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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심장기사단 1 (22화)
제9화 열혈 바보들(3)
가스파르는 웬슬라니 영지로 돌아가기 전 들벅 마을에 들렸다.
“사베나. 웬슬라니에 갈래?”
“아니요.”
“웬슬라니 성에 침대가 푹신해.”
“그래서요?”
“곧 아기가 태어날 거잖아. 쾌적한 환경에서 출산을 하는 것이 산모에게도 아기에게도 좋을 거야.”
“우리가 살 곳은 어디죠?”
“엘코크.”
“그럼 아기에게 엘코크를 고향으로 줄래요.”
생각해 보니 아기는 엘코크의 인구를 처음으로 불려줄 아주 귀중한 존재였다. 그런 것을 외부에서 태어나게 한다는 것은 아기가 마땅히 누려야 할 고향과 소속감을 임의로 박탈하는 것과 같았다.
사람이란 자고로 자신이 나고 자란 곳에 애정과 각별함을 느끼고 매우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다.
“호버트가 쓸 만한 것들을 놓고 갔어. 그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
“네.”
가스파르는 웬슬라니로 가기 위해서 등을 돌렸다.
“가스파르님.”
사베나가 할 말이 남아 있는지 그를 불러 세웠다.
“열흘 후래요.”
“뭐가?”
“아기가 나오는 날이요. 이름 지어주세요.”
“아기 이름은 부모가 지어야 하는 거 아니야?”
“바보 같은 부가티가 아기가 생긴지도 모르고 죽었잖아요. 그리고 최고의 사람이 이름을 지어주면 아기에게 명예로운 일이고 축복받는 일이랬어요.”
“최고의 사람?”
“가스파르님은 사파이어 공국의 공왕이시잖아요. 저는 비록 바렌치노 왕국의 귀족이었지만, 반역에 몰려서 지금은 이렇게 가스파르님을 따르게 되었잖아요. 그러니 우리 엘코크에서 최고의 통치자는 가스파르님이시죠.”
“알았어.”
가스파르는 수긍한 얼굴로 빅브래드에 탑승했다.
“유크, 타.”
“고, 공왕이셨어요?”
유크가 황망한 표정으로 아래턱을 덜덜 떨면서 물었다.
“응.”
“아으으, 현기증이…….”
유크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가스파르는 다른 사람을 호명하느라 신경 쓰지 않았다.
“드라세나, 기비니에, 녹시안느, 제노시아. 따라와.”
“네.”
네 명의 여자는 왜냐고 묻지도 않고 와이번 두 마리에 나눠 탔다.
가스파르는 데리고 온 엘코크의 여인과 두 마리의 와이번을 방어를 목적으로 웬슬라니 영주성에 배치하였다.
다음날 이른 아침.
“부탁드리겠소, 가스파르.”
“응.”
가스파르는 웬슬라니 남작이 건네는 와인 상자와 서신을 받았다.
와인은 세노이크 후작에게 주는 뇌물용, 혹은 선전용 선물이었다. 6개월 후 와인이 시판될 때 영향력 있는 세노이크 후작의 입을 통해 광고가 되길 바라서 준비한 것이었다. 물론 대귀족을 빈손으로 찾아갈 수 없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서신은 삼연합 귀족의 미심쩍은 행동에 대한 고발이었다. 그러나 웬슬라니를 구원해 달라는 비굴한 단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럴 것이 세노이크 후작이 삼연합 귀족들을 본격적으로 수사하게 되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삼연합 귀족이 자동적으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등 굽실거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웬슬라니 남작이 마지막으로 작지만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내밀었다.
“현재 영지의 사정이 좋지 않아서 많이 넣지는 못하였소. 약소하지만 경비로 쓰시오.”
“응.”
가스파르는 돈주머니를 받고 돌아섰다.
“이보시오, 가스파르. 예의상으로나마 잘 쓰겠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오?”
“잘 쓸게.”
“제길! 나름대로 신경 써서 넣었는데.”
“나름대로 신경 써서 약소하게 넣었다고?”
“아우우우… 내가 저 인간하고 말을 말아야지. 쳇!”
웬슬라니 남작의 말은 영지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생각해서 넉넉히 넣었다, 라고 귀족의 고리타분한 예법상 겸양을 떨며 말했던 것이다.
가스파르는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퍽 치는 웬슬라니 남작을 뒤로하고 빅브래드에게로 갔다.
녀석의 등에는 야영 도구들이 잔득 실려 있었다. 웬슬라니 남작과 유크가 동분서주하면서 준비한 결과물이었다.
야영 도구를 애써 준비한 이유는 와이번을 데리고 도시로 들어가는 일이 난감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샤넬리아는 이번 수도행에 따라붙었다. 엔젤을 안고 탑승한 샤넬리아도 나름대로 만반에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빅브래드1처의 등에는 닭장이 통째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샤넬리아. 그 닭들은 뭐야?”
