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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3(4화)
2장 철혈문의 위기(1)
다음 날, 천하영웅대회 참가자들은 다시 길을 나섰다.
하지만 처음 출발했을 때에 비해 인원이 상당히 줄어 있었다.
팽가와 제갈세가, 무당파를 제외한 후기지수들은 마련의 무사들에게 대부분 목숨을 잃었고, 심한 부상을 당한 이들 또한 운현에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대신 운현 지부의 무사 오십 명이 호위를 위해 따라 나섰다.
혹시라도 있을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여행이 계속되는 동안 천성은 서문유란을 서너 번 힐끔거리다 결국 포기해 버렸다.
역시 자신과는 다른 세상의 여인인 것 같았다.
한편, 제갈수련의 관심은 온통 천룡에게 쏠려 있었다.
이성으로서 관심을 가진다기보다는 천룡의 실력과 정체에 대해 흥미가 일었기 때문이다.
화설련과 감세령은 그런 제갈수련을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룡은 제갈수련의 궁금증에 답해 주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제갈수련은 화설련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화설련이 화려한 장미라면 제갈수련은 청초하게 핀 한 떨기 수선화 같은 여인이었다.
천룡이 두 사람 중 누굴 자신의 부인으로 삼을까 행복한 상상을 하는 동안 어느덧 일행은 수주(隨州)에 이르렀다.
수주에 도착한 일행은 양호객잔이란 곳에 여장을 풀었다.
몸을 씻고 짐을 정리한 일행은 일층 식당에 모여 서로 인사도 할 겸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
어차피 대부분 천하영웅대회의 참가하는 후기지수들이다 보니 이런 기회에 안면을 트는 것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팽가에서는 팽만호와 팽인호, 두 명의 청년이 대표로 참가하고 있었고, 팽가의 장로인 팽무량과 팽무진 형제가 인솔하고 있었다.
겁도 없이 왕추에게 덤벼든 팽연호는 혁련무광에게 당한 부상이 심해 운현에 남겨졌다.
목숨을 건진 것이 그나마 다행일 정도였다.
제갈세가에서는 제갈규와 제갈혁, 제갈수련이 대표로 참가하고 있었는데, 경험을 쌓기 위해 열 명이 넘는 청년들을 함께 보냈다.
제갈문성이 이들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절정 후반에 이른 상당한 고수였다.
함께 인솔자로 참가했던 제갈문혁은 마련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무당에서는 오룡 중 한 명인 청명을 비롯 청수, 청오가 참가하였고, 유운, 유성, 유덕, 세 명의 무당칠자가 함께하고 있었다.
유덕 진인은 왕추와의 격돌에서 큰 상처를 입고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해서 운현 지부에서 새로 합류한 유성 진인이 이들을 인솔하고 있었다.
함께하던 중소 문파의 제자들은 구천마련과의 다툼 중에 대부분 죽고, 섬서에 위치한 협의문의 소공자인 백담만이 홀로 살아남았다.
운도 좋았지만 중소 문파 출신치고는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현 지부장 임승은 여러 후기지수들과 친해지려 무척 애를 썼다.
이들이 결국은 무림맹의 중추가 될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운현 지부장 자리를 오래도록 보전하려면 두루두루 인맥을 넓혀 놓는 것이 좋았다.
무당, 그리고 제갈세가의 세력과 가까이 위치한 운현 지부의 위치상 지부장 자리는 능력보다는 문제를 만들지 않고 대문파들과 무림맹의 연락책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자가 필요했다.
임승은 무공도 부족하고 어리석은 인물이었으나, 대인관계나 처세술에 있어서는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는 자였다.
무림맹에서도 그런 특성을 감안해 임승을 운현 지부에 앉혔고, 지금도 어김없이 그의 처세술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후기지수들에게 고개 숙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모습은 일견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야말로 임승을 지금의 자리에 이르도록 만든 핵심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후기지수들의 관심은 자연 천룡에게 집중되었다.
사실 그들에게는 천룡의 존재 자체가 충격이었다.
다들 문파 내에서는 내로라하는 인재들이었는데, 갑자기 넘기 힘든 벽이 떡하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질투도 비슷한 급이어야 가능했다.
순식간에 천룡은 후기지수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형의 위상이 높아지자 천성도 덩달아 어깨가 으쓱해졌다.
변두리 문파에 불과한 철혈문이 쟁쟁한 문파의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날도 머지않은 것이다.
아니,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이르러 있었다.
“실로 놀랍군요. 어떤 수련을 했기에 그토록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 건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무당의 후기지수이자 오룡의 한 명인 청명이 애늙은이 같은 말투로 천룡에게 물었다.
“하하하, 아직 많이 모자란 저를 좋게 봐주시니 너무 부끄럽습니다. 다 스승님들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이지요. 저의 자질이 모자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음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후기지수들의 찬사에 입이 찢어진 천룡이 겸양의 말을 늘어놓았다.
