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얼음심장기사단 1 (20화)
제8화 악마 놀이(4)
웬슬라니 남작은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흑발 청년에게 겨눈 검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흑발 청년은 반파된 성문으로 기어들어 오는 호넷과 튀링겐, 베간커의 병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부아악―
초저녁에 홧김에 마구잡이로 휘둘렀던 웬슬라니 남작의 검세보다 더 형편없어 보이는 우악스럽기만 한 것이었다.
슈각!
“악!”
“컥!”
“끄아아!”
한 칼에 서너 명의 병사가 단말마를 지르면서 뒤쪽으로 퉁겨 날아갔다. 허공에서 서서히 두 덩어리, 혹은 서너 덩어리로 분리된 채 아군의 몸통을 격하게 때리면서 곤두박질쳤다.
“으악! 뭐, 뭐야?!”
“기, 기사다!”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기사에게 위축되는, 먹이사슬 중에서도 하위권에 속하는 집단이었다. 흑발 청년의 가공할 무력에 귀신을 만난 듯 기겁을 해서 소리쳤다.
“엄청나게 센 기사가 웬슬라니에 있다!”
“젠장! 웬슬라니엔 기사가 없다고 했었잖아… 칵!”
휙!
추아아악―
촤아아아―
후드드득!
투드드득!
소리치던 병사들의 몸에서 가로, 세로, 사선, 마구잡이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붉은 물감을 잔뜩 머금은 붓이 허공에 쾌활하게 붓질을 하는 것처럼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묻어났고, 동시에 너무도 비현실적이었으며 이질감을 불러 일으켰다.
악몽 같은 상황.
“후, 후퇴! 웬슬라니에 괴물이 숨어 있었다!”
“빌어먹을, 당장 후퇴하라고!”
자신들의 상대가 아님을 간파한 적병들이 자지러지게 고함을 치면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밖에서는 안으로 들어가라는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몬스터 떼다!”
“빨리 들어가! 어서!”
“으아아아악! 사람 살려!”
크아앙!
쿠오우우우!
수백의 몬스터가 사납게 울부짖는 소리에 어둠조차도 흠칫 뒷걸음질 칠 위협적인 기세였다.
콱, 뚜둑!
“아아악!”
삼연합병의 공포에 질려 울부짖는 비명 소리가 피 칠갑을 하고 있는 웬슬라니 성벽을 떨어 울리기 시작했다.
우적우적!
“어, 어머니… 아버지…….”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 자빠지는 소리, 내동댕이쳐지는 소리, 씹히는 소리, 비명 소리가 뭉쳐 불안감을 증폭하는 소음이 되었다.
아비규환.
60년 생을 살면서도 말로만 들었던 그 아비규환이 환영처럼, 파도처럼 그의 망막 속으로 거침없이 스며들었다.
성 밖.
살아 움직이는 인간은 없었다.
삼연합 병사와 용병은 죄다 갈라지고, 토막 나고, 으깨져서 드러누웠다. 사지가 말짱한 자는 실성한 사람처럼 ‘악마다!’라고 악을 쓰면서 도망쳤다. 그중에는 호넷과 튀링겐, 그리고 머저란이 보낸 기사도 끼어 있었다.
폭풍처럼 밀어닥쳐 삼연합병을 격파한 몬스터 떼는 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런 몬스터의 뒤에는 항상 두 마리에 와이번이 뒤쫓고 있었다.
검에 엉겨 붙은 핏물을 떨어내는 흑발 청년을 웬슬라니의 생존한 병사들이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모두 넋이 빠져나가 있는 상태였다. 그런 것은 웬슬라니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대는 누구요?”
목소리가 극심하게 떨렸지만 사고가 반쯤 마비된 웬슬라니 남작은 그조차도 인식하지 못했다.
“가스파르.”
완벽한 무표정의 청년은 너무도 간략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어디서 왔소?”
“저기.”
가스파르가 손가락으로 멀리 엘리고스 숲을 가리켰다.
“…우리를 도와준 거요?”
“응.”
“무슨 이유로 왜… 어떻게 알고… 아니, 누가 보낸 거요?”
“유크가 도와 줘야 한대서, 두크가 말해서, 두크가.”
웬슬라니 남작의 횡설수설 질문에 가스파르는 의외로 일일이 답변해 주었다.
멀뚱히 쳐다보는, 조금은 순박해 보이는 가스파르는 삼연합병 서넛을 한꺼번에 베어 버리는 아까의 경악스럽고도 가공할 그가 아닌 것같이 잠잠하기만 했다. 마치 고요한 바다와 같았다.
언제 다시 성난 해일로 돌변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바다…….
