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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3(3화)
1장 구천마련(3)


슈우우욱!
마치 호리병에 연기가 빨려 들어가듯 천성의 몸 안으로 순식간에 사라진 무숙.
그런 뒤, 아무 일도 없던 듯 시치미를 떼고는 천성이 숲에서 빠져나왔다.
“험. 명아, 나는 멀쩡하다! 하핫, 이 몸이 이래 봬도 경공만큼은 자신 있거든. 놈들을 약 올리며 잘 도망 다녀서 상처 하나 없다구. 하하하!”
천성은 과장되게 큰소리로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한데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리 도망간 거야?”
“네, 네가 갑자기 달려드니 놀라서 그랬지.”
천성이 식은땀을 흘렸다.
좌측 숲에서 이백여 명의 무사들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앞가슴에 백호의 문양을 수놓은 무복을 입은 자들.
바로 무림맹 백호단이었다.
후기지수들의 안전을 위해 무림맹에서 파견한 지원 전력이 때마침 도착한 것이다.
그 뒤로는 다섯 명의 도사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기도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 최소한 장로 급에 해당하는 고수들이 분명했다.
영호명의 시선이 무림맹 무사들에게 향하자 무숙과 천성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에휴, 십 년 감수했다.]
‘그러게요.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겠어요.’
그때, 무림맹 무사들의 수장인 듯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무림맹 백호단주 홍석태라 하오. 우리는 천하영웅대회에 참가하는 후기지수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해치려 하는 무리들을 제압해 압송하라는 맹주의 명을 받고 왔소! 마교의 고수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데, 어찌 된 일이오?”
“놈들은 방금 서쪽 숲으로 도망쳤소.”
어깨에 상처를 입은 팽가의 중년 고수가 홍석태에게 마련의 무사들이 도망친 방향을 알려 줬다.
한쪽에서 부상을 추스르던 유운이 홍석태와 함께 온 도사들을 발견하고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인사했다.
“크윽, 사부님께서 직접 내려오셨군요.”
“되었다. 부상이 심한 것 같은데, 몸부터 살피거라.”
도사들 중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유운을 말렸다.
유운의 사부라면 적어도 나이가 육십이 넘었을 것인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하다 생각할 것이, 그가 바로 무당이 자랑하는 두 명의 화경고수 중 한 명인 일수파산(一手破山) 태허였기 때문이다.
그는 십단금(十段錦)을 극성으로 수련한 면장의 달인이자 현 강호십대고수 중 한 명으로, 이미 일흔이 넘은 지 오래였다.
성격이 불같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통에 수많은 사파와 마련의 인물들이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 성격 탓에 오늘도 마인들이 나타났다는 말에 모든 일을 젖혀 두고 따라나선 것이다.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 중 화경의 고수가 있어서 상당히 고전했습니다. 아마도 백호단만으로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것입니다.”
제갈가의 인솔자인 제갈문성이 반가운 목소리로 태허를 맞이했다.
제갈문성은 전대 제갈세가주의 동생으로 태허와 안면이 있던 것이다.
“그래? 화경고수까지 왔다면 보통 일이 아닌데…….”
태허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로서는 후기지수들이 천하영웅대회에 참여하는 걸 막기 위해 화경의 고수까지 나섰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암살대나 몇 명의 고수로 매복 공격을 하면 그 효과가 클 것인데, 무엇하러 화경고수가 드러내 놓고 이곳까지 나타난단 말인가.
‘일단은 잡아 놓고 심문해 봐야겠군.’
생각을 접고 일행의 상태를 살피던 태허의 눈에 문득 이채가 떠올랐다.
천룡을 발견한 것이다.
“응? 너는 누구냐?”
호기심 어린 얼굴로 태허가 물었다.
천룡의 기도가 초절정을 훌쩍 넘어섰음을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삼선께 사사한 감숙 철혈문의 궁천룡이라 합니다. 욱!”
천룡 역시 태허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눈치채고 재빨리 인사했다.
하지만 이내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왕추에게 입은 내상으로 인해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 무당의 태허라 한다.”
그때까지 중년 도사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사람들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상당한 거물이 등장한 것이다.

“삼선의 제자라고? 그분들이 진정 괴물을 만들어 냈구나. 지금은 우선 마교 놈들을 추적하는 것이 급하니, 나중에 한 번 제대로 말을 나누자꾸나.”
천룡은 정중히 포권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화산의 매화신검처럼 태허 또한 자신을 곤란하게 하지 않을까 내심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지. 십대고수라면 이렇게 현기가 넘치고 진중한 맛이 있어야 후배들의 모범이 되는 법이지.’
순간, 천룡의 머릿속에 태허 진인은 본받을 만한 어르신으로 자리 잡은 반면, 매화신검은 피해야 할 노인네로 각인되었다.
천룡과 잠시 인사를 나눈 태허는 곧 홍석태가 이끄는 백호대와 함께 마련의 인물들을 추격해 갔다.
그들이 떠나가자 장내에는 운현 지부 인원들만이 남았다.
“저는 무림맹 운현 지부 지부장인 임승이라 합니다. 부상자들의 안위도 살피고, 또 다른 습격에도 대비해야 하니 일단 모두 저희 지부로 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태로 여행을 강행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무리였다.
결국 천성 일행은 운현 지부로 향했다.