하나 그게 맞는 말이기도 한 것이, 지금 천룡의 경지는 처음 삼선이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현재의 실력도 상당히 놀랍기는 했지만, 마련의 소공자인 혁련무광이나 현 무림맹주의 손자인 남궁인 역시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물론 같은 초절정이라 하여도 실력의 차는 어느 정도 존재했으나, 압도적인 수준은 아닌 것이다.
“흥, 천룡 공자께선 참으로 겸손하시군요.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이 상처받을까 봐 마음을 써 주시는 건가요?”
그때, 옆에서 사람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서문유란이 독한 분주 한 잔을 비우고는 비꼬는 투로 천룡에게 말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천룡은 당황했다.
그녀의 말속에 왠지 가시가 돋쳐 있었기 때문이다.
천룡은 혹시라도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은 아닌지 곰곰이 기억을 더듬으며 황급히 변명을 했다.
“아,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절대 아니니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천룡이 서문유란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어찌 되었든 여인과 다투는 것은 옳지 못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당신은 실력이 높아 좋겠군요. 쉽게 사과하고 쉽게 고개 숙여도 아무도 무시하지 않으니!”
이제는 거의 시비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유란아, 갑자기 왜 그래? 천룡 공자는 우릴 구해 주신 분이야!”
화설련과 제갈수련이 당혹스러워하며 서문유란을 말렸다.
서문유란도 자신이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현실에 화가 났던 것이다.
그녀는 이미 절정을 넘어선 고수였다.
오룡에 미치진 못하지만 후기지수 중에 최상위에 속하는 고수인 것이다.
그런 그녀였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항상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고, 가문에서의 위치도 애매했다.
주변 사람들은 항상 그녀를 한 사람의 무인으로 보기보단 여인답지 못한 별종이라 생각했다.
가족들 역시 그녀가 무공 수련보다는 좋은 가문의 후계자와 혼인을 하는 것에 신경을 쓰길 바랐다.
어디 그뿐인가.
이번 천하영웅대회도 그랬다.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대표로 뽑히지 못해서 개인적으로 참가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이 모든 편견에 맞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실력으로 보여 주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이번 천하영웅대회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떳떳하게 무인의 길을 가겠다 결심한 그녀였다.
한데 그런 그녀 앞에 천룡이라는 단단한 벽이 갑자기 나타났다.
간신히 버티던 그녀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진 서문유란은 남자들도 여간해서는 한 번에 마시지 못하는 독한 분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서문 소저, 천천히 드시지요.”
천룡이 곤란한 표정으로 서문유란을 말렸다.
괜히 자신이 죄를 지은 듯한 느낌이었다.
“흥! 여자이니 술도 못 마실 거라 생각하시나요? 우리 내기할까요? 당신과 나, 둘 중에 누가 더 주량이 센지?”
코웃음을 치며 서문유란이 천룡을 쏘아붙였다.
“아, 아닙니다. 전 주량이 그닥 세지 못해서 서문 소저를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천룡이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설마, 여자와는 술 시합을 하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서문유란의 눈꼬리가 치켜올라 갔다.
천룡은 실로 난감했다.
사실 그는 그다지 술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괜히 서문유란에게 말려 술 시합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서문유란이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할 테니 거부하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천룡은 어쩔 수 없이 잔을 들었다.
“하, 하…… 그럼 미흡하지만 한 번 마셔 보겠습니다.”
천룡이 승낙을 하자 후기지수들이 환호를 했다.
그들로서는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긴 것이다.
한술 더 뜬 감석보는 후기지수들을 부추겨 아예 내기까지 걸었다.
[저 아이는 성질이 왜 저 모양이냐?]
서문유란의 억지가 못마땅한 듯 무숙이 말했다.
천성에게도 서문유란의 이런 모습은 새로웠다.
하지만 화내는 모습, 술을 마시는 모습까지도 천성의 눈엔 아름답고 처연하게 느껴졌다.
[쯧쯧, 이런 얼빠진 놈 같으니라고.]
눈이 돌아간 천성의 모습에 한심하다는 듯 무숙이 투덜거렸다.
모두들 잔뜩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시합은 어이없게 끝나 버렸다.
서문유란도, 천룡도 주량이 별로 세지 않던 것이다.
채 다섯 잔도 마시기 전에 두 사람 모두 식탁에 코를 박고 쓰러졌다.
“내애―가 여―어자인 게 무―어가 어―뛔서어!”
쓰러진 서문유란이 잠꼬대를 했다.
“대애체 왜 나한퉤 화롤 내애―눈― 건―데!”
마주 쓰러진 천룡도 뒤지지 않았다.
일행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각자 방으로 옮겼다.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천성이 씁쓸한 표정으로 영호명과 함께 방으로 향했다.
이렇게 양호객잔에서의 첫 모임은 천룡과 서문유란의 내기로 인해 모두의 화젯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