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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심장기사단 1 (21화)
제9화 열혈 바보들(2)
유크가 요전 비행 때보다 더 초췌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웬슬라니 남작 때문인지도 몰랐다. 새벽녘 가스파르를 향해 눈을 부라리면서 ‘저 인간하고는 도무지 대화가 안 돼.’라고 중얼거린 후 유크를 끌고 갔었다.
유크의 피곤에 절어 있는 모습을 보니 밤새 추궁을 해댔을 것이 분명했다.
“손님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웬슬라니 남작이 형식적인 사과를 하고 자리에 앉자,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와 향긋하고도 따뜻한 요리가 식탁을 가득 채웠다.
“차린 것이 퍽 많으니, 많이 드시오.”
웬슬라니 남작이 조금은 빈정거리는 투로 권했다. 그리곤 가스파르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것이 ‘정말로 감정이 없나?’하고 확인해 보려는 그런 모양새였다.
가스파르는 맛있는 요리를 먹으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돈을 벌어본 경험이 전무했다.
“와이번으로 모든 것을 갖출 수 있을까?”
“예?”
훌륭한 요리를 마주하고도 쓴 물을 올리고 있던 유크가 고개를 돌려왔다.
“큰돈을 벌어야겠어.”
“왕궁에 제 발로 찾아가시면 100만 골드가 저절로 들어올 거예요.”
“그건 불가.”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것에는 이상하게도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아참! 그러고 보니 오늘이 호버트 상단이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어요. 호버트 아저씨와 흥정을 해야 하는데.”
“이거 먹고 가면 늦어?”
“와이번이 있으니까 오늘 안으로만 출발하면 돼요. 하지만 그러면 웬슬라니 성이…….”
유크는 웬슬라니 남작을 힐끔 보면서 뒷말을 흐렸다.
삼연합 귀족이 병사를 잃고 물러갔다. 하지만 그들은 또다시 병사를 끌고 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 확신을 하는 이유는, 웬슬라니 남작이 삼연합 귀족의 속을 좀 긁어보자고 대충 찍어서 말한 ‘나탈리아 자살 사건’이 정곡을 찌르는 것과 동시에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머저란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식사를 끝낸 가스파르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유크에게 말했다.
“가자.”
“이대로 돌아가자고요?”
유크가 실망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나 돈 벌러 가야 해.”
“돈을 주겠소.”
웬슬라니 남작이 완고한 얼굴로 제안했다.
“다 털렸다며?”
그 질문에 웬슬라니 남작이 얼음에 재 놓았던 포도주 병을 집어 들었다.
“보시오.”
코르크 마개를 따지 않은 채 가스파르에게 넘겼다.
웬슬라니 남작이 의외로 매너가 부족한 모양이라고 생각한 가스파르는 순전히 손가락의 악력으로 코르크 마개를 땄다. 그리곤 병 주둥이에 입을 맞추고 홀짝 맛보았다.
‘맛있다.’
혀끝에 이는 달콤함, 목구멍을 타고 들어갈 때의 감미로움, 폭포수처럼 위장에 쏟아져 내리는 짜릿함, 다시 안개처럼 전신으로 퍼지면서 달근달근 몽롱해져 가는 기분은 몸이 사랑받는 절정의 느낌이었다.
꿀꺽꿀꺽!
반병을 단숨에 들이키는 때에 웬슬라니 남작의 경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그 귀한 걸… 라벨을 살펴보라고 했지 누가 마시라고 했소? 아직 나도 맛보지 못한 걸! 당장 이리 내시오!”
치사하게 웬슬라니 남작이 와인을 빼앗았다.
“줬잖아?”
“주긴 뭘 줘!”
가스파르가 손을 내밀자 웬슬라니 남작은 뒤로 성큼 물러났다. 가스파르가 한 발 내딛자 웬슬라니 남작이 기겁을 하더니 병을 제 입에 물었다.
“에잇!”
그리고 완샷.
벌컥벌컥!
“크하아아아아! 과연 좋구나!”
웬슬라니 남작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목구멍으로 홀라당 털어 넘긴 후 시원하게 목 울림을 내었다.
가스파르는 빈 병을 보며 아쉬워했다, 혀가. 그런 그에게 웬슬라니 남작이 빈 병을 또 내밀었다.
“제조 년 월 일을 잘 살펴보시오.”
람보그니 프라지니 듀 레비우스 11년 11. 11.