“두크? 그는 지금 어디 있소?”
“유크네 마을에.”
“채, 챈디아는? 챈디아도 그곳에 있소? 무사하오?”
“화를 냈어.”
가스파르의 뜻하지 않은 대답에 웬슬라니 남작은 어리둥절했다.
“설마 두크가 챈디아를 납치하기라도 한 거요? 그래서 챈디아가 화를 낸 거요? 그렇군! 두크, 이노오옴……?”
“아니.”
“아니라고? 그럼… 뭐요?”
넘겨짚고 설레발을 친 것이 무안해서 머쓱한 투로 물었다.
“두크가 사베나의 다리를 보고서 침을 삼켰다고 챈디아가 두크의 팔을 마구 꼬집어댔어. 손톱을 이렇게 세우고.”
도대체 무슨 화법이 이러한가. 웬슬라니 남작은 황당무계해서 얼굴이 뜨악하게 굳어졌다.
“…어디 상한 데는 없었소?”
“손톱자국이 났어.”
“아니, 우리 챈디아 말이오!”
“쓸데없이 질질 짰어.”
“왜?”
“두크가 침을 삼켜서.”
“크흐…….”
웬슬라니 남작은 눈앞에 청년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노려보았다.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에선 조롱기는 찾아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진지함에 가까웠다.
‘안색 하나 안 바꾸고 사람을 놀리는 재주가 있는 젊은이군.’
딸의 안위가 몹시 걱정된 웬슬라니 남작은 보다 구체적으로 묻기로 하였다.
“챈디아가 들벅 마을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소?”
“잘 지내고 있어, 아마도.”
“이익! 후우우… 좋소.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는지부터 상세하게 이야기 해주시오.”
“어깨를 내렸어.”
“어깨?”
“옷.”
“흠.”
침음을 흘리는 웬슬라니 남작은 뭔가 불안했다. 또 무슨 직견탄이 날아올지 벌써부터 정신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다음에 상체를 내밀면서 가슴을 모았어.”
“…….”
머릿속에 그림이 절로 그려졌다.
“정숙한 챈디아가 그럴 리가 없어!”
“두크가 코피를 흘리니까 고개를 돌리고 웃었어. 뭘 먹는지는 못 봤어.”
“아으윽!”
웬슬라니 남작은 끝내 뒷목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호넷, 튀링겐, 머저란 삼연합병 수백이 쳐들어 왔을 때보다 혈압이 두 배로 치솟았다.
“차라리 삼연합병을 상대할 때가 훨씬 나았어…….”
진심이었다. 웬슬라니 남작은 가스파르와 원만하고 정상적인 소통을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을 내렸다.
인생 최대 난적을 만났다고 끙끙 앓는 웬슬라니 남작.
가스파르는 정말 강적이었던 것일까?
웬슬라니 남작의 머릿속에선 불과 몇 분 전에 벌어졌었던 아비규환의 참상과 극도의 긴장감, 불안의 모든 요소들이 불가사의하게도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 * *
으리으리한 책상.
그 앞에 불그스름한 빛을 띤 금발의 남자가 분통을 터트렸다.
“빌어먹을!”
그는 냉엄한 초록빛 눈동자로 어마어마하게 높이 쌓여 있는 서류 뭉치를 노려보았다. 힘줄이 불끈 돋도록 억세게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난 이제 겨우 혈기왕성한 스물하나라고! 이딴 건 한풀 꺾인 늙은이들이 알아서 처리하면 좀 좋아, 젠장할!”
악다문 잇새로 분통을 터트리는 금발 청년은 정말로 서류와 씨름을 하고 있을 사무 타입은 아니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었고, 손에 굳은살은 사인을 하느라 펜을 놀려서 박인 것이 아니라 숱하게 휘두른 검이 만든 결과였다.
떡 벌어진 어깨, 강인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눈빛은 기사, 아니, 그보다 더 거친 전사의 기상을 뿜어내고 있었다. 전사 중에서도 야생 짐승만큼이나 거칠다는 용병들도 한풀 꺾일 사나운 야성이 드넓은 집무실을 난폭하게 지배하고 잠식시켰다.
마치 우리 속에 갇혀 으르렁거리는 성난 사자와도 같았다.
“정말 따분해서 못해 먹겠군! 에잇!”
마침내 야성을 짓누르지 못한 금발 청년은 펜을 집어던지고야 말았다.
탕!
펜촉이 문짝에 틀어박히면서 부르르 떨렸다.
똑똑.
“뭔가?!”
“데프론이옵니다.”
“젠장!”
“들어가겠사옵니다.”
“죽고 싶으면 맘대로 해!”
