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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3(5화)
2장 철혈문의 위기(2)


회천궁(回天宮).
치우 일족의 수장, 천황(天皇) 용천광과 구공을 비롯한 수뇌부들이 대전 가운데에서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한데 그때, 대전의 문이 열리며 환사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천황! 섬응이 깨어났습니다!”
그 말에 용천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이냐! 허허, 다행이구나!”
의원들마저 생사를 장담하지 못한 섬응.
그가 무려 한 달 만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이제 위기는 넘겼다 합니다. 얼마간 요양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팔신 모두 자신이 직접 가르친 아이들이 아닌가.
섬응의 회복은 용천광의 마음의 짐을 한결 덜어주었다.
“한데 섬응이 말한 내용 중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용천광이 의아한 표정으로 환사를 바라보았다.
“화산의 일에 선검문의 흑의인이 개입했다 합니다. 음후를 죽게 만든 것도 그자라 합니다!”
순간, 용천광의 눈에서 혈광이 일었다.
“대체 그놈의 정체가 무엇인데 우리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것이냐! 거기다 어찌 알고 화산에 나타났단 말이냐!”
이제야 음후가 죽고 섬응이 부상당한 것이 이해가 갔다.
흑의인이 열쇠의 수호자를 도운 것이다.
전력을 충분히 갖추고도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놈은 분명 신농의 일족은 아니었다.
그들은 열쇠 근처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력을 쓸 수 없는 황제의 졸개는 더더욱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던 흑의인에 의해 팔신 중 하나인 음후가 죽고, 섬응은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이번에야 섬응의 기지로 인해 임무를 완수했으나, 다음번에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경우 열쇠를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무시하지 못할 장애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흑의인이 등장한 곳엔 항시 천룡이라는 녀석의 일행이 함께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선검문과 화산, 그리고 얼마 전 운현까지. 마지막으로 최근 풍마와 화웅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이 구천마련을 상대할 때도 흑의인과 그들 일행이 동시에 나타났다 합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도 공교로웠다.
“분명 둘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구나! 혹시 놈들 중 한 명이 흑의인인 것은 아니냐?”
천룡 일행이 가는 곳에 흑의인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들 중 한명이 흑의인일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천룡이라는 자를 감시하던 우리 측 대원들의 보고로는 흑의인이 등장할 때, 일행 중 사라진 자가 없었다 합니다.”
다행히도 무숙이 천성의 대역을 멋지게 소화해 내는 바람에 천성은 의심을 비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중 하나군. 일행과 관련이 있는 자가 뒤를 봐주고 있거나, 아니면 그저 우연히 동선이 겹쳤을 뿐이란 말인데…….”
용천광은 생각에 잠겼다.
우연이든 아니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움직여야 뒤탈이 없다.
그렇다면 일단 흑의인이 천룡 일행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옳았다.
그때, 한쪽에서 환사의 보고를 경청하고 있던 구공이 입을 열었다.
“선검문에서 부터 함께한 일행이라면 철혈문의 그 아이와 대연문의 감씨 남매뿐입니다. 아무래도 두 문파 중 하나와 관계가 있을 확률이 높지요. 그들의 문파를 건드려 본다면 보다 확실히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구공의 말에 용천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들의 예상대로 흑의인이 일행과 관련이 있다면, 두 문파의 위험에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흑의인이나 그가 속한 조직이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과연 그렇겠군. 이제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놈을 그냥 놔두고 대업을 진행하기엔 너무 위험해.”
용천광이 잠시 호흡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좋겠나?”
“어차피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양 문파를 모두 쓸어버리는 방법 아니겠습니까? 양 문파를 공격한 후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놈이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순간, 용천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인질를 잡는 짓 따위는 전사 일족인 치우의 방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 모든 걸 버리기로 맹세한 그가 이제 와서 깨끗하고 고고한 척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헌원 일족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진흙탕을 뒹군다 해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좋네. 자네가 맡아서 이번 일을 처리해 주게.”
고민 끝에 용천광이 허락을 했다.