“엔젤의 간식이에요. 성장기에는 잘 먹여야 한다고 했어요.”
대강 훑어보니 30마리가 족히 넘는 듯했다. 가스파르는 한두 마리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침을 삼켰다. 닭들이 제 운명을 아는지 날개를 퍼덕이며 시끄럽게 울어댔다.
* * *
빅브래드는 말이 달리는 속도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비행을 했다. 그 이상은 유크가 버티지를 못해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가스파르님. 저기요.”
유크가 그의 등을 치면서 들판을 가리켰다.
“또 토할 것 같아?”
“그게 아니고요, 저기서 점심식사를 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마침 벌판을 가로지르는 시원한 개울과 그늘을 넓게 드리우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는 숲이 있어서 와이번들이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여건까지 갖추고 있었다.
“착륙.”
빅브래드가 순종적인 울음소리를 내면서 부드럽게 착지했다. 속도를 내지는 않았지만 장시간 비행을 한 탓에 와이번들도 휴식이 필요했고, 퍽 반가운 모양이었다.
가스파르는 바닥으로 내려서기 전에 호두알만 한 아지랑이를 와이번의 몸에 붙여놓았다.
“가서 밥 먹고 와.”
끼이이이이―
탓!
퍼덕퍼덕!
와이번들이 긴 울음소리를 내면서 쏜살같이 숲을 향해 날아갔다. 유크가 걱정이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도망가지 않을까요?”
전날 새벽녘에 먹이를 찾을 수 있도록 와이번들을 풀어준 적이 있었다. 녀석들은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는데 유크가 눈을 뜨기 전 아침에 돌아왔다.
그럼에도 아지랑이를 붙여놓은 것은 혹시 모를 안전 장치였다. 이를테면 긴급호출 등을 할 수 있는 용도의 장치.
점심은 웬슬라니 성에서 싸온 푸짐한 도시락이 있어서 따로 준비하느라 부산을 떨 필요가 없었다.
샤넬리아는 엔젤에게 닭 두 마리를 꺼내주었다. 하지만 엔젤은 닭을 먹지 않고 뭐라고 한참 울음소리를 냈다.
꾸워, 꾸워.
샤넬리아가 냇가에서 손을 씻고 있는 가스파르에게로 자박자박 걸어왔다.
“엔젤이 편식을 해요.”
“닭이 먹기 싫대?”
“그건 아니고요, 구워 달라고 해요.”
그동안 사람들 손에 길들여진 탓일까. 엔젤은 엘코크의 일원이 되면서부터 줄곧 익힌 음식을 먹어왔다. 생후 일주일도 안 되었던 엔젤이었기에 식습성이 쉬이 바뀔 수 있었던 모양이다.
가스파르는 유크를 돌아봤다. 유크는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투덜거렸다.
“에잇! 오우거 주제에 까다롭게 굴기는!”
유크는 닭을 양손에 들고 꾸워꾸워만 연발하는 엔젤에게로 갔다.
“엔젤아. 넌 몬스터 중에서도 최강이라 불리는, 명색이 오우거야. 이런 건 그냥 와구와구 씹어 먹어야지 몬스터답지.”
꾸워꾸워!
“그놈 참. 울음소리가 사람 말이랑 어찌 그리도 비슷한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오우거가 사람 말을 하는 줄로 착각하겠어. 쯧!”
꾸워꾸워!
“엔젤아. 육식동물은 날고기를 먹으면서 동물의 피로 수분과 더 많은 영양섭취를 하는 법이거든? 이거 구우면 수분이 다 날아가잖아.”
“구워줘.”
샤넬리아가 유크의 옷을 잡아당기며 종용했다.
유크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이 씩씩한 오우거로 성장하려면 생고기를 먹어야 돼. 또 지금은 이렇게 작지만 1년에 4,50cm씩 자라게 될 거야. 그럼 더 많은 양을 먹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커다란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먹게 될 거야. 그걸 매일매일 삼시 세 끼씩 어떻게 구워줘?”
“…….”
“그리고 날고기를 못 먹게 되면 나중에 엔젤이 따로 떨어졌을 땐 사냥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굶어죽게 될 거야. 다른 오우거들이 엔젤을 바보 오우거라고 놀리게 될 거고. 엔젤을 강하게 키우려면 아무거나 잘 먹도록 타일러야 해.”
샤넬리아는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꾸워! 꾸워!
엔젤은 구슬프게 우는 것이 통하지 않자 땡깡을 부리기에 이르렀다. 손에 쥐고 있던 닭을 허공으로 집어던지고 바닥을 떼굴떼굴 굴러다녔다.
꼬꼬댁!
꾸워! 꾸워어엉엉!
“엔젤. 닭을 잡아와.”
꾸어엉!
“맴매할 거야.”
샤넬리아가 포크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엔젤이 화들짝 놀라서 이미 저만치 도망치고 있는 닭들을 쫓기 시작했다.
