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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심장기사단 1 (19화)
제8화 악마 놀이(3)


웬슬라니 남작은 숨 가쁘게 명령을 내렸다.
“불화살을 쏴라!”
투웅!
퍽!
화라락!
가뜩이나 뜨거운 기름을 뒤집어쓴 마당에 불화살이 떨어지면서 화염이 사나운 파도처럼 일어나 발버둥 치는 병사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아아아악!”
몸에 불이 붙은 병사들이 비명을 목이 터져라 질러댔다. 불을 끄기 위해 땅바닥에 몸을 던져 발버둥 쳐댔다.
튀링겐이 당황한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비, 빌어먹을 웬슬라니! 정말로 전쟁을 하잔 말이지?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좋다, 웬슬라니! 네놈이 자초한 일이니 죽어도 날 원망치 마라. 마법사는 마법으로 성벽을 공격하라!”
“파이어 볼!”
슈우웅―
쾅!!

* * *

“이, 이런! 가스파르님! 몬스터들이 웬슬라니 성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유크가 이제야 깨달았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빽 소리쳤다.
“응.”
“알고 계셨단 말이에요?”
“응.”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겁니까?”
“여태 뭘 봤어? 몬스터들을 찾아서 웬슬라니로 몰이를 하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도대체 왜요?”
유크는 숨통이 막힌다는 양 쥐어짜는 투로 따져 물었다.
“그야 다 쓸어버리려고.”
“기껏 구하러 온 웬슬라니를 왜…….”
가스파르는 멀리 웬슬라니 성문을 공격하고 있는 병사들을 응시하면서 대답했다.
“웬슬라니가 아니라 웬슬라니를 포위한 놈들이야.”
“아아… 하지만 몬스터들이 웬슬라니 성으로 뛰어들면 어떻게 해요?”
“웬슬라니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안전해.”
물론 제때에 도착한다는 전제 조건하에.
유크가 발악적으로 외쳤다.
“그래도 몬스터로 병사들을 처치하게 하는 것은 안 돼요!”
“자꾸 뭘 걱정하는 거지?”
“그게…….”
“유크. 누군가를 밟아 본 적이 있어?”
“아니요.”
“그럼 누군가에게 밟혀 본 적은?”
“음…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짓밟으려는 드는 자들의 습성을 모르는 거구나.”
가스파르는 아련히 떠오르는 과거의 영상을 투과하며 말을 이었다.
“두크에게 모두 들었잖아. 현상금 100만 골드를 가로채려고 목격자인 유크의 가족과 이웃을 몰살시키려고 사병을 보냈다고. 돈 몇 푼 때문에 수백 명의 사람 목숨을 벌레 취급한 머저란이야. 그 이전부터 웬슬라니를 핍박했던 베간커였고. 머저란은 웬슬라니와 들벅 마을이 완전히 뭉개질 때까지 짓밟고 짓이기려 들 거야.”
“…….”
“그런데도 그들에게 동정심이 생긴다는 거야?”
“아닙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몬스터를 몰아서 병사들을 치면 정말 악마로 몰리게 될지 몰라서 그게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거예요!”
가스파르는 실낱같은 초승달을 올려다보면서 대답했다.
“안 들키면 돼. 밤도 우리 편이야.”
“그럼 스피릿 비스트들로 몬스터만 몰고 가스파르님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실 거란 이야기인가요?”
“상황이 허락한다면.”
가스파르의 대답에 유크는 조금 진정이 된 듯 그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살짝 풀어졌다. 그러다가 가스파르의 말에 다시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웬슬라니가 공격을 받고 있어.”
“예?”
“꽉 잡아.”
그렇게 말하곤 느슨하게 몰이를 하고 있던 몬스터들을 향해 아지랑이 채찍을 가차 없이 휘갈겼다.
촤라라락, 쫙!
크오오오오!
그의 채찍질이 현란해질수록 쫓기던 몬스터들의 속도도 빨라졌다.

