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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심장기사단 1 (18화)
제8화 악마 놀이(2)
밤안개가 희미하게 끼기 시작한 포그 숲을 어슬렁거리는 샤벨타이거 한 쌍이 눈에 띄었다. 몬스터 중에서도 먹이사슬 상위에 올라 있는 제법 포악한 녀석들이었다.
“가스파르님. 웬슬라니 성부터 먼저 구해야 해요. 네?”
“악마처럼 보인다고 했었지?”
“예?”
가스파르는 황금빛 아지랑이를 일으켰다.
“악마란 놈들은 어떻게 생겼지?”
“저도 본 적이 없어서 잘… 하지만 이야기책에서는 머리에 뿔이 나고, 덩치는 산만큼 크고, 등에는 와이번보다 더 거대한 날개가 달리고, 꼬리 끝은 화살촉 모양에 피부는 검붉은 색으로 위화감이 들고… 아! 그건 마왕이었나?”
유크가 횡설수설하다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충분했다.
“악마 놀이 초반부터 마왕이 등장하면 안 되겠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돌연 황금빛 아지랑이가 검붉은 빛으로 변하였다. 가스파르는 자신의 신체를 감싸고 있던 검붉은 아지랑이를 지상으로 떨어뜨렸다.
“어엇? 원격조종도 가능해요?!”
“샤넬리아도 했는데?”
“아!”
짙푸른 괴조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던 샤넬리아.
물론 샤넬리아의 괴조처럼 살아있는 듯이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매개체가 있으면 그것에 붙여서 조종이 가능했다.
지상을 향해 빠르게 추락하는 검붉은 아지랑이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데도 그 크기가 작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크기를 불려 나가는 중이었다.
검붉은 덩어리는 바닥과 충돌 20여 미터를 두고 두 덩어리로 분열하였다. 그리곤 가스파르가 눈여겨보았던 샤벨타이거의 등으로 정확히 착석하였다.
크앙?!
카아앙!
이질적인 덩어리에 샤벨타이거들이 퍼뜩 놀라서 껑충 뛰어올랐다.
검붉은 덩어리들이 변형하기 시작했다. 먼저 팔다리가 쭉쭉 뻗어 나면서 인간의 형태를 하였고, 그 다음은 유크가 악마의 대해서 설명했던 것처럼 뿔과 날개, 꼬리가 뽑혀 나왔다.
“어어?”
“작으니까 마왕의 조무래기 같지?”
“예에…….”
유크가 다소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샤벨타이거는 스피릿 비스트들을 떨쳐 버리려고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저것들의 정체가 뭐예요?”
“스피릿 비스트라고 했잖아.”
“한크 형이 말하기 전까지는 가스파르님도 몰랐다고 했잖아요. 정령의 종류인가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저건 뭘로 불러내는 건데요? 정령들은 마나와 동질의 물질을 매개체로 소환을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매개체가 무엇이죠?”
“매개체 따위는 없어. 그냥 심장에 있던 마나를 몸 밖으로 끄집어내면 저렇게 돼.”
“에?”
“그래서 난 마나에도 형체와 자아가 있다면 저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어.”
가스파르의 대답에 뒤에서 ‘나 같은 촌뜨기에겐 마법 이론은 역시 무리야’라고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크르릉!
크어엉!
발광을 하던 샤벨타이거가 음산하게 으르렁거렸다. 녀석들의 안면은 분노와 공포로 극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연방 으르렁거리는 아가리에서는 침이 흘러내렸고, 눈빛은 광기로 번뜩였다.
하지만 내내 반항하던 녀석들은 어느새 스피릿 비스트들에게 길들어진 양 저항을 딱 멈춰 있었다.
곧 빅브래드를 중심으로 샤벨타이거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사선으로 뛰어갔다.
“어떻게 된 거죠?”
“스피릿 비스트들이 샤벨타이거를 제압해서 끌고 간 거야.”
“왜요?”
“쟤들이 필요해서.”
“으……. 근데 전에는 금빛이었는데, 이번엔 왜 검붉은 색이죠?”
유크는 끝도 없이 질문해 왔다. 그러나 가스파르는 귀찮음이란 감정 자체를 몰랐다.
“악마가 검붉은 색이라고 하지 않았어?”
“…색이 변할 수도 있는 건가요?”
“글쎄. 나도 지금 처음 해봤는데 되네.”
“에…….”
좌우로 벌어진 스피릿 비스트들이 숲에 몬스터를 찾아냈다. 샤벨타이거의 서식지인지 또 다른 샤벨타이거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새로운 놈들은 사납게 크르릉거리며 스피릿 비스트들이 타고 있는 샤벨타이거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스피릿 비스트들은 또 분열을 해서 새로운 샤벨타이거들의 등에 올라탔다.