“유란아! 수련아!”
제갈수련과 서문유란을 발견한 화설련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혼전 중에 정신이 없어 두 사람의 안위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련아!”
두 사람 역시 기쁘게 화설련을 맞았다.
“한데 함께 계신 분들은?”
잔뜩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제갈수련이 물었다.
“아, 천하영웅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함께 온 일행이야.”
화설련이 제갈수련과 서문유란을 천룡 일행에게 인사시켰다.
“오, 지봉 제갈 소저를 이렇게 직접 뵙다니, 영광입니다. 핫핫!”
감석보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철혈문의 궁천룡이라 합니다.”
담백한 말투로 자신을 소개하는 천룡을 제갈수련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약관도 안 된 초절정의 고수라니, 참으로 놀라운 인재였다.
“수련아, 천룡 공자 얼굴에 구멍 나겠다.”
제갈수련이 신기한 물건이라도 접하는 듯 천룡을 빤히 쳐다보자 화설련이 눈치를 줬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워낙에 호기심이 많은지라.”
제갈수련이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고 얼굴을 붉혔다.
서문유란은 냉랭한 표정으로 천룡에게 포권했다.
암영단 무사와의 대결에 천룡이 끼어든 일로 아직 감정이 좋지 않은 탓이었다.
사실 천룡의 입장에서는 이유를 알 리가 없고, 안다 해도 상당히 억울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문유란은 천룡이 자신을 무사가 아닌 여자로 생각해 보호한 것이라 여겨 자존심이 상한 상태였다.
어찌 보면 천룡의 뛰어난 실력에 대해 자격지심을 느낀 탓도 있었다.
한편, 천성은 서문유란이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서문유란에게 있어 자신은 딱 그 정도의 존재인 것이다.
한번 보고 잊어버리는 존재.
아무런 감흥도, 아무런 느낌이나 흥미도 주지 못하는.
사실 예전의 자신은 바로 그런 위치에 있었다.
거기다 평범한 체격에 별로 잘나지 못한 외모까지, 어디 하나 기억해 낼 만한 특별한 구석이라곤 없는 것이다.
[너무 실망 말거라, 내게는 니가 가장 멋져 보이는구나.]
‘무숙과 결혼이라도 할까요?’
[…….]
자조 섞인 썰렁한 농담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천성이었다.

* * *

운현 지부에 도착한 일행은 일단 몸을 추스르고 부상을 치료하는 데 주력했다.
앞으로의 여정에서 또 다른 습격이 있을 수도 있기에 몸을 최상의 상태로 회복한 후 다시 길을 떠나는 편이 안전했다.
운현 지부에 도착한 지 닷새째 날, 임승은 일행들을 회의실로 불러 마련과의 일을 상세히 물었다.
그간의 상황을 무림맹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운현에서 망신을 당한 양도문의 무리들도 보였다.
무림맹에서 볼 땐 그들 역시 마련의 피해자였으니 함께 자리를 한 것이다.
“그럼 그 흑의인의 정체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임승이 천성의 정체를 물었다.
“흠, 우리를 도와주었으니 아마도 같은 정파의 인물이 아닐까요?”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유운이 확실치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소립니까? 처음 그들이 나눈 대화를 들어 보면 서로 아는 사이가 분명합니다! 거기다가 마교의 무사들에게 무림맹 지원 세력의 도착을 미리 알리기도 했지 않습니까!”
팽가의 장로 팽무량이 어이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땐 우리가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희생을 줄이기 위한 선택 아니었을까요? 어차피 마련의 고수도 무림맹이 오고 있음을 알았을 거예요. 만일 그들이 물러나지 않고 계속 싸웠다면 지원군이 오기까지 우리 중 몇 명이나 살아남았을까요?”
제갈수련이 팽무량의 말을 반박했다.
“흥! 그자는 분명 마교 놈들과 한패요! 운현에서도 마교도들을 풀어주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거기다 우리 양도문 무사들에게 상해를 입히기까지 했단 말이오!”
이번에 나선 것은 양도문의 소공자 진용화였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치부를 깨닫지 못하고 천성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하고 있었다.
[저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저걸 그냥 확! 그때, 이빨을 모두 뽑아 말을 못하게 만들어 버릴 걸 그랬군요.’
천성은 당장에라도 패대기쳐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운현의 흑의인과 이번에 나타난 흑의인이 동일 인물이라 보시오?”
그러는 사이, 임승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번개 같은 속도에 큰 덩치. 그자가 분명하오.”
진용화가 확신에 찬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가 우릴 위기에서 구한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닌가요?”
이번엔 화설련이 흑의인을 변호했다.
“어쨌든 마교도들을 도운 것은 중죄입니다!”
임승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들은 무공도 모르는 그저 평범한 아이와 여인들이었습니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영호명이 따졌다.
“무림맹의 공식적인 입장은 그 어떤 경우에도 마교도들을 용서할 수 없고, 그들을 돕는 자 또한 똑같이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임승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천룡과 일행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괜히 잘못 이야기했다간 자신들마저 마교도로 몰릴 판이었다.
그때, 좌중의 분위기를 살핀 임승이 결론을 내리듯 말을 맺었다.
“모든 정황으로 볼 때, 흑의인은 상당히 위험한 인물인 듯하군요.”
‘허, 어떻게 저런 결론이 나오는 거야?’
천성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모두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한데, 단지 마교도를 구했다는 이유로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힌 것이다.
‘이건 무슨 아이들 편 가르기도 아니고.’
그러거나 말거나 임승은 무림맹에 반드시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 마음먹었다.
화경고수와 맞서는―물론 같은 편끼리 연극을 했다 생각했지만―실력의 정체불명의 고수라…….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