금발 청년은 폭발 직전의 성질을 억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걸리기만 하면 그게 누구든 박살을 내고 말리라는 험악한 기운을 노골적으로 뿜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브를 걸친 샌님 타입의 심약해 보이는 데프론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금발 청년은 잔인하게 미소 지으며 으르렁거렸다.
“정말로 살기 싫다 이거지, 데프론?”
“찾았사옵니다.”
“뭘 찾아? 묏자리? 훗! 만반에 준비를 해놓고 찾아왔구나.”
“가스파르 사파이어.”
“뭣?!”
“가스파르 사파이어, 그의 위치를 찾았사옵니다.”
데프론은 묵묵한 얼굴로 다시 한 번 대답했다.
“그, 그게 정말인가?”
“네.”
“으하하하하! 가스파르… 드디어 걸려들었구나! 크하하하하!”
데프론의 완곡한 대답에 금발 청년은 광기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업무 책상 옆에 기대 놓은 검을 집어 들었다.
철컹!
“크흐흐… 가자!”
“아니 되옵니다. 기사단을…….”
“닥치고 앞장서!”
제9화 열혈 바보들(1)
가스파르는 한낮이 되어서야 잠이 깼다.
등허리를 부드럽게 받쳐 주는 탄력 좋은 매트리스. 햇볕에 따사로운 향기가 묻어나는 리넨 이불이 몸에 감긴 부드러운 감촉. 오랜만에 느껴보는 안락함이 좋아서 잠이 깨고도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감정이 없었기에 딱히 소유욕이라는 마음은 들지 않았으나 육신은 안락함을 애절하게 호소하며 허우적거렸다.
“침대도 필요한 거였어. 와이번을 더 많이 잡아야겠네.”
진실로 소유욕과는 무관하게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던 육체에 의한 본능에 가까운 몸의 정당한 요구였다.
허기가 졌다.
상체를 일으켰다. 전날 벗어 두었던 옷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남작 성의 하녀가 세탁을 하기 위해서 모두 가져간 모양이었다.
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녀가 돌아온 모양이다.
가스파르는 얇은 리넨 이불을 하반신에 둘렀다.
“들어와.”
몸을 보인다고 해서 부끄러운 감정이 들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 여성은 당황하거나 두려움, 혹은 불쾌감을 가질 수 있기에 한 행동이었다. 한때 예절과 예법에 절어 있던 귀족이었던 탓에 지극히 몸에 밴 자연스러운 버릇이었다.
하녀들이 세숫대야와 세면도구를 가지고 들어왔다.
“세안을 도와 드리겠어요.”
“응.”
가스파르는 당연하게도 하녀들에게 자신을 맡겼다.
하녀 하나가 그의 벗은 목에 수건을 둘러주었다. 그리곤 따뜻한 물로 적신 수건으로 먼저 얼굴을 닦아주었다.
다른 하녀가 거품을 턱에 바르고 면도를 해주었다. 다음은 머리를 감고, 세안을 하고, 다시 머리를 손질해 주었다.
“옷을 입혀드리겠어요.”
새 셔츠와 바지를 든 하녀가 다가와 말했다.
“놓고 나가.”
“네. 식사가 마련되어 있어요. 식당으로 안내해 드리겠어요.”
“응.”
“그럼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어요.”
하녀들이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가 의복을 제외하고 들고 왔던 모든 것을 가지고 우르르 몰려나갔다.
가스파르는 새 옷을 입었다. 10개월 만에 접하는 빳빳한 옷감의 감촉을 음미해 보았다. 옷의 디자인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몸에 잘 맞으니 몸이 좋다고 하였다.
하녀의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내려가니 역시 새 드레스로 갈아입은 샤넬리아가 멀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샤넬리아가 제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드레스 좋아요. 샤넬리아, 성에서 살래요.”
“불가.”
“왜요?”
“엔젤은 숲에서 살아야 해.”
“왜요?”
“오우거는 숲을 지배하기 위해서 강해져. 숲을 떠나게 되면 그 반대가 될 거야.”
그의 대답에 샤넬리아의 시선이 식탁 앞에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는 엔젤에게로 옮겨졌다.
“육아는 어려워요.”
어디서 주워들은 게 있나 본데 너도 아직 애기 거든? 가스파르는 차분히 샤넬리아를 설득했다.
“우리 마을도 튼튼하게 축성할 거야. 푹신한 침대도 구하고, 옷감도 구할 거야. 그러려고 주드로가 와이번을 포획하러 간 거야.”
“네.”
샤넬리아는 그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곧 웬슬라니 남작이 도착했고, 와이번 멀미로 해쓱해진 유크가 바로 뒤따라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