스피릿 비스트들의 수가 두 배로 더 불어나게 되었지만 본래의 크기는 전혀 작아지지 않았다.
마치 복사를 하고 찍어내듯 완전체로 분열된 스피릿 비스트들은 순식간에 샤벨타이거들을 제압했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 거죠?”
“몰라.”
“아니, 당사자가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요?”
“그러게.”
모르는 것은 정말 모르는 것이었다.
“숨을 어떻게 쉬지?”
“그냥…….”
“밥은 어떻게 먹지?”
“정말 그게 궁금해서 질문을 하시는 건가요? 그런 원초적인 행위는 굳이 배우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모든 동물이 본능적으로 하게 되는 짓이잖아요.”
“그래.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저것들은 밥을 먹는 것같이 자연스럽게 되는 일이었어.”
“언제부터요?”
“응, 10개월 전부터일 거야.”
넷으로 늘어난 스피릿 비스트들은 본체와 같은 아지랑이 채찍을 뽑아내서 숲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콰라라락―
쫙, 콰광!
우르르릉, 쾅!
아지랑이 채찍은 허상도 환상도 아니었다. 숲에 아름드리나무와 바위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지고 폭발하였다.
그것들을 엄폐물로 삼고 있던 연약한 동물도 포악한 몬스터도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며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스피릿 비스트들은 본격적으로 몬스터들에게 채찍을 가하기 시작했다.
가스파르도 블러드 워울프를 발견하고는 빅브래드를 낮게 비행하게 하였다.
“강하.”
키아우우우우―
빅브래드가 그의 의도를 깨달았는지 포효하면서 내리꽂히듯이 수직으로 급강하를 하였다.
“으아아아악! 가스파르니임!”
가스파르의 등을 안은 유크의 하체가 허공으로 붕 뜨는 것이 느껴졌다. 곧 빅브래드가 수평으로 블러드 워울프를 쫓으면서 유크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털썩!
“잘 잡아.”
가스파르는 유크에게 말하면서, 빅브래드를 발견하고 감히 겁 없이 달려드는 블러드 워울프를 향해 어느새 뽑아 든 검붉은 아지랑이 채찍으로 후려갈겼다.
촤라라락―
검붉은 뱀이 대가리를 힘차게 흔들며 허공을 날아가 블러드 워울프의 몸통에 격렬한 불꽃을 튀겼다.
쫙!
크아아아!
블러드 워울프가 비명을 지르며 격하게 튕겨 나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블러드 워울프에게서 뿜어져 나온 핏방울이 구슬처럼 허공을 굴러다니고, 채찍에 벗겨진 붉은 털은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렸다.
가스파르는 떼굴떼굴 굴러가는 블러드 워울프에게 계속해서 아지랑이 채찍을 휘둘렀다.
차라라락!
쾅!
쿠어어엉!
이번에 살짝 빗맞혀서 절반은 땅을 때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블러드 워울프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대며 바닥을 굴러다녔다. 그 주변으로 통째로 찢어져 벗겨진 털가죽과 살덩어리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가스파르는 인정이라는 것을 몰랐다. 동정할 줄도 몰랐다. 사람에게도 그러할진대 몬스터 따위의 아픔은 헤아릴 필요성을 못 느꼈다.
차라락!
쾅!
캥!
촤라라락!
쾅!
온몸이 난도질을 당하고서야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깨달았을까.
벌떡!
크어어엉!
위기를 직감한 블러드 워울프가 채찍이 닿기 직전에 상당한 민첩성을 발휘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겁에 잔뜩 질린 낯으로 괴성을 지르면서 도주하기 시작했다.
블러드 워울프가 뿌린 혈향에 취해 눈이 벌겋게 충혈 된 빅브래드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꾸우우우우우―
마치 ‘딱 한 입만 먹으면 안 될까요?’라고 묻는 듯했다. 빅브래드에게 한 입은 블러드 워울프 통째로 삼키고도 남았다.
가스파르는 빅브래드의 목을 부드럽게 두드리면서 타일렀다.
“지금은 간식 타령할 때가 아니야.”
“예?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
* * *
“웬슬라니 남작. 당장 성문을 여시오!”
빚쟁이 호넷이 고함을 쳤다.
호넷과 튀링겐은 확실한 채무 관계였다.
그러나 본디 계약서상의 원금 상환 날짜는 1년 후였고, 이자는 매월 꼬박꼬박 지급해 왔기 때문에 당장 빚을 갚으라는 독촉은 부당한 요구였다.