“그래, 샤넬리아, 잘했어. 사랑할수록 강하게 키우는 거야.”
“응.”
“엔젤에게 사냥하는 법도 가르쳐야 하니까 앞으로는 닭을 손에 쥐어주지 말고 아예 풀어서 잡아먹도록 유도 해. 그러면 엔젤이 오우거 중에서도 최강 오우거로 거듭날 수 있을 거야.”
“응.”
샤넬리아의 냉정한 결단으로 엔젤은 닭들을 하염없이 쫓아다녀야 했다. 그런데 오늘 안으로 먹을 수는 있을는지.
“미안하다, 엔젤아.”
“뭐가 미안한데?”
잠잠히 듣고 있던 가스파르가 물었다.
“아, 아니… 그저 엔젤이 좀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야생적인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 것 같아서 그런 것이지 제가 좀 편하자고 엔젤에게 생고기를 먹게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에요.”
가스파르는 횡설수설하는 유크를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그, 그게 그러니까 엔젤이 저리 동분서주하면서도 쫄딱 굶게 생겼으니 그게 안타까워서 그런 것이죠, 뭐. 그런 의도로 미안하다고 한 거였어요. 절대로 오해하지 마세요.”
“좀?”
조금 강해질 것이냐는 가스파르의 질문이었다.
“아니… 많이요.”
많이 편해질 것이라는 양심이 찔끔한 유크의 대답이었다.
“엔젤이 많이 강해지겠구나.”
“예??”
어쨌든 이야기가 통하였으니(?) 됐다.
점심식사가 끝나갈 무렵.
20의 인마가 이편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왔다.
멀리서도 번쩍거리는 플레이트 메일, 허리에 찬 돈 꽤나 바른 명검, 장중하게 휘날리는 망토. 땅을 지칠 때마다 탄력적인 근육이 역동적으로 꿈틀거리고 윤기가 자르르 혈통 좋은 준마.
특히 준마는 무를 숭상하는 남자라면 모두 얻고자 탐을 낼만 한 녀석이었다.
탄탄하게 발달한 흉부 사이가 넓어서 폐활량이 클 것이고, 폐활량이 크다는 것은 오래 달려도 잘 지치지 않음을 뜻했다. 보통의 군마보다 근육질임에도 불구하고 늘씬하게 보이는 이유는 다리가 월등하게 긴 탓일 것이다. 불끈불끈거림에도 잘빠진 등허리와 하복부. 잘생긴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빛까지.
가스파르도 예전 같았으면 저 준마의 매력에 폭 빠져서 심장이 발딱발딱 뛰고 숨을 할딱할딱 대고 말았을 것이다.
감정을 잃은 지금은 육질이 꽤나 질길 것 같다는 생각에 잘빠진 준마를 보고도 별 감흥이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딱 보기에 완전무장을 하고 출병을 하는 기사단이었다.
두두두두―
“기사단 정지!”
“워워!”
키히히히힝!
흙을 거칠게 튀기며 20의 인마가 일시에 정지했다. 하나같은 동작으로 기계적인 완벽한 멈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실력이 꽤 출중한 기사단이 분명했다.
선두에서 달려오면서 기사단을 지휘했던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자네들.”
그렇게 입을 연 중년의 기사는 숨이 가빴는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가 탄 티 한 점 없이 새까만 흑마도 더운 콧김을 거칠게 내뿜고 있었다.
“와이번을 봤는가? 와이번 두 마리가 이쪽으로 날아왔는데, 보았는가?”
“응.”
가스파르의 대답에 질문을 했던 중년기사가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상대의 행동에 애초에 관심이 없는 가스파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로 갔지?”
“저기로 갔어.”
“자네. 원래 그렇게 말이 짧은가?”
“응.”
중년기사는 가스파르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한참 눈을 부라렸다.
“귀족인가?”
“응.”
“그렇군…….”
중년기사는 미심쩍은 얼굴로 가스파르를 꿰뚫듯이 노려보았다. 그래도 가스파르에게서 표정의 변화가 없자 체념한 투로 수하들에게로 돌아섰다.
“난데없이 출현한 와이번 떼로 인하여 백성들이 극도의 공포에 떨고 있다. 우리는 재난에 빠진 신민을 반드시 구출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그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기사들의 수치이다. 그대들이 뒤쳐질수록 도탄에 빠진 가엾은 신민은 두려움에 떨다가 추악한 괴물의 뱃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허약한 육신과 나태한 정신을 드러내어 기사의 정신과 명예를 스스로 실추하겠는가?”
“아닙니다!”
“수렁에 빠진 신민을 구하고 기사의 명예를 지키겠는가!”
“옙!”
“자랑스러운 나의 기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이렷!”
“히럇!”
“핫! 핫!”
두두두두두―
20의 인마가 가스파르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질풍처럼 달려갔다.
가스파르는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인마를 가리키며 유크에게 물었다.
“쟤들 뭐야?”
“글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