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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3(9화)
3장 천하영웅대회(4)


“화산의 영호명이 서문 공자께 인사드립니다.”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이번에는 영호명이 포권을 하며 서문해광에게 인사했다.
화산이라는 이름과 영호명의 제법 뛰어난 기세에 서문해광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설련이의 사제로군. 반갑네.”
영호명의 인사에 간단히 답례한 서문해광은 천룡 형제와 감씨 남매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서문유란을 향했다.
“혹시 너도 천하영웅대회에 참여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이미 우리 가문의 출전자는 다 정해진 상태다!”
서문해광이 못을 박 듯 서문유란에게 말했다.
“저는 제 힘으로 참가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무슨 용기가 생긴 것인지 서문유란이 반발했다.
“네가 기어이 가문의 결정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냐? 정녕 네가 가문을 위한다면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여 좋은 배필을 맞이하는 데 신경을 써야지, 어찌 선머슴처럼 검이나 휘두르려 하느냐! 대체 철이 없는 것이냐, 머리가 모자란 것이냐!”
얼굴이 붉게 변한 서문해광이 서문유란에게 소리쳤다.
“저는 여인이기보다 한 사람의 무인이 되고 싶습니다! 이미 절정의 경지에 다다랐고, 오라버니를 빼곤 가문의 후손들 중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이런 제가 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천하영웅대회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까! 저들 중 저를 이길 자가 대체 누구입니까!”
이제 서문유란은 완전히 악에 받쳐 소리치고 있었다.
서문해광과 함께 서 있던 서문세가 후기지수들의 얼굴이 홍시처럼 벌게졌다.
그들이 서문유란보다 실력이 모자란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듯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자칫 다른 이들에게 서문가의 사내들은 여인 하나도 이기지 못한다 비웃음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수련이와 설련이를 보아라! 그 아이들이 너처럼 천방지축 제멋대로 행동하고 돌아다니더냐! 그런데도 너보다 강호에서 훨씬 이름을 떨치고 있지 않느냐! 잘난 네 녀석의 무공을 누구 하나 알아주기나 하더냐! 모든 사람이 단지 사내 같은 계집이라 손가락질만 하지 않더냐!”
서문해광은 이제 손가락질까지 해 가며 서문유란을 질책했다.
입술을 꽉 깨문 서문유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저 녀석이 정말!’
순간, 천성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나서려 했다.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 유가장을 잊은 건 아니겠지! 섣부른 행동은 더 큰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끄응.’
천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숙의 말이 맞았다.
지금 당장은 서문유란이 모욕을 참으면 끝날 일이지만, 천성이나 다른 사람이 나선다면 남의 가문의 일에 함부로 참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문해광과 함께 온 서문세가의 인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거기다 천성은 실력을 감추어야 하는 상황.
지금 상태로 끼어들어 봐야 비웃음거리만 될 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천성은 목까지 치밀어 오른 욕지기를 간신히 삼켰다.
지금 천성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말씀이 조금 심하신 것 같군요. 예로부터 여자이면서도 강호의 고수로 꼽히던 무림의 선배분들이 많이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여자라 하여 무인이 될 수 없다 하겠습니까?”
의외로 천룡이 나섰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 발동한 것이다.
연약한 서문유란―천룡의 눈에는―이 핍박당한다 생각하니 연민이 생긴 것이다.
거기다 저번 술 시합 사건이 마음에 걸리기도 해서 다른 가문의 일임을 알지만 참지 못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이런! 형님이 나서다니, 골치 아프게 됐군요!’
천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잘못하면 일이 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음, 일단 사태를 조심히 지켜보자. 저들도 천룡만큼은 만만히 볼 수 없을 테니.]
“그대는 누구인데 남의 가문의 일에 나서는 것이오?”
서문해광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천룡에게 물었다.
“저는 삼선께 사사한 감숙 철혈문의 궁천룡이라 합니다.”
천룡은 상대방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삼선의 제자임을 먼저 밝혔다.
그에 눈썹을 치켜올린 서문해광이 천룡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삼선의 제자라면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가문의 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이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듯 보이는데다 공력도 보잘것없는 것이, 아마도 여인들 앞이라고 주제도 모르고 호기를 부리는 모양새였다.
“그대는 대체 우리 유란이와 무슨 관계요? 기둥서방이라도 되시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서문해광이 물었다.
천성과 일행들이 서문해광의 천박한 말투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천룡이 함부로 나섰다곤 하나 서문해광의 말은 문제가 있었다.
천룡뿐 아니라 서문유란까지 모욕하는 언사였기 때문이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그저 인연이 되어 무한으로 오는 동안 동행했을 뿐,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천룡이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신 때문에 괜히 서문유란의 입장이 더 곤란해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한데 무슨 자격으로 유란이와 가문 간의 문제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것이오? 오지랖도 넓구려.”
서문해광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천룡을 바라보았다.
실력도 없는 놈이 어딜 나서냐는 듯한 삐딱한 말투였다.
“서문 오라버니, 죄송합니다만,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오누이끼리 다투는 것이야말로 가문에 누가 되는 일이 아닌지요? 이쯤에서 그만두심이 두 분과 서문세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 보다 못한 제갈수련이 나섰다.
아무래도 서문해광이 여인인 자신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렇게 되자 서문해광도 더 이상 화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제갈수련의 말대로 여기서 서문유란과 다투어 보았자 강호인들에게 가문의 치부만 보여 주는 꼴이었으니.
“흥,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그대는 앞으로 조심하시오! 아무 데나 함부로 나서다간 언젠가 큰코다치는 수가 있을 것이오!”
천룡을 향해 일침을 날린 서문해광이 고개를 돌렸다.
“유란이, 너는 나와 함께 가자!”
그러고는 서문유란을 끌고 가려 했다.
더 이상 함부로 돌아다니며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싫습니다! 전 일행과 머무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결심을 내린 서문유란은 차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녀석이 정녕!”
분노로 얼굴이 달아오른 서문해광이 한참 동안 동생을 노려보다가 이를 악문 채 휙 몸을 돌리고는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서문세가의 일행들도 혀를 차며 서문해광을 따랐다.
아마도 서문유란의 행동에 대한 책망이리라.
서문유란은 화설련과 제갈수련의 위로를 받으며 숙소로 향했다.
천성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서문유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왜 항상 어둡고 근심에 쌓여 있는지 비로소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쯧쯧,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하는구나. 하지만 그래도 저 아이는 안 된다! 자고로 배필은 주변을 밝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야지, 아니면 일생이 가시밭길이 되는 법이다!]
무숙은 천성에게 단단히 일렀다.
하지만 천성의 마음은 이미 걷잡을 수 없었다.
서문유란에게 향한 마음을 돌리기엔 너무 늦은 것이다.