“존명!”
구공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대전을 물러났다.
“마련과의 일은 잘되었다고?”
“네. 마교의 부군사 중 하나인 종리벽이 죽었고,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상당수 목숨을 잃었습니다. 양측 모두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지요.”
환사가 대답했다.
“그 정도면 헌원 일족의 시선을 당분간 붙잡아 둘 수 있겠군.”
용천광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 * *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 서문유란과 천룡은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제의 일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직감했다.
다른 사람 보기가 민망했던 두 사람은 방에서 두문불출하며 아침식사도 따로 했다.
다시 길을 나선 후 천룡과 서문유란은 무한에 도착하기까지 어색하게 서로를 외면했다.
사실 서문유란도 천룡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답답한 상황으로 인해 쌓인 울화를 천룡에게 푼 것뿐이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선뜻 사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천룡은 천룡대로 혹시나 자신이 술 먹고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괜히 자신 때문에 서문유란이 화가 난 건 아닌지 알 수 없어 속으로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천성은 두 사람의 어색한 동행에 내심 답답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사촌 형이고, 한 사람은 자신이 첫눈에 반해 버린 여인이었다.
한데 두 사람의 관계가 껄끄러운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든 풀어주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화설련과 제갈수련은 여행 내내 서문유란과 천룡을 놀렸다.
그녀들은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생긴 것이 몹시도 즐거운 듯했다.
감석보도 뒤지지 않고 둘을 거들었다.
오로지 감세령만이 천룡의 편에 서서 애써 변호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어쨌든 별다른 사건 없이 일행은 무한에 다다를 수 있었다.
호북 최대의 도시답게 활기가 넘치는 무한은 무림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아마도 얼마 남지 않은 천하영웅대회에 참여하거나 구경하기 위해 온 자들일 것이다.
객잔들도 손님이 넘쳐 나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무한에 들어선 뒤 일행은 다시 나뉘었다.
구파일방이나 명문세가들은 무림맹 내에 숙소가 배정되어 있었지만, 천성 일행은 따로 숙소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세 사람이 천성 일행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제갈수련과 서문유란, 그리고 무당의 청명이었다.
가문의 허락 없이 출전한 서문유란은 맹 내로 들어가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이고, 제갈수련과 청명은 웃어른들께 간청해 천성 일행과 함께하게 된 것이다.
청명은 천룡에 대한 관심으로 일행을 따르게 되었고, 제갈수련은 서문유란, 화설련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가문의 어른들과 헤어진 일행은 잔뜩 들떠서 무한 시내를 활보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수련에 할애하느라 평상시에는 이런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며칠 동안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쉴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 취선루라는 곳이 제법 유명하다 들었소. 그리로 갑시다!”
감석보가 일행을 끌고 번화한 도심으로 향했다.
취선루는 요리와 고급스러운 시설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한꺼번에 천 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크기로도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탓에 만만치 않은 가격임에도 취선루는 무한에서 가장 손님이 많은 곳이기도 했다.
“핫핫핫! 대로를 걸어 쭉 가면 바로 찾을 수 있다더니, 듣던 대로군!”
감석보가 취선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걸음에 속도를 냈다.
천성과 천룡은 취선루의 규모와 웅장함에 놀라 눈을 놀리기 바빴다.
강호 경험이 없는 영호명 역시 얼이 빠져서 취선루를 바라보았다.
“호호. 사제, 남들이 촌놈이라고 놀리겠어, 입 좀 다물어.”
화설련이 영호명을 놀렸다.
그러자 덩달아 찔린 천룡과 천성이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화설련이나 제갈수련, 서문유란은 강호 이곳저곳을 제법 많이 여행했기에 취선루에도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들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입구로 다가가자 정갈한 차림의 잘생긴 점원들이 공손하게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천성일행이 입구에 들어서자 두 줄로 선 여섯 명의 남녀 종업원이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천성은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 머리를 긁적거렸다.
마치 자신이 왕이나 명문가의 자제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식사만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숙박을 하시겠습니까?”