그래도 그들이 돈을 받기 위해서 오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바가 아니었기에 그리 놀라운 상황은 아니었다.
며칠 전 머저란의 심상찮은 암시가 있었기 때문에, 머저란에게 뭔가 약점이 잡힌 듯한 호넷과 튀링겐이 이때쯤이면 방문할 것을 예측했었다.
하지만 설마 병사를 이끌고 이렇게 쳐들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시기도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빨랐다.
성루에서 성 밖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웬슬라니 남작이 욕설을 내리깔았다.
“젠장! 저것들은 잠도 없나!”
그는 한차례 이를 부드득 갈다가 늙은 집사에게 말했다.
“예난.”
“예, 남작님.”
“나 잔다고 해.”
“…….”
웬슬라니 남작은 뜨악한 얼굴을 한 집사를 뒤로하고 판자를 대충 엮어서 만든 긴 의자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그의 행동은 명백한 자포자기를 뜻했다.
하지만 믿는 구석도 있었다. 적어도 오늘 밤 중으로는 공격을 해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 겁쟁이 새가슴의 호넷과 튀링겐이 미치지 않았다면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저들이 병사와 용병을 잔뜩 끌고 온 이유는 머저란에게 뭔가 꼬투리를 잡혀서 압박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무력행사만 하다가 못이기는 척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이유는 아무리 작위의 위치가 동급이라도 귀족 간의 전쟁은 왕궁의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들은 그런 절차를 밟지 않고 무작정 병사들만 이끌고 쳐들어왔다.
전쟁을 벌이기에 명분이 부족한 상황. 그것이 웬슬라니 남작의 들끓던 분노와 당혹감을 차분히 가라앉게 하였다.
그렇다고 쉬이 물러가지도 않을 것이다. 전쟁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검과 창, 화살이 아닌, 입씨름으로 승패를 가려야 하는 전쟁이 말이다.
다음날 저들을 이빨로 무너뜨려 떨쳐 내려면 지금은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웬슬라니 남작은 잠을 청하기로 했다.
눈을 감자마자 가엾은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챈디아…….’
머저란이 베간커의 기사와 병사를 보낸 상황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챈디아가 두크와 눈이 맞아서 도주를 하다니?’
마른하늘에 벼락이 따로 없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알아볼 수도 없는 상황에 가슴이 먹먹하고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네 안전만 확보된다면야… 이 아비는 괜찮다.’
웬슬라니 남작은 무력엔 무력으로 대항할 생각이었다. 비록 빚은 졌지만 법적으로는 아직까지 아무런 결점이 없었다. 저들이 계약을 어기고 먼저 침략했으니 깡그리 죽여도 할 말은 있었다.
‘머저란! 네놈의 목은 기필코 내 손으로 꼭 따주도록 하마! 으드득!’
잔다고 누웠지만 잠이 올 턱이 없었다. 성 밖에서 튀링겐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웬슬라니 남작!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성문을 부숴라!”
와아아아!
쿵!
“오늘 안으로 웬슬라니를 굴복시키지 못하면 죽음을 각오하라!”
그 무엇이 튀링겐을 몰아쳐 안달 나게 만드는 것일까? 설마 한밤중에 공성전을 벌일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던 웬슬라니 남작은 적잖게 당황했다.
호넷의 다그침도 밤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부숴! 당장 깨부수란 말이다!”
병사들이 당혹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는 소음도 들려왔다.
“이런 미친! 어째서 진짜로 싸우라는 거야?!”
“제기랄! 우린 가볍게 압박 시위만 할 줄 알고 따라온 건데.”
“명령이다! 당장 성문을 부수란 말이다!”
“염병!”
“히야아압!”
쿠웅!
결국 웬슬라니 남작은 벌떡 일어나서 검을 뽑아 들었다.
“저런 미친놈들이! 전투 준비!”
웬슬라니의 병사들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넋 놓고 있으면 우리가 죽는다! 궁수는 화살을 쏴라!”
“에잇!”
투두두둥―
“컥!”
“악!”
“젠장! 방패로 막앗!”
튀링겐이 당황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방패 따윈 챙기지도 않았다고!”
용병 중에 몇몇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그나마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허둥지둥 방패를 들어 올렸다.
차자작!!
웬슬라니 남작은 코웃음을 쳤다.
“흥! 끓는 기름을 부어라!”
츄아아악!
“앗! 뜨거, 뜨거!”
“으아악!”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개싸움이… 컥!”
끓는 기름이 방패 위로 쏟아졌다. 조악한 나무 방패 틈틈 사이로 뜨거운 기름이 흘러내려 병사들의 팔에 떨어지면서 방패를 놓치는 사태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