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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심장기사단 1 (17화)
제7화 스피릿 비스트(3)


베간커 사병의 시체를 치우는 작업은 해가 지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마무리가 되었다.
굳게 닫혀 있던 목책 문이 열렸다. 들벅 마을의 남자들이 초췌한 몰골과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기적거리며 들어왔다.
그런 그들을 구태여 마중을 나온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엘코크의 주민이었다.
가스파르가 집게손가락으로 눈꼬리와 입꼬리를 모으면서 선창을 하자 여인들이 합창을 했다.
“수고 했어.”
“고생 많았어.”
“……??”
움찔!
주춤!
가스파르와 여자들은 마을 간에 완만한 교류를 위해서 사절단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들벅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왜 이다지도 괴이쩍(?)고 시큰둥한 것일까. 더러는 미친놈 쳐다보듯 하였다.
‘외교, 그까이꺼가… 아니라 생각보다 좀 어렵군.’

* * *

유크의 안내를 받아서 마을 회관으로 향할 때였다. 갑자기 두크가 괴성을 지르면서 가스파르에게로 달려왔다.
“으아악! 미치겠네! 대체 내가 정신을 어따가 빼놓고 있었던 거야?”
두크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와서 가스파르의 앞에 납죽 엎드렸다.
“가스파르님. 웬슬라니 남작님을 살려주십시오!”
가스파르의 바지 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두크는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베간커 병사들의 참혹한 시체에 기가 질려서… 그것들을 치우느라고, 아니아니! 난생처음 보는 스피릿 비스트에 정신이 나가서 웬슬라니 남작님께서 처한 위험을 그만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스피릿 비스트? 그게 뭐지?”
“예?”
가스파르의 질문에 두크는 당황한 얼굴을 하였다.
“방금 스피릿 비스트라고 말하지 않았었나?”
“스피릿 비스트를 모르신다고요?”
두크는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서 반문했다.
“모르니까 묻잖아.”
“베간커 사병을 처치할 때 그건 뭐였습니까? 아지랑이처럼 몸에서 일어나 야수처럼 변한 것들 말입니다.”
“그거?”
“네, 그거요.”
“몰라.”
가스파르는 정말 몰랐다.
“그럼 그걸 왜 스피릿 비스트라고 한 겁니까?”
“내가 안 그랬는데? 그 말은 두크가 했잖아?”
“전… 그럼 그게 뭔지 가스파르님도 모른단 말입니까?”
“응.”
가스파르는 다른 사람은 알고 있었을까 싶어서 엘코크 여인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길을 받은 여자들은 금시초문이라는 양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린 그게 스피릿 비스트인 줄 몰랐어.”
“…….”
“두크는 어떻게 알고 있었지?”
“한크 형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나중에 알아보시고, 제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십시오.”
두크는 그간 웬슬라니 남작을 위해서 베간커 자작성에 잠복 중이었다.
웬슬라니 남작은 본래 자산 관리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던 것을 베간커 자작이 아름다운 챈디아에게 반하게 되면서부터 일이 사납게 꼬이기 시작했다.
베간커 자작은 챈디아에게 청혼을 해왔지만 웬슬라니 남작도 챈디아도 탐욕스럽고 비열하다고 악평이 나 있는 베간커 자작의 청혼을 일고해 볼 가치도 없이 무시했다.
그럼에도 베간커 자작은 일 년이 넘도록 끈질기게 웬슬라니를 찾아와 귀찮게 굴었다.
베간커 자작은 청혼 거절을 참지 못했다. 몹시 불쾌해 하였고 ‘감히!’를 연발하며 분개를 터트렸었다. 그래도 일 년 동안은 별탈이 없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웬슬라니 남작이 하는 사업에 일일이 간섭하여 추잡한 수작질을 벌이고 있었다.
웬슬라니 영지와 사업적 관계인 귀족들을 압박해서 거래를 못하게 가로막았다. 또 웬슬라니 영지의 주요 사업인 포도주와 유제품보다 더 품질이 좋은 포도주와 치즈 등을 외부에서 유입해 와서 헐값에 유통시키며 훼방을 놓았다.
포도주는 오래된 것일수록 가치를 높이 쳐주기 때문에 웬슬라니 남작은 조급해 하지 않았다. 저장고에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꺼내서 상품화시키면 더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치즈는 좀 번거롭게 되었지만 먼 타 영지에 내다 팔기로 했다.
그러나 그 저장고에 이유 모를 불이 나서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때 아닌 몬스터 떼가 숲을 뛰쳐나와서 각 과수원과 농작물, 심지어 농가를 짓밟아 버렸다. 목장의 소와 양은 몬스터의 주기적인 침략에 모두 잃고 말았다.
웬슬라니 남작은 영지민과 사업을 지키기 위해서 용병을 모집했다.
그런데 이번엔 용병길드에서 세 배가 넘는 거액의 의뢰비를 부당하게 요구했다. 이미 자금이 말라가는 상황에서 많은 용병을 고용할 수 없었다. 또 모집도 거의 되지 않았다.
이때 고용된 몇 안 되는 용병 중에 두크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웬슬라니 남작은 베간커 자작의 수작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명백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심증만 굵었다.
