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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심장기사단 1 (16화)
제7화 스피릿 비스트(2)


“으으으!”
“으헉!”
바닥에 뒤덮인 시체 더미에 경악하고 말았다. 촌장을 비롯하여 몇몇은 대경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에서 좁은 목책 문을 통해, 높은 뜰에 올라서 고개를 빼고서 겨우 내다보는 것에는 시야에 한계가 있었다.
목책 밖에서 가스파르가 베간커의 사병들을 처치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는 있었고, 언뜻언뜻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죽어 가는 모습도 봤다.
하지만 막연했었다.
겨우 열 명이 조금 넘는 인원. 거기에 대부분이 여자이고 임산부와 어린아이까지 낀 가스파르 일당이었다.
그런 그들이 베간커의 기사와 사병, 그리고 용병을 몰살시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설마설마하는 괴리감만 들었었다.
아니, 난생 처음 보는 스피릿 비스트가 주는 신비감에 현혹되어서 그것들이 잔혹한 살인 도구라는 것조차 망각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무리 들벅 마을을 몰살시키려고 출동한 병사들이라고 해도 250이 넘는 시체를 보자 그 참혹함에 사고가 딱 정지 돼버렸고 다리가 후들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바탕 꿈을 꾼 것만 같이 황당무계했다.
몇 명이 더 땅바닥에 주저앉았고, 토악질을 하는 사람들도 발생하였다.
마을을 수호하는 자경단 대장답게 가장 먼저 정신을 수습한 장크가 유크에게 말했다.
“유크. 들어가서 여자들과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해라.”
출입구에 이르자마자 너무나 경악한 나머지 절로 발이 멈춰 있었다. 그 때문에 입구를 가로막는 상황이 되었는데 지금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예, 아버지.”
유크는 비칠거리는 걸음으로 도로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장크가 다시 두 아들들의 이름을 불렀다.
“한크, 두크. 문을 닫아라.”
“예에… 아부지.”

가스파르가 마을 중앙으로 돌아와 보니 빅브래드가 막 엔젤을 삼키고 있던 참이었다.
녀석은 돌아오는 일행을 보고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필!’이란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그때 무언가 가스파르의 옆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찰나 번쩍이는 은빛 광선이 엔젤을 목구멍으로 넘기려고 고개를 쳐든 빅브래드의 목덜미에 박혀들었다.
푹!
키아아아아악!
빅브래드의 아가리에서 침 범벅이 된 엔젤이 허공으로 쏘아졌다.
꾸어엉!
털퍼덕!
허공을 유영하던 엔젤은 10미터나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다행이 어디 부러지거나 상한 곳은 없었다.
녀석은 벌떡 일어나더니 샤넬리아를 향해 조르르 달려와서는 고자질을 하듯 뭐라고 한참 떠들어댔다.
꾸엉! 꾸엉! 꾸어엉!
엔젤의 하소연을 들은 샤넬리아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다만 아이의 포크가 빅브래드의 몸통에 무자비하게 박혀들었다.
푹!
카우우우우!
쿵쿵쿵!
빅브래드는 샤넬리아를 피해서 이리저리 뒷걸음질 쳤다. 그리곤 말려달라는 양 가스파르를 향해 연방 구슬픈 소리를 냈다.
“먹을 것은 사이좋게 나눠 먹어야지. 그러게 혼자 먹으려다가 이렇게 좋은 꼴 나잖아.”
푹!
까아아아악!
엘코크 여자들이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거렸다.
“이게 아닌가? 그럼, 꼭꼭 씹어 먹었어야지. 그래야 육질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지.”
푹!
키악?!
엘코크 여자들의 고개가 이번엔 반대쪽으로 기울었다.
“어쨌든 니가 잘못한 것이 엄연히 두 가지나 되니까 벌을 받는 게 당연해.”
“…….”
엘코크 여자들은 그게 아니란 얼굴을 하였다. 그래 봤자 보는 이에겐 무표정하기만 했다.
할 말을 끝낸 가스파르는 등을 돌리고 그늘 아래로 찾아들었다. 아지랑이 야수를 사용하면 늘 그렇듯 정신력이 고갈되어서 피곤이 나른하게 몰려왔다. 이럴 땐 숙면으로 피로를 풀고 고갈된 정신력을 회복시켜야 했다.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협상할 사람들이 돌아오면 깨워줘.”
그러나 여자들도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어선 그의 어깨와 벽에 기대고는 눈을 붙였다. 모두 아지랑이 야수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유크를 불러서 사정을 이야기해야 했지만 한 번 감긴 눈은 떠지지 않았다.