* * *

웬슬라니 성의 하늘은 화살과 마법이 어지러이 엉켜들고 있었다.
투두두둥―
파바바박!
“꺼흐… 마, 마누라가 일찍 들어오라고 했는데… 새, 생일 선물 사 가지고…….”
털썩.
사랑하는 아내에게 과부라는 몹쓸 생일 선물을 안기게 된 용병은 차마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을 멈췄다.
“파이어 붐!”
쉬웅―
꽈광!
“악!”
“크악!”
성벽이 폭발하면서 휘둘러지는 도끼보다 위협적인 돌조각들이 웬슬라니의 병사들을 가격했다. 뒤통수에 날카로운 파편이 박힌 병사가 피를 꾸역꾸역 쏟아내며 허물어졌다.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튀링겐 영지의 마법사가 성문 위의 궁수만 집중적으로 공격한 나머지 궁수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성벽도 상당히 박살이 나버려서 엄폐 수단으로 이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성문 쪽으로는 더 이상 병사들을 보낼 수 없었고, 성문을 사수하기가 어려워졌다.
바닥에 피를 쏟고 널브러진 병사 하나가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꺽꺽거렸다.
“아아, 제니퍼…….”
아내의 이름인지, 연인의 이름인지, 그것도 아니면 누이나 딸의 이름인지 모를 여인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며 웬슬라니의 병사가 고개를 떨궜다.
아무도 원치 않았던 전투.
설마설마했던 전쟁.
이렇게 허무하게 어이없이 죽을 줄은 몰랐다는 듯 병사들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죽어갔다. 웬슬라니 남작의 마음은 더없이 비통하게 젖어들었다.
“크흐으으… 머저란. 머저란! 으아아아아! 머저란, 이 개자식!!”
“웨, 웬슬라니! 너는 오늘의 참상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예상치 못한 혈난에 겁에 잔뜩 질린 호넷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호넷! 머저란에게 무슨 약점이 잡혔느냐!”
“야, 약점이라니?”
당황하여 반문하는 호넷에게 웬슬라니는 조소를 띠며 이죽거렸다.
“말해 봐라, 호넷. 네놈 같은 겁쟁이는 전쟁이란 단어만 들어도 오줌을 지리는 얼간이가 아니더냐!”
“뭐, 뭣?”
“그런 네놈이 머저란의 개가 된 사연이 있을 터.”
“닥쳐라!”
“참으로 궁금하구나. 그게 뭐냐?”
“그런 것 없다! 네가 감히 나를 모욕하려 드는 것이냐?”
성난 맹수처럼 분통을 터트리는 호넷은 모처럼 사내다웠다. 웬슬라니 남작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글로불린의 죽음과 관계가 있었더냐?”
“뭐, 뭣? 그, 그게 무슨 헛소리냐?!”
“감히 우리를 모함하려 드는 것이냐!”
글로불린이란 언급에 호넷은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고함을 쳤고, 잠잠히 있었던 튀링겐은 당황한 얼굴로 악을 썼다.
글로불린은 죽은 베간커 자작의 자식으로, 작위 승계를 위해 머저란과 수도로 상경 중에 객사를 한 비운의 소년이었다.
“한 달 전 머저란이 글로불린과 수도로 갔을 때 그대들이 동행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던 중에 글로불린이 급사를 했지. 그대들이 조카 살해 의혹을 받고 있던 머저란의 알리바이가 되어서 그의 정당성을 주장해 주었다.”
“그렇다! 머저란은 결백하다!”
“그래, 나도 머저란이 결백하다는 것은 의심치 않는다. 그는 탐욕스러운 자이기는 하지만 멍청한 자가 결코 아니니까.”
웬슬라니 남작은 말뿐이 아니라 진실로 머저란이 글로불린을 살해했다고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튀링겐이 소리쳤다.
“그럼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
“글로불린의 죽음에 그대들이 관계가 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호넷과 튀링겐이 머저란의 결백을 증명해 주었다면 오히려 머저란이 은혜를 입었다 할 수 있다. 그러니 머저란이 호넷과 튀링겐에게 감사하며 마땅히 고개를 숙여야 옳았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은 그 반대 양상을 띠고 있었으니 어찌 의구심이 들지 않을까.
“무슨 근거로 우리를 모함하고 모욕하려는 것이냐?!”
호통 섞인 튀링겐의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튀링겐, 호넷. 가엾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작위도 없는 머저란에게 남작인 그대들이 굽실거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부족해서 머저란의 개를 자처하여 오랫동안 사업 관계였던 나를 이렇게 핍박하고 있잖은가!”
“닥쳐라, 웬슬라니!!”
튀링겐이 창백한 얼굴로 짐승처럼 울부짖듯 소리쳤다. 호넷은 이성을 잃고 마구 고함을 치며 발작을 일으켰다.
“쳐라! 나 호넷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욕보이려는 웬슬라니를 죽여라! 어서 쳐! 저놈을 당장 죽여!”
생각보다 반응이 격렬했다. 웬슬라니 남작은 그들의 과민한 반응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언뜻 위화감도 들었다.
자작의 후계자가 죽은 일은 실로 큰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튀링겐과 호넷은 남작이었다. 단지 연루되었든 직접적으로 살해를 했든 상황에 따라서 돈을 밝히는 왕실 실세들에게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고 뇌물을 쥐어 줘서 은근슬쩍 무마시킬 수도 있었다.
“설마… 나탈리아 폰 세노이크 영애와도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이냐?”
