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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3(2화)
1장 구천마련(2)
장내의 싸움은 어느새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상황에서 왕추가 태산과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천룡 앞에 섰다.
“크윽…….”
간신히 신형을 유지한 천룡이 신음성을 토해 냈다.
그는 지금 내상 때문에 기혈이 뒤엉켜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이유로 당장에라도 운기조식을 해서 내기를 다스려야 했다.
“아…….”
정파의 무인들이 안타까운 탄성을 흘렸다.
“너무 억울해 말거라. 네놈을 죽이고 나머지 놈들도 모조리 죽일 것이니.”
번들거리는 눈으로 왕추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것이다.
“잘 가거라!”
일성과 함께 양손을 밀어내자 두 개의 묵빛 장영이 천룡을 향했다.
내상을 입은 천룡으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천룡이 있던 자리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안 돼!”
화설련과 영호명, 감석보가 절망에 찬 비명을 질렀다.
다른 정파의 무사들 역시 안타까움에 눈을 감았다.
“어! 저기 좀 봐!”
바로 그때, 감석보가 놀라 외치며 흙먼지 속을 가리켰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감석보의 손가락 끝을 향했다.
“저럴 수가!”
“엇!”
서서히 흙먼지가 걷히며 드러난 광경에 양측 무사들이 눈을 부릅뜬 채 탄성을 토해 냈다.
정체불명의 흑의복면인이 천룡 앞을 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크윽, 대단한 위력이군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는 바로 천성이었다.
숲에서 나오자마자 천룡의 위기를 보고 뛰어들어 막은 것이다.
영력을 최대한 끌어 올려 방어막을 펼쳤음에도 내장이 뒤흔들리는 큰 충격을 받을 정도로 암혼장의 위력은 강력했다.
아직 정면으로 왕추와 같은 초극의 고수와 맞서는 것은 무리인 모양이었다.
양측의 무사들은 갑작스런 천성의 등장에 웅성거렸다.
“오늘 참으로 여러 번 놀라게 되네요.”
제갈수련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왕추의 장강을 물러서지도 않고 막아 낼 만한 고수라면 저자의 경지도 화경―물론 천성은 화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영력의 막을 겹겹이 둘러싼 후 기문으로 여력을 흘려보낸 것뿐이다―이라는 의미.
지금 이 자리에 두 명의 화경고수와 초절정고수가 무려 여섯―마련의 암영대주 역시 초절정이었다―이나 된다는 말이었다.
한곳에서 이토록 많은 고수가 모인 것은 아마도 정마대전 이후 처음일 것이다.
거기다 두 명은 약관 안팎의 어린 나이였다.
왕추와 맞서고 있는 흑의인 또한 목소리를 보아 서른 중반을 넘은 것 같지는 않았다.
‘강호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겠구나.’
제갈수련의 눈빛이 깊어졌다.
“너는…… 운현의!”
왕추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운현의 일이 자신들의 소행임이 드러날까 봐 얼른 입을 닫은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렇게 정파와 맞붙게 된 이상 운현의 일도 벌써 드러났다고 보는 게 맞았다.
“화를 거두시지요. 이 일은 정마 양측을 이간질시키려는 제삼 세력의 소행입니다. 양측이 부딪쳐 또 다른 정마대전의 불씨가 된다면,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꼴밖에는 안 됩니다. 두 세력이 서로 싸워 힘을 소진한다면, 암중 세력은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를 풀게 되겠지요.”
천성이 차분히 왕추를 설득하며 홍의여인 일행을 찾았다.
‘이런!’
하지만 어느새 그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충분히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했다 여기고는 혼전을 틈타 몸을 피한 것이다.
천성이 불안한 마음으로 왕추를 바라보았다.
왕추의 표정은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왕추와 마련 측도 이미 이 일이 홍의여인의 농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정파에 의해 마련의 무사들이 희생되었다.
이대로 그냥 넘어간다면 련의 위상에 큰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마땅한 피의 대가를 받아내야 했다.
“흥, 이미 돌이킬 수 없다! 네놈이 날 막을 수 있다면 물러나 주마!”
짧게 코웃음을 친 왕추가 거침 없이 암혼장을 날렸다.
슈아아악!
정면으로 맞서면 승산이 없음을 파악한 천성은 이내 영안을 열고 영력을 끌어 올렸다.
빠른 움직임으로 왕추를 상대하려는 것이었다.
두 개의 장강이 막 덮치려는 순간, 천성의 신형이 사라졌다.
순간, 왕추가 갑작스레 뒤로 물러서고, 그 자리에 천성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퍼퍼퍼퍽!
“이런 쥐새끼 같은!”
천성의 섬전 같은 권격이 왕추의 오른팔에서 작렬했다.
왕추가 천성의 기척을 느끼고 재빨리 오른팔로 막은 것이다.
한 번에 수십 개의 권영(拳影)이 왕추의 팔을 두드리고 지나갔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양측의 무사들은 어떻게 공방이 이루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정말 빠르군!”
감탄한 왕추의 다리가 땅을 훑었으나 이미 천성은 사라지고 없었다.
권의 위력이 상당했던 탓에 왕추는 오른팔이 욱신거림을 느꼈다.
“흥!”
이대로는 천성의 꼬리만 쫓다 아무것도 못하겠다 생각한 왕추가 다시 사방으로 강기를 날렸다.
“한 번은 걸리겠지!”
퍼퍼퍼퍼펑!
여기저기로 강기의 세례가 몰아쳤다.
그에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무인들이 다시 한 번 혼비백산하여 몸을 피했다.
“크하하하하하하!”
다시 흥이 돋은 왕추가 광소를 토해 냈다.
이렇게 되자 천성도 왕추에게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아졌다.