람보그니가 누구인지 알게 뭔가? 가스파르는 그래서 뭐? 하는 눈빛으로 웬슬라니 남작을 쳐다봤다.
웬슬라니 남작이 답답하다는 양 제 가슴팍을 치다가 병을 빼앗아서 유크에게 넘겼다.
“유크. 자네가 설명을 좀 해주게.”
“예에, 남작님.”
유크가 어정쩡하게 대답하고는 라벨에 시선을 돌렸다. 곧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곤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달달 떨리는 손가락을 꼽으면서 셈을 하기 시작했다.
“카르셰 폐하 2년, 밀러 폐하 21년, 스트롱 폐하 33년, 커터 폐하 17년, 람보그니 폐하 37년. 빼기 11년… 헉! 99년인가?”
“유크. 역대 폐하들의 존함과 집권 연도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것을 보니 역사 공부를 좀 한 모양이구나.”
웬슬라니 남작은 경악한 얼굴에 유크를 뿌듯한 눈빛으로 보면서 칭찬을 했다.
“정말입니까? 이게 정말 99년이나 숙성시킨 포도주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네. 자 보게나. 이게 왕가의 인장이라네.”
제조 년 월 일 끝에 큼지막한 직인이 찍혀 있었다.
“현 세대까지 같은 인장이 쭉 내려오고 있지. 당시 우리 웬슬라니의 고조부께서는 100년 숙성의 기법을 개발하시고 이 라벨을 만들어 람보그니 폐하께 보냈었지. 100년 후에 이 포도주가 유통되었을 때 진품임을 증언해 줄 것을 왕실에 확실히 요청했던 것일세.”
“이 사실을 증명할 자료도 있나요?”
“당시 람보그니 폐하께서 승인한 계약서가 있네.”
“계약서요?”
“100년산 포도주가 유통될 때마다 열 병씩 왕실에 진상하라는 조건하에 승인한 거래였다네.”
“아! 그러면 왕실에도 같은 승인서가 있겠네요.”
“그렇지.”
“그럼 엄청나겠어요. 레비우스 왕가가 증명하는 100년산 포도주라니!”
“아직은 아니라네. 100년을 채우려면 아직 6개월이 남아 있어. 그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이 될 이것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있는 거라네.”
웬슬라니 남작은 말을 잠시 중단하고는 왠지 모를 분노를 끌어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정작 때가 되어선 머저란 놈 때문에 운송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으드득!”
“아아아.”
가스파르는 유크의 감탄성 섞인 침음을 들으면서 100년산 포도주의 실체와 위력, 세상에 나갔을 때의 파장을 가늠해 보았다.
웬슬라니 남작이 그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우쭐한 얼굴로 제안했다.
“그대에게도 열 병을 주겠소. 거래합시다.”
가스파르는 유크를 돌아보았다.
“유크. 열 병으로 침대를 몇 개나 구할 수 있지?”
“침대요?”
유크는 가스파르의 말이 뜬금없다고 생각했는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웬슬라니 남작을 돌아봤다. 웬슬라니 남작이 협상을 하려는 기세로 물었다.
“어느 등급으로 구하려는 것이요?”
“어제 내가 잔 방에 침대면 돼.”
“그런 것이라면 덤으로 드리겠소.”
웬슬라니 남작의 대답에 가스파르는 갈등했다. 달콤한 맛을 단단히 본 혀와 포근함에 포로가 된 등짝이 격렬하게 싸웠다.
‘와인은 마시면 그걸로 끝이지만 침대는 영구적이니까.’
주와 덤이 싸워서 덤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사실 둘 모두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니 결과적으로 혀와 등짝의 쓸모없는 갈등이었다.
“111개야.”
“배, 백열한 개나? 하하… 무, 문제없소.”
웬슬라니 남작은 조금은 난감한 기색으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 * *
엘코크 마을과 호버트 상단과의 거래 협상은 유크가 솔선수범으로 나서서 주도해 나갔다.
“엘코크 마을에 특산물은 단연코 와이번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그렇군.”
상단주 호버트가 두려운 기색으로 빅브래드를 힐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크는 조금은 거만스러운 얼굴로 제멋대로 상품화시킨 와이번에 대한 제품 설명을 이어 나갔다.
“지금은 길들여진 지 얼마 안 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길들여서 시중에 내놓으면 많은 귀족들이 벌떼처럼 몰려들 거예요.”
“그렇겠지.”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강맹하고 하니 방어와 공격, 양쪽 모두 뛰어난 전투 병력이라 할 수 있죠. 특히 이동수단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최대 매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유크의 말에 호버트가 눈빛을 빛냈다.