* * *

웬슬라니 자작성.
50대 중반에 아직은 탄탄한 육체의 소유자인 웬슬라니 남작은 연무장에서 목검을 홱홱 휘둘렀다.
그의 목검을 휘두르는 기세엔 절도도 패도도 없었다. 평정심을 가장하려고 애썼지만 얼굴은 무엇 때문인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온몸에서 쉰내가 풀풀 나도록 그저 맹목적으로 목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교활한 베간커가 죽어서 한시름 놓았다 싶었더니, 머저란 놈은 아주 내 숨통을 쥐고 조이는구나.’
그의 가슴속은 불에 달군 인두에 타들어가는 듯 화끈거리며 몹시 쓰렸다.
‘차라리 베간커로 쳐들어가서 머저란 놈을 단칼에 베어버릴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가엾은 챈디아는 어쩌란 말인가.’
머저란을 베고 그 역시 자결을 하면 모든 울분과 고통을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혼자 남게 될 챈디아가 그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내 모든 것을 털어서 암살자를 고용할까.’
거기까지 생각한 웬슬라니 남작의 얼굴이 더욱 우그러졌다.
‘빌어먹을! 놈들이 이제는 하다하다 내 도덕성과 양심까지 짓밟는구나.’
끝내 잡념을 떨치지 못한 웬슬라니 남작은 목검을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쳤다. 그때 머리가 허옇게 센 집사가 당황과 긴박한 얼굴로 뛰어왔다.
“남작니임!”
웬슬라니 남작은 늙은 집사의 노쇠한 심폐가 걱정이 되어서 천천히 오라고 손을 들어 저지했다.
“아아! 또 무슨 일이기에 숨이 넘어가도록 헐레벌떡 뛰어오는 겐가? 설마 베간커에서 병사들을 앞세워 쳐들어오기라도 한 겐가?”
그의 질문에 늙은 집사 예난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얼굴로 대답을 했다.
“예, 남작님!”
“뭣? 그게 사실인가?”
“베간커뿐만이 아니라, 저희 웬슬라니와 채무 관계인 호넷과 튀링겐도 몰려오고 있습니다요. 대체 이를 어찌하면 좋다는 말입니까?”
“이이익, 때려죽일 놈들… 으윽!”
혈압이 치솟으면서 눈앞이 시뿌예졌다. 웬슬라니 남작은 자신의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것 같은 현기증에 손을 허우적거리며 잡을 것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어이구! 남작님! 정신 차리십시오, 남작님! 제발……!”