거기다 다른 이들에게까지 피해가 미치고 있어 함부로 몸을 피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천성이 우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천룡은 멀찍이 물러선 채 운기조식을 취하고, 영호명과 감석보 등 일행이 주위에서 호법을 서고 있었다.
그중에는 자신의 모습으로 변한 채 멀뚱거리고 있는 무숙의 얼굴도 보였다.
한숨 돌린 천성의 시야가 막 서문유란에게 향했을 때였다.
쉬아악!
한 가닥 강기가 서문유란이 있는 곳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싸움의 중심 부근에 위치해 있던 탓에 미처 몸을 멀리 피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순간, 천성은 이를 악물고 영력을 끌어 올렸다.
영안이 최대로 확장되고 사물들이 흐릿해졌다.
무리해서 음속을 넘어선 것이다.
콰쾅!
“큭!”
간신히 서문유란을 향하는 강기를 튕겨 냈으나 충격이 제법 만만치 않았다.
천성의 신형이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고서야 멈춰 섰다.
“놈, 잡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왕추가 수십 발의 탄강을 재차 천성에게 날렸다.
천성의 눈에 창백하게 굳어 있는 서문유란의 모습이 보였다.
만약 자신이 몸을 피한다면 서문유란이 강기 세례를 고스란히 받게 될 것이다.
‘젠장!’
이를 악문 천성이 기문을 최대한 열었다.
빛의 고리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주변의 자연지기를 삼켰다.
슈우우우우욱!
순간, 대기가 빨려 들어가듯 천성을 중심으로 공간이 회오리쳤다.
천성은 정신을 집중하여 전보다 더욱 커진 기문을 통해 형성된 상당한 양의 영력을 전면으로 향하게 했다.
고오오오오!
곧이어 천성의 앞에 두께가 이 장이 넘는 거대한 영력의 방어막이 형성되었다.
터터터텅!
강기가 방어막에 부딪쳐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왕추의 강기 세례는 그칠 줄을 몰랐다.
천성이 기문을 한계까지 회전시키며 버티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강기의 위력이 방어막을 잠식해 나갔다.
천성이 끌어들이는 자연지기의 양보다 왕추가 쏘아 낸 강기의 위력이 훨씬 강력했기 때문이다.
“끄응…….”
미간에 내천자를 그린 천성이 침음성을 토해 냈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이미 서문유란은 다른 곳으로 물러난 상태였지만, 방어막을 해제하고 몸을 빼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응?’
그때, 백 장 밖에서 이백여 명이 넘는 인원이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영안에 잡혔다.
자세히 보니 무당의 도사들이 섞여 있었다.
아마도 무림맹의 지원 세력인 듯했다.
“영감님, 지금쯤 영감님도 아실 테지만, 무림맹의 지원 세력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오고 나면 빠져나갈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의 희생은 무의미하니, 어서 피하십시오! 크윽!”
천성이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로 왕추에게 외쳤다.
“흥! 다 죽여 버리면 그만!”
왕추가 코웃음 쳤다.
“물론 영감님이야 저들을 다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머지 마련의 무사들은 모두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얼굴을 찡그린 왕추가 잠시 멈칫했다.
“왕 호법님,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도록 하시지요. 이 일에대한 대가는 나중에 배로 갚아 주면 됩니다.”
혁련무광 또한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림맹의 지원이 오면 쉽사리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중에는 무당파의 고수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만일 무당이 보유한 두 명의 화경고수 중 하나가 함께하고 있다면 왕추로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크으, 두고 보자. 너희 놈들은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소공자인 혁련무광까지 나서자 왕추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혁련무광을 비롯한 마련의 무사들이 재빠르게 숲을 빠져나갔다.
위기를 넘겼음을 확인한 천성도 그들을 따라 잽싸게 몸을 뺐다.
왕추의 신위를 확인한 정파 일행은 감히 쫓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정파 일행은 이번 일로 피해가 막심했다.
무려 열한 명의 후기지수와 다섯 명의 고수가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인원 대부분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다섯은 상당한 중상이어서 생사가 불분명했는데, 그중에는 왕추의 장강에 맞섰던 무당 도사 한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천룡 역시 상당한 내상을 입어 들끓는 기혈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다행히 며칠 정양하면 회복할 정도였지만, 마지막에 흑의인이 돕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천룡 공자, 괜찮소?”
감석보와 일행이 달려와 천룡의 상태를 물었다.
천룡의 몸이 온통 피투성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만다행하게도 외상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무당 도사 두 명의 도움으로 강기의 위력을 많이 감소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휴, 다행히도 치명상은 면했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어느 정도 운기조식을 마친 청룡이 일어나 일행을 안심시켰다.
아직 기혈이 불안정했으나 이곳보다는 안전한 자리로 옮겨 제대로 운기조식을 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다행이군요.”
일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괜찮아?”
그때, 영호명이 한쪽에 서 있던 천성―무숙의 분신―에게 다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암영단의 무공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기에 문득 천성의 안위가 걱정되던 것이다.
[헉, 어쩐다? 천성이가 돌아올 때까지 버텨야 되는데.]
무숙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천성―무숙―이 아무 대답도 없이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자 영호명은 혹시 전투 중에 머리라도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아무래도 다친 모양이구나. 어디 한 번 보자.”
영호명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무숙이 깜짝 놀라 고개와 양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일각이 다 되어 가는데, 천성이 이놈은 어디 있는 거야!]
다급해진 무숙이 허둥대고 있을 때, 천성의 심령음이 들려왔다.
‘숲으로 들어오세요.’
무숙이 이때다 하며 뒷걸음질쳐서 재빨리 숲으로 도망쳤다.
“저 녀석이 왜 저러는 거야? 정말 머리를 다친 건가?”
영호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천성을 쫓았다.
무숙은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 기다리던 천성과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