챈디아에게 단단히 반한 두크는 웬슬라니 남작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다.
두크는 웬슬라니 남작 영지에 지원하기 전에 용병길드에서 ‘웬슬라니에선 무조건 세 배를 불러라!’라는 말과 ‘목숨이 아깝지 않은 놈만 가라’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 때문에 두크도 누군가의 사주가 있었음을 의심치 않았고 있었다.
그래서 베간커 자작성에 위장 잠입을 자청하고 그에 대한 증거를 찾으면서 챈디아를 은밀히 돕고 있었던 것이다.
“머저란이 지금쯤 웬슬라니 남작님을 압박하기 위해서 빚쟁이들과 용병대를 보냈을 것입니다.”
가스파르는 듣고 보니 웬슬라니 남작과 챈디아의 사정이 딱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감정을 잃은 그였기에 마음의 동요는 없었다. 하지만 들벅 마을과 소통을 해야 했다.
유크가 답답하다는 양 제 가슴팍을 치면서 말했다.
“두크 형. 빚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거야…….”
두크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입을 닫았다.
“우리 마을을 쳐들어왔던 사병들처럼 그냥 냅다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그들을 돌려보내든 박살을 내든, 그 이전에 충분한 명분이 있어야 하잖아! 가스파르님의 성격에 좋은 말을 해서 곱게 돌려보낼 상황도 아니고.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반복될 거라고.”
“…….”
피에 절은 베간커 사병들의 사체를 떠올리고는 어떤 상황을 예측했는지 두크는 반박조차도 하지 못했다.
“그런 일이 또 벌어지고 목격자가 생긴다면 아마 악의 무리로 단단히 찍히게 될 거야. 그러면 주변 영지까지 선동돼 머저란의 편에 서서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제길!”
유크의 말에 두크는 더욱 참담한 얼굴을 하고 분통이 터진다는 듯 욕설을 내뱉었다.
가스파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크.”
“예?”
“내 성격이 어때서?”
“그야…….”
순간적으로 당황한 유크는 선뜻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가자.”
“어, 어디를요?”
“웬슬라니 남작네.”
“예?”
“어디로 가야 하지?”
“아닙니다, 가스파르님! 이번 사건은 역시 구실이 있어야 해결될 문제입니다. 머저란은 왕궁에 줄을 대고 있습니다. 그냥 막 쳐 죽이면 왕궁에서 군대를 파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웬슬라니 남작 영지는 물론 저희 화전민 마을 모두가 토벌되고 말 겁니다. 염병할!”
가스파르의 질문에 기겁을 하고 뜯어 말리는 사람은 유크가 아닌 의외로 두크였다.
“내게 방법이 있어.”
가스파르는 빅브래드에게로 걸어갔다.
“방법이요? 무슨 방법이요?”
두크가 반신반의한 얼굴로 뒤따라왔다. 그러나 빅브래드의 등에 훌쩍 올라탄 가스파르는 두크가 아닌 유크에게 말했다.
“유크, 어서 타.”
“저는 왜요?”
“나 이 동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길 몰라.”
“그럼 두크 형이 가면 되잖아요.”
“두크 얼굴은 머저리가 알아보잖아.”
“네에…….”
유크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빅브래드의 무릎을 밟고 엉거주춤 올라탔다. 그 사이 엘코크 여자들도 와이번에 올라타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사베나가 책임지고 들벅 마을을 지켜.”
“네, 가스파르님.”
사베나와 여자들은 순순히 물러났다. 하지만 샤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샤넬리아도 갈래요.”
가스파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샤넬리아. 와이번을 몰 수 있겠어?”
“네, 가스파르님.”
“그럼 잘 따라와.”
“네, 가스파르님. 엔젤 이리 와.”
가스파르는 샤넬리아가 엔젤의 손을 잡고 빅브래드1처에게 가는 모습을 뒤로하고 빅브래드에게 명령을 내렸다.
“빅브래드. 이륙.”
빅브래드가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반갑다는 양 환호성을 치면서 땅을 힘차게 박차고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타앗!
키아아아아!
세상이 어둠에 잠겼지만 빅브래드는 개의치 않은 듯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면서 창공을 쭉쭉 미끄러져 나갔다.
유크는 빅브래드의 등에 또 타게 된 것이 못내 불안한지 창백한 얼굴로 바들바들 떨었다. 유크는 바로 등 뒤에 타고 있음에도 그의 귓가에 대고서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쳐 불렀다.
“가, 가스파르님!”
“안 떨어지니까 걱정하지 마.”
“그게 아니고요, 웬슬라니에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가보면 알아.”
그의 대답에 유크가 뭐라고 투덜거렸지만 거친 바람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엔젤.”
꾸엉?
“떨어질 것 같으면 포크로 와이번의 등을 찍어서 단단히 잡아.”
꾸엉! 꾸엉!
꾸우우우우…….
엔젤은 뭘 알아듣기나 한 것인지 힘차게 대답했고, 빅브래드1처는 기가 죽은 울음소리를 냈다. 엔젤을 앞에 태운 샤넬리아가 용케 잘 따라오는 모양이었다.