“그것도 명마 속도의 열 배 이상을 상회하고, 어지간해서는 지치는 일도 없으니 엘리고스 숲에서 수도까지 단 하루면 충분할 겁니다.”
열 배. 말이 좋아 열 배다.
유크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말이 달리는 속도에 두 배만 해도 엄청난 풍압이 날카로운 회초리처럼 얼굴을 휘갈기고 옷이 찢길 정도였다.
“허허허! 굉장하군.”
“무엇보다 귀족은 자신들의 권위와 품격을 매우 따지는 부류입니다. 어떤 귀족이 와이번을 타고 하늘을 유유히 날아다닌다면, 세상 제일이라 칭송받는 명마를 소유한 귀족일지라도 와이번을 가지지 못하게 되면 자신에게 초라함을 느끼게 될 거예요.”
호버트가 깊이 동감한다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부터도 혹할 지경인데 귀족이라면 더 할 테지.”
“품위 유지의 대세는 와이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겠죠. 자존심이 강하고 우월감에 사로잡힌 고위 귀족일수록 돈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암!”
“유행은 폭풍과 같아요. 처음엔 미풍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커져서 순식간에 거대해지고 삽시간에 쓸어버리는 폭풍이요. 그렇게 되면 향후 5년 안에 와이번을 얻지 못한 귀족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될 겁니다.”
끄덕끄덕.
“그 이야기를 내게 하는 이유가 무언가?”
호버트의 입은 그렇게 묻고 있지만 눈빛은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가스파르님께서는 화전민 마을을 물신양면으로 돕는 호버트 아저씨의 마음이 가상하다고 칭찬하시면서, 와이번의 외판권을 호버트 상단에 전권 위임하겠다고 하셨어요.”
“헉! 그게 정말인가?”
“예, 호버트 아저씨. 호버트 상단이 성장해서 대륙으로 쭉쭉 뻗어 나간다면 많은 양민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면서요.”
호버트가 유크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네, 유크.”
“제가 아니라 가스파르님의 결정이셨어요.”
유크는 가스파르를 힐끔 보면서 슬며시 손을 뺐다.
“자네가 우리 호버트 상단에 대해서 좋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겠는가. 고맙네.”
“제가 아무리 잘 말했어도 가스파르님께서 다른 상단을 알아보라고 하셨다면 말짱 헛일이지죠.”
유크의 재차 유도의 말에 호버트가 그제야 눈치를 채고는 아차 싶은 얼굴을 하였다. 가스파르의 앞에 넙죽 절하였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스파르님의 고매한 뜻에 따라서 초심을 잃지 않고 서민을 위한 양심적인 상인이 되겠습니다.”
고매한 뜻? 가스파르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하하… 호버트 아저씨. 가스파르님은 귀족이시라 금전에 관련한 것엔 직접 언급하시는 것을 경멸하세요. 이야기는 저하고… 참! 첫 거래는 와이번의 발톱으로 하겠어요.”
“와이번의 발톱?”
“저기 암컷들에게서 뽑은 것들이에요.”
“오오! 와이번의 발톱을 증거로 제시한다면 외판을 하는데 훨씬 수월하겠구먼.”
“제품 광고는 먼저 엘코크 마을에서 시행할 거예요.”
“그건 무슨 말이지?”
호버트가 약간 불안한 얼굴을 하였다. 유크는 이 상황을 한껏 즐기는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설명을 하였다.
“이번에 웬슬라니 남작님과의 거래가 있어서 수도에 다녀오게 되었어요. 그때 와이번을 타고 갈 참이에요. 사람에게 길들여진 와이번을 보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겠지만 끝내 현실을 인정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소문이 소문을 더해서 널리 퍼져 나가게 될 거고요.”
“그렇군. 그러면 광고와 판매가 더 수월해지겠어. 유크! 정말 고맙네. 고맙습니다, 가스파르님!”
유크는 그 후로 식량이며, 건축자재며,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유크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가스파르는 유크가 제법 수완이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크는 호버트에게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뜯어내었다.
호버트는 여러 도시에서 구입하고 화전민 마을을 순회하면서 물물교환으로 모은 물품 상당수를 엘코크 마을에 풀어놓았다. 대신 빈 수레엔 와이번 발톱이 담긴 자루를 싣고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갔다.
그만큼 호버트는 와이번 시판에 사업성과 성공을 확신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