우웅!
“흥! 쥐새끼처럼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것이냐! 이것은 암혼연환격(暗魂聯環格)이라 한다! 어디 한 번 이것도 피해 보거라!”
슈슈슈슈슉!
연달아 다섯 개의 장력이 꼬리를 물고 세 사람을 향했다.
일순 두 도사와 천룡의 표정이 굳었다.
장력의 속도가 너무도 빨랐고, 그 범위 또한 도저히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다섯 개의 암혼장이 중첩되어 쏟아지는 공격이었다.
한 개의 암혼장조차도 막아 내기가 쉽지 않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최악의 위기였다.
‘어쩔 수 없이 무리를 해야겠구나!’
위기를 느낀 천룡이 결단을 내렸다.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아직 불완전한 파사검보의 후반 오초식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파사검보의 후반 오초식은 화경에 들어서야만 비로소 펼칠 수 있는 절기였다.
강기를 위주로 한 초식이었기 때문이다.
화경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로 무리해서 초식을 펼치게 되면 제 위력이 나오지 않을뿐더러 잘못하면 기혈이 엉켜서 주화입마에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천룡이 진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삼단전의 내공이 쑥 딸려 나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우우우우웅!
순간, 천룡의 검에서 한 마리 백룡이 꿈틀대며 솟구쳐 올랐다.
무당의 두 도사 역시 사력을 다해 자신들의 절초를 펼쳐 암혼쇄심장에 대항했다.
거대한 다섯 개의 묵빛 장강이 천룡과 두 무당 도사가 펼쳐 낸 검기와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일어나며 대지가 진동했다.
검을 맞대던 양측의 무사들이 잠시 넋을 잃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만큼 암혼쇄심장의 위력은 실로 막강했다.
두 명의 무당 도사는 뒤로 튕겨져 나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졌는데, 의식조차 잃은 듯했다.
무려 십 장이 넘게 밀려난 천룡 역시 검에 몸을 기댄 채 힘겹게 서 있었다.
내상을 입었음인지 입 주위가 흘러내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왕추의 얼굴에는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대단하군! 그걸 막아 내다니!”
몰골은 말이 아니었으나, 어쨌든 천룡이 자신의 십이성 공력이 실린 암혼장을 정통으로 받아 내고도 쓰러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나를 너무 원망 말거라! 소공자와 마련을 위해서 넌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다시금 기세를 끌어 올린 왕추가 천천히 천룡에게 걸음을 옮겼다.

* * *

천성은 암영단원을 맞아 이리저리 피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물론 본신의 실력을 발휘한다면 한주먹감에 불과할 테지만, 정체를 들킬 수 있는 상황은 되도록 피해야 했다.
천성은 일단 영안을 열어 장내 상황을 살폈다.
영호명은 혁련무광의 강력한 도기를 정면으로 받아 내느라 뒤로 열 걸음이나 밀려나 있었다.
땅에 깊게 찍힌 영호명의 족적이 혁련무광의 공력이 얼마나 깊은지 말해 주고 있었다.
다행히도 팽가의 고수들이 영호명을 지원하기 위해 급히 뛰어들고 있었다.
그사이에 천룡이 서문유란을 돕고 왕추를 상대하러 가는 것이 보였다.
‘대체 이들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일까요? 객잔에서 본 바로는 악한 자들 같지 않았는데.’
이제 막 도착한 천성은 종리벽의 죽음과 혁련무광의 분노를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서로가 정파와 마련이라는 이유만으로 피를 뿌리는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때, 천성의 영안에 홍의여인 일행이 잡혔다.
그들은 영호명의 뒤쪽, 혁련무광이 기를 쓰고 달려가려 하는 방향에 위치해 있었다.
‘저들은!’
[영력을 사용하는구나!]
홍의여인과 두 명의 무사는 싸움 도중 교묘히 영력을 섞어 가며 마련의 무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영력의 불완전함이 마치 치우 일족의 것과 같아 보였다.
‘저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무언가 또 다른 음모가 있다는 이야기로군요!’
선검문의 경우를 보아도 치우 일족이 무언가 꾸미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떤 계책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상황을 만든 원흉이 치우 일족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그러니 놈들을 잡아서 음모를 실토하도록 한다면 양측의 싸움을 멈출 수도 있으리라.
문제는 천성이 자신의 정체를 함부로 밝힐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젠장, 보는 눈이 너무 많아 변신을 할 수가 없군.’
숲으로 들어가 변신하는 수도 있었으나, 흑의인이 출현하는 동안 자신이 현장에 없다면 다른 사람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 분명했다.
[훗훗, 걱정할 것 없다. 이번에 복희의 도움으로 내가 제법 힘을 회복했거든. 그래서 실체를 유형화시킬 수도 있게 되었지. 시간 제한이 있긴 하지만. 거기다 나는 본래 형체의 변환이 자유롭거든.]
천성은 무숙의 말을 바로 알아듣고 반색을 했다.
‘그렇다면 제 모습으로도 변신하실 수 있겠군요!’
[물론이지!]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무숙이 대답했다.
‘시간은 어느 정도 가능하신가요?’
[아직은 일각을 조금 넘는 정도다. 그리고 형체를 유형화시킬 수는 있지만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 단지 심령으로만 대화할 수 있지.]
‘그래도 그게 어디에요. 이젠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복면인으로 변신할 수 있겠군요.’
언제든 변신해서 영력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천성에게 상당한 이점이었다.
[단, 일각뿐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난 다시 형체를 잃고 너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변신하도록 하죠.’
눈을 빛낸 천성이 암영단 무사의 공격을 막으며 점점 숲으로 물러섰다.
암영단 무사는 도망가는 천성을 놓치지 않으려 빠르게 뒤쫓았다.
“후후후!”
숲에 들어선 천성이 암영단 무사를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암영단 무사가 멈칫하는 순간, 천성의 신형이 사라졌다.
퍽!
암영단 무사가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어느새 복면인으로 변한 천성.
그런 천성의 몸에서 또 한 명의 천성이 흐물거리며 쑤욱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