입구 바로 앞 계산대에서 곱게 생긴 여점원이 정중히 물었다.
“우선 방을 잡아 주고, 식사도 준비해 주시오.”
“지금 방이 다 차서 별채의 특실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곳으로 정하시겠습니까?”
종업원의 물음에 감석보는 고민하지 않고 단번에 승낙하며 셈을 치렀다.
아무리 특실이라지만 하루 숙박비가 무려 은자 닷 냥이나 한다는 종업원의 말에 천룡과 천성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그 비싼 방을 네 개씩이나 얻은 감석보의 씀씀이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예인아, 공자님과 일행분들을 특실로 안내하거라.”
예인이라 불린 귀여운 소녀가 일행을 안내해 이층으로 오를 때였다.
“어, 설련 소저 아니신가!”
이층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몇 명의 젊은이 중 하나가 화설련에게 아는 체를 했다.
“어머, 남궁 오라버니!”
화설련 또한 밝게 웃으며 청년에게 아는 체했다.
그는 바로 오룡 중 제일이라 불리는 창천소룡(蒼天小龍) 남궁인이었다.

* * *

감숙성 숭신 외곽 지역.
어둠 속에서 스물한 명의 흑의인이 철혈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특이하게도 용의 머리 모양 가면을 쓴 자가 묘한 기세를 풍기며 서 있었다.
용천광의 명으로 철혈문을 치기 위해 움직인 치우 일족의 전사들이었다.
용가면사내는 뇌룡이라 불리는 자로, 팔신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팔신은 모두 동물 모양의 가면을 쓰고 한 가지씩의 기운을 다룰 수 있었는데, 뇌룡은 뇌전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무서운 자였다.
뇌룡은 서늘한 눈빛으로 잠시 철혈문을 바라보았다.
“문주와 가족들은 사로잡고 그 외에 저항하는 자는 모두 죽여라! 쳐라!”
명이 떨어지자 흑의인들의 신형이 철혈문을 향해 섬전처럼 움직였다.
“어디서 오신 손님들인가. 얼굴을 감춘 것을 보아하니 좋은 뜻으로 온 것은 아닌 듯하구나!”
그때, 갑자기 사방을 진동하는 목소리가 흑의인들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웬 놈이냐!”
긴장한 채 주변을 살피는 흑의인들 앞으로 세 명의 노인이 깃털처럼 표홀히 떨어져 내렸다.
바로 삼선이었다.
천룡을 홀로 보낸 후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세 스승이 뒤따라 하산을 한 것인데, 마침 철혈문에 천룡의 행적을 묻기 위해 들렀다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치우 일족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얼핏 보아도 세 노인의 기세가 범상치 않음에 흑의인들은 바짝 긴장을 했다.
“쳐라!”
그때, 뇌룡이 흑의인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어차피 방해자라면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스무 명의 흑의인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감히!”
앞으로 나선 무지가 일갈하며 기세를 끌어 올렸다.
흑의인들의 실력은 상당했으나 무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지의 양손이 원을 그리는 순간, 흑의인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이런 고수들이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인가!’
뇌룡은 삼선의 무위에 당황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철혈문 정도면 흑의인 두 명만으로도 쓸어버릴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자신이 직접 스무 명이나 되는 흑의인을 이끌고 왔다.
넘치고도 넘치는 전력이었다.
한데, 의외의 복병이 등장한 것이다.
사실 삼선의 경지는 강호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높았다.
무지와 도연은 화경을 넘어선 지 오래였으며, 검치는 현경을 넘어선 절대고수였다.
“물러나라! 내가 상대하겠다!”
허리에 매달린 채찍을 뽑아 든 뇌룡이 영력을 끌어 올렸다.
순간, 뇌룡의 온몸에서 뇌전이 일어났다.
츠즈즛!
뇌전이 채찍을 휘감고 줄기줄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눈을 부릅뜬 무지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놈! 괴이한 힘을 사용하는구나!”
코웃음을 친 뇌룡이 채찍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