* * *

―가스파르! 가스파르!
“…….”
―내 목소리에 응답하란 말이다! 이 망할 놈의 인간, 가스파르으으으으으으!!
“으음. 시끄러워.”
―당장 날 꺼내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서 도무지 어느 방향에서 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 나는 소리지?”
가스파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분노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고함쳐 부르는 자를 찾을 수 없었다.
오직 보이는 것은 끝도 없이 투명한 세상.
―빌어먹을! 네 몸 속에 있잖은가!
그렇게 분통을 터트리는 자의 목소리에는 언뜻 절박함마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저 목소리의 주인은 왜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을까?
―가소로운 인간 주제에 감히 날 잡아 가두다니!
자신의 몸속에 있다는 것도 의아한데, 그를 자신이 잡아서 가두었다니?
점점 모를 말만 하는 기이한 존재가 더욱 격노하여 뇌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봉인이 풀리기만 하면 네놈을 가장 처절하게 비통하고 고통스럽게 죽여주겠다! 영혼이 찢기는 고통! 불에 지져지는 고통! 상처 난 영혼이 소금과 후추로 절여지는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처절하게 음미하도록 해주겠다!
보이지 않는 존재는 온갖 저주의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협박을 받는 가스파르는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안에서 시끄럽게 꽥꽥거리는 잔뜩 광분해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누구지?”
―빌어먹을! 그 질문 한 번만 더하면 천 번째라고! 몇 번을 말해줘야 알겠어? 난…….
그때 가스파르의 후각을 달콤하게 자극하면서 그의 온 신경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맛있는 냄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잠이 깼다.
―안 돼! 듣고 가! 이 식충이, 밥벌레 같은 인간아! 빌어먹을, 당장 돌아오라고! 크아아아악!!
저주의 목소리가 급박하게 욕설을 퍼부어댔지만 잠이 완전히 깬 가스파르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한나는 촌장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만찬을 주관했다. 그녀의 요리 솜씨가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이유도 있었지만, 엘코크 주민과 유크가 친하다는 탓으로 막중한 책임이 강제로 떠맡겨졌다.
한나는 엘코크 주민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정성을 다해 요리를 했다. 식사를 하는 중에도 가스파르 일행을 살펴보았다.
완벽한 무표정.
그것이 한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실수로 조미료를 잘못 넣었나?’
마을에서 가장 음식 솜씨가 좋다는 명성이 무색하게, 한나의 눈에 비치는 엘코크 주민은 무료함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음식을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었다.
‘간을 볼 땐 별 이상이 없었는데. 왜 이렇게 맛없게 먹는 거지?’
걱정이 지나쳐서 당장 천둥 같은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나이가 60이 넘어서도 예쁜 여자만 보면 헬렐레하는 바람기 다분한 미덥지 못한 남편. 그 아비와 대조가 확연히 되게도 연애라고는 젬병이라 남들 다 가는 장가를 못 가는 덜떨어진 아들들.
많이 부족한 집안의 남자들이지만 나름대로 든든한 그들이 어서 돌아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도 간절하고 절실했다.
가스파르와 엘코크 여인들은 들벅 여인들이 정성들여 차린 푸짐한 저녁을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다. 표정은 시종 무표정했지만, 그들의 혀는 무척 감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맛있는 음식은 이전에 가스파르의 기억에 없는 것이었다.
물론 귀족인 그가 이만한 요리를 먹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더 훌륭하고, 더 고급스럽고, 말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는 요리로 위장을 삼시 세 끼 채웠을 것이다.
하지만 10개월 이전의 감정은 모두 잊어버려서 ‘맛있다’라는 단어와 추억만 희미하게 남았을 뿐이지 그때의 감동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나의 요리는 감정을 잃고서 처음으로 접하는 아주 맛있고 요리다운 요리였다.
문득,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대접 받고도 말을 아끼는 것은 거만하고도 오만불손한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 음식 솜씨가 좋은 한나에게 맛있는 요리를 더 얻어먹으려면 뭔가 아부의 말을 해줘야 할 것만 같은 생각도 들었다.
가스파르는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한나를 돌아보았다.
“한나.”
가스파르와 눈이 마주친 한나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조아렸다.
“예에,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가요?”
“맛있어.”
“예? 예에……. 옛?”
그녀의 귀에 ‘맛있어’란 말이 또렷이 들려왔다. 하지만 가스파르의 표정을 봐서는 그저 예의상 마지못해 억지로 한 말로 여겨졌다.
가스파르는 안절부절 못하는 한나의 모습에서 자신이 한 치하의 말에 부족함이 있었는지 되짚어 보았다.
‘음. 그게 빠졌군.’
가스파르는 힘주어 말했다.
“정말로 맛있어.”
“네에.”
한데 한나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가스파르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음. 그것도 빠졌군.’
그는 집게손가락으로 양쪽 눈꼬리와 입꼬리를 당겨 모았다.
찡글.
“흐으윽!”
한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지켜보던 사베나가 물었다.
“가스파르님. 한나를 왜 울리세요?”
“울린 거 아니야. 칭찬하고 있었잖아. 이렇게.”
눈꼬리 입꼬리를 잡은 집게손가락을 더 당기며 말했다.
“그게 뭐 하시는 거예요?”
“웃는 거야.”
“그렇군요. 왜 웃으시는 건데요?”
“요리가 맛있으니까.”
“그런데 한나는 왜 우는 거죠?”
“내가 환하게 웃으니까 감동을 받았나 봐, 무척.”
“…그렇군요.”
막 흐느껴 울려던 한나는 순간적으로 뜨악한 얼굴이 되어서 대범하게도 가스파르를 홱 쏘아보았다. 하지만 가스파르를 비롯한 그 누구도 한나의 얼굴에서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을 읽어내지 못했다.
샤넬리아가 어지간해서는 손에서 놓지 않는 포크를 접시 위에 놓고 가스파르가 한 것처럼 똑같이 따라했다.
“한나. 샤넬리아도 맛있게 먹었어.”
그 뒤로도 엘코크 여자들이 줄줄이 인사를 했다.
“맛있게 먹었어.”
“고마워, 한나.”
“최고였어.”
“다음에 또 부탁해.”
찌글! 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