“헉!”
“저, 저 미친놈이!”
과잉 반응에 혹시나 하여서 슬쩍 떠본 거였는데 튀링겐과 호넷의 격한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글로불린이 죽었던 날 세노이크 후작의 장녀 나탈리아가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도 한 도시에서 블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일이라 당시 최고의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특히 나탈리아는 현 젊은 국왕의 왕후로 거론되는 후보자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살을 했을 때는 가문의 기대에 대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서 죽음을 선택했다고 수군거렸다.
이 두 죽음의 사건은 관련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탈리아는 유서를 써놓고 죽었고, 글로불린의 사인은 이름 모를 전염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초에 사건을 연관시켜 조사할 필요가 없었다.
글로불린의 죽음이 석연치 않은 사건이었지만, 영향력 있는 후작 영애의 자살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나탈리아의 자살 사건의 파장이 컸던 탓으로 글로불린의 의문사는 자연스럽게 묻혀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두 사건이 정말로 연루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이었더란 말이냐? 미친놈들은 바로 네놈들이었구나! 이런 천인공노할 놈들!”
“닥쳐라! 말이면 다인 줄 아느냐?!”
“이이익! 나를 모함한 대가를 받아내겠다! 마법사, 마법사!”
겁에 잔뜩 질린 호넷은 앞뒤 가리지 않고 튀링겐 영지 소속의 마법사를 필사적으로 불러댔다.
“네, 호넷 남작님.”
“저놈의 아가리에다가 불덩어리를 처박아라! 어서!”
이쯤 되니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호넷과 튀링겐, 그리고 머저란이 관련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때문에 웬슬라니 남작의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어두워졌다. 저들이 추악한 속내를 들켰으니 그것을 감추려 정말로 사생결단을 내기 위해서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 것이기 때문이다.
“남작님! 피하십시오!”
“이크!”
후아앙―
쾅!
웬슬라니 남작이 서 있던 자리에 불벼락이 떨어져 강한 폭발을 일으켰다. 금세 과열된 돌 부스러기들이 바닥을 구르는 웬슬라니 남작의 등을 두들겼다.
“크으으…….”
이번엔 아래서 호넷이 고함쳐 부르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려댔다.
“죽었는가? 어떻게 된 건가?”
“폭발할 때 튕겨 나간 것 같은데 죽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웬슬라니, 살아 있나! 대답하라, 웬슬라니!”
생사를 확인하려는 호넷의 경망스런 행태에 웬슬라니 남작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그렇게 다급함을 드러내 인정하고 마는구나. 어리석은 자들.’
조소하기도 잠시, 강력한 폭음과 함께 성채가 흔들렸다.
꽝!!
“성문이 박살났다!”
“와아아아!”
피를 토할 것 같은 함성이 폭풍처럼 불어 닥쳤다.
“빌어먹을!”
“남작님 속히 피하셔야 합니다!”
“대체 어디로 피신을 하라는 것인가? 그 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서 어디로!”
그렇게 외친 웬슬라니 남작은 부서진 성문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예난의 비통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남작님! 그게 사실이라면 세노이크 후작께 도움을 청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돌아오십시오!”
“예난! 그대가 가게. 가서, 이 웬슬라니의 원통함을 풀어주게!”
“남작… 으헉!”
예난이 숨을 격하게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웬슬라니 남작은 예난이 화살을 맞은 것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에 돌아보았다. 하지만 예난은 말짱했다. 그런데 침통과 경악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성 밖을 내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인가? 설마 몬스터가 습격이라도 해왔는가?”
“예에.”
예난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엄청난 녀석들이 몰려오는가 보군. 하하하하!”
웬슬라니 남작은 믿고 싶지 않은 당면한 현실에 히스테릭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무언가가 홱 지나갔다.
키아오오오오오―
“헛!”
와이번이었다. 그 위엔 사람과 같은 형상에 검붉은 기운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너울거리고 있었다. 박쥐 날개, 뿔, 꼬리…….
“아, 악마!?”
“좀 늦었어.”
“헉!”
난데없이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홱 돌아보니 흑발에 눈이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를 지닌 청년이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