* * *

무림맹 맹주 집무실.
제갈휘가 문을 열고 들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게.”
남궁영이 사무적인 어투로 제갈휘를 맞이했다.
“마련 놈들은 어찌 되었나?”
“아쉽게도 사천 경계에서 놓쳤습니다. 하지만 놈들 중 살아 돌아간 자는 일곱에 불과합니다.”
제갈휘의 말에 남궁영은 고민 어린 표정을 지었다.
“여러모로 이상해. 놈들이 만일 후기지수들을 노렸다면 처음 만나자마자 공격해서 몰살시킨 후 몸을 숨기는 편이 훨씬 이득이야. 한데 마련의 녀석들은 지원대가 도착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머물러 있었어. 뭔가 그 자리를 뜰 수 없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는 이야기지.”
남궁영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거기다 확인한 바로는, 놀랍게도 놈들 중에 광무패왕(狂武覇王) 왕추가 함께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말에 남궁영이 의외라는 듯 제갈휘를 바라보았다.
“인상착의와 화경이 넘어서는 실력을 보면 거의 확실합니다.”
왕추가 함께했다는 것은 놈들의 목적이 무엇인진 몰라도, 상당히 중요한 임무를 띠고 이곳까지 왔음이 분명했다.
왕추는 화경 중엽의 고수.
거기다 마련 사대호법의 한 명이다.
그랬기에 그가 직접 나섰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인 것이다.
“무언가 있어 아무래도 제삼세력이 개입하고 있는 느낌이야. 공교롭게도 자꾸 마련과 충돌이 생기는 모양새야. 마련이나 우리나, 현재 전면전을 할 입장이 못 되잖아. 이건 서로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야.”
남궁영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이번 일로 마련과의 충돌은 불가피해졌습니다. 그들의 성격상 이번 사건을 그대로 넘길 리 없지요. 그렇다고 우리가 물러설 수도 없는 입장이니…….”
속 시원한 해결책이 없는 제갈휘 역시 말꼬리를 흐렸다.
강호가 혼란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련의 인물들이 무려 서른 명 가까이 죽었다.
경지를 보아 결코 낮은 지위의 인물들도 아니었다.
그러니 마련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무림맹 측도 대회 참가자를 비롯해 백호대와 청룡대의 대원까지 사십이 넘는 피해를 입었다.
서로가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어차피 정파의 영역을 먼저 침범한 것은 마련이었다.
중원 땅 모두가 정파의 허락을 받아야 통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정파의 인물을 상하게 했다면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아무래도 걸리는 것이, 처음 마련 측의 인물을 죽인 자들의 정체가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제갈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팽가도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났을 뿐, 모르는 자들이라 합니다. 절정이 넘어선 마련 고수를 창을 던져 단번에 격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알려지지도 않은 시골 문파의 문도가 그것을 너무 쉽게 해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 그들은 사건 이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제삼의 세력임이 분명하군. 대체 그들의 정체와 목적이 무엇일까?”
남궁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일단 강호의 혼란을 조장해 그 틈을 노려 세력을 키우거나, 무림을 집어삼킬 계획을 세우고 있을 가능성이 제일 큽니다.”
마련과 무림맹이 충돌하게 되면 양측 전력의 상당 부분이 약화될 것이 빤했다.
그사이, 힘의 공백을 치고 들어온다면 충분히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거기다 만일 놈들의 전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면 그 틈을 노려 강호를 집어삼킬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위험한 자들임에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놈들에게 자꾸 말려 들어가는 현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남궁영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마련에 연락을 넣어 보심은 어떻겠습니까?”
그때, 갑작스런 제갈휘의 제안에 남궁영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린가?”
“련주와 담판을 짓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련주도 보통 인물은 아니지요. 이번 일이 제삼세력에 의한 음모임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나 우리나 전면전으로 번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면 대화를 통해 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허허, 마련과 대화라…….”
남궁영이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