제8화 악마 놀이(1)


달이 농염한 요부처럼 가늘게 눈웃음을 치는 밤.
거대한 와이번들이 엘리고스 숲의 하늘을 가르면서 몇 개의 화전민 마을을 지나쳐 갔지만 그것들을 목격하는 이는 없었다.
웬슬라니 남작 영지는 엘리고스 숲 북서쪽 끝자락에 자리해 있었다.
“저기, 불빛이 보이는 곳이 웬슬라니 남작 성이에요.”
유크가 아득히 멀리 보이는 불빛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방이 어둠에 굴복한 것에 반해 웬슬라니 남작 성은 검은 그을음을 꾸역꾸역 토해내는 붉은 횃불로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활공.”
가스파르의 명령에 빅브래드가 날갯짓을 멈추고 고도를 유지했다. 바로 뒤에 따라오던 샤넬리아도 허공에 멈추었다. 와이번들은 고도를 맞추기 위해서 이따금씩 서너 번의 날갯짓을 하기는 하였다.
“왜 저렇게 불을 환하게 밝혀 놓은 것이지?”
유크가 의아하다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평범한 약초 채집꾼인 유크의 눈에는 웬슬라니 성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웬슬라니 성은 수백 명의 병사와 용병들에 의해서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었다. 다행히 웬슬라니 남작은 성문을 굳게 닫고 시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늦지는 않았어.”
“예?”
가스파르는 상황 설명보다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와이번들을 죄다 끌고 올 걸 그랬어.”
“상황이 좋지 못한 건가요?”
유크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베간커가 몬스터들을 유인해서 웬슬라니의 농장을 짓밟았다고 했지?”
“예.”
“그럼 이 근처에 몬스터가 들끓는다는 이야기겠군. 몬스터가 많은 곳이 어디야?”
“느닷없이 몬스터는 왜요? 웬슬라니 영지를 침공한 몬스터를 처치하시려고요? 하지만 지금은 웬슬라니 성을 구원이 더 시급한 상황이에요. 몬스터는 나중에 처리해도 되잖아요?”
“제법 강한 몬스터가 서식하는 곳이 어디야?”
그의 재차 묻는 말에 유크는 체념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면서 설명했다.
“어휴우. 여기서 남서쪽 방향으로 15km정도 들어가면 마투누스 산맥의 자락과 바로 이어진 포그 숲이 나와요.”
도보로 15km면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와이번의 비행거리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포그 숲은 커다란 연못과 늪이 있어서 엘코크 폭포와 마찬가지로 목을 축이기 위해서 많은 동물이 찾아드는 곳이에요.”
물이 있는 주변은 초목 또한 잘 자라서 초식동물들이 먹이로 하는 풀도 풍부한 법이다.
“그것들을 잡아먹기 위해서 몬스터들이 들끓는, 먹이사슬이 가장 치열하게 뒤엉켜 있는 곳이죠.”
가스파르가 엘코크 폭포에 정착하기로 정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몬스터를 쫓아내는 일이었다. 그 다음이 몬스터들에게 뜯겨 먹히고 남은 어마어마한 동물들의 뼈를 치우는 일이었다.
가스파르는 고삐를 당겨 빅브래드의 머리를 서쪽으로 틀면서 뒤쪽에 대고 말했다.
“샤넬리아는 포그 숲 동쪽 지역에 있는 몬스터를 맡아. 잘할 수 있겠어?”
“네, 가스파르님.”
샤넬이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바람처럼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