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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3(12화)
3장 천하영웅대회(7)


경기는 오십여 수 정도를 주고받은 후 양춘문 조평의 승리로 끝났다.
“와아아아아아!”
첫 승자가 나타나자 장내를 메운 참가자와 관중들이 환호성을 질러 조평을 축하해 주었다.
한동안 대결이 계속되다가 오후 늦게가 되어서야 천성의 차례가 왔다.
첫날의 거의 마지막 대결이었다.
“감숙 철혈문의 궁천성입니다!”
먼저 오른 천성이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하남 팔성문의 두진방이오! 아무래도 내가 오늘 운이 좋은가 보오. 후후.”
상대는 스물 중반쯤 보이는 무사로 권각을 사용하는 자였는데, 나이 어린 천성을 경시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훗!’
가소로운 두진방의 모습에 천성은 속으로 조소를 날렸다.
그와 동시에 온몸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이 근육을 팽팽하게 당겼다.
상대에 대한 긴장이라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무를 펼치는 것이 익숙치 않은 탓이었다.
“시작하라!”
심판관의 깃발이 올라가자 두 사람은 비무대 위를 돌며 상대방을 탐색했다.
‘일단 사 할의 힘만 사용해 봐야겠다!’
상대의 공력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기에 많은 힘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하압!”
앞으로 미끄러지듯 보법을 밟은 두진방이 천성의 허벅지를 노리며 발차기를 날렸다.
그러나 이미 인간의 감각을 뛰어넘은 천성에게는 너무도 느린 공격이었다.
타악!
가볍게 손을 움직여 공격을 막은 천성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두진방의 왼 주먹이 날아왔다.
스윽!
하지만 역시 천성의 눈엔 굼벵이와도 같은 느린 주먹이었다.
고개를 슬쩍 기울여 주먹을 피한 천성이 그대로 앞으로 전진하며 어깨를 들이밀었다.
“헛!”
깜짝 놀란 두진방이 급히 뒤로 물러서며 철판교의 수법으로 몸을 눕혔다.
후웅!
그러자 곧바로 몸을 튼 천성의 오른발이 두진성의 하체를 쓸었다.
퍼벅!
“우욱!”
중심을 받치고 있던 발목이 천성의 발길질에 차이며 두진방이 중심을 잃고 땅에 처박혔다.
천성은 서두르지 않고 잠시 공격을 멈췄다.
‘도무지 재미가 없어서 더 이상 놀아줄 수가 없겠군.’
천성은 내심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첫 상대의 실력이 너무 낮은 탓이었다.
기껏해야 이류 수준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재빨리 손으로 땅을 쳐 몸을 일으킨 두진방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천성의 실력에 놀란 모습이었다.
“운을 믿고 더 해 보시겠습니까?”
천성이 씨익 웃으며 두진방을 도발했다.
처음 그의 오만한 언사를 그대로 되돌려 준 것이다.
“흥!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치심에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진 두진방이 황소처럼 돌진해 왔다.
이미 실력 차가 분명한데다 이성까지 잃은 두진방의 공격에 순순히 당할 천성이 아니었다.
한 발짝 몸을 옆으로 피한 천성이 돌진하는 두진방의 다리를 걸었다.
쿠당탕!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한 두진방이 비무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 아예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하하하하!”
사방에서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두진방은 이미 실신한 상태였다.
“궁천성 승!”
심판관의 선언이 내려지자 천성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더불어 자신에게 보내는 많은 사람들의 환호성.
언제나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은밀하게 행동해야 했던 천성에게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동을 전해 주고 있었다.
‘이런 맛에 사람들이 명성을 날리려 애쓰는구나!’
그동안 천룡이 느꼈을 환희와 희열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과는 먼 이야기였다.
아니, 어쩌면 평생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환호를 즐기던 천성의 표정에 순간 씁쓸함이 스쳤다.
“이야! 천성이 최고! 역시 내 동생이다!”
“천성아! 축하한다!”
“오! 천성 소제, 제법인데!”
“잘했어요!”
비무대를 내려서던 천성이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천룡을 비롯한 일행들이 몰려와 자신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아마도 비무가 일찍 끝난 이들이 천성의 시합을 보러 모인 듯했다.
모두의 응원에 우울했던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
“그럼!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후후!”
짐짓 익살스런 얼굴로 천성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쯧쯧,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
천룡이 집게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혀를 찼다.
“다른 분들은 모두 예선을 통과하셨나요?”
천룡을 무시한 천성이 일행의 결과를 물었다.
“하하하! 당연하지! 천성 소제도 통과한 일차 예선을 이 감석보가 통과 못할 리가 없지!”
은근히 말을 놓으려 하는 감석보를 천성이 슬쩍 노려보았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통과했어. 서문 소저와 제갈 소저만 아직 예선을 치르지 못했지. 하지만 두 분 다 실력이 출중하니 일차 예선을 통과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거야.”
영호명의 설명에 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수련이 속한 조의 첫날 예선은 모두 끝난 상태였고, 서문유란이 속한 조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청명은 본선 직행이 결정된 후 일행과 헤어져 본선 직행자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경기를 마친 천성과 일행이 서문유란이 속한 비무대 쪽으로 움직일 때였다.
“어머, 이게 누구야! 왜 다 몰려 있어!”
고음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아름답다와 소란스럽다는 무척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으나, 이 여인을 표현하는 데는 참으로 적절했다.
“호호호호! 설련 언니, 수련 언니, 오랜만이야!”
천성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서문유란과 함께 폴짝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사봉 중 한 명인 모용혜였다.
모용혜는 그 미모와는 달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엉뚱함으로 사고뭉치로 소문이 자자했다.
쾌활하고 즉흥적인 그녀의 성격은 주변 사람들을 항상 긴장시켰다.
“어머! 일행분들이 계셨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모용혜라고 해요!”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뜬 모용혜가 땅바닥을 가리켰다.
“엇! 이게 모용? 이게 모용? 호호호호! 그 모용혜예요! 기억하기 쉽죠? 호호호호!”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지고 일행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도무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일행들을 본 모용혜의 눈꼬리가 치켜올라 갔다.
“하여튼 수준들이 안 맞아서 농담이 안 통해요! 호호호! 여하튼 반가워요!”
턱을 치켜든 채 팔짱을 낀 모용혜가 콧방귀를 한번 뀌는가 싶더니, 어느새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호들갑을 떨어댔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었다.
‘여, 여자 감석보가 나타난 것인가…….’
왠지 불안한 느낌이 천성의 뇌리를 강타했다.
“아, 참으로 아름답고 호탕하신 여협이시군요! 저는 섬서 대연문의 감석보라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감석보는 일생의 지기라도 만난 듯 기뻐했다.
약혼을 한 상태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사랑을 고백했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철혈문의 궁천룡이라 합니다!”
“어머, 그 소문의 주인공이시군요! 어쩜 인물도 훤하시네! 남자다, 남자!”
모용혜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이, 이 여인은 신부 후보에서 제외해야겠다.’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낀 천룡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화산의 영호명입니다.”
“호호호! 앞으로 누나라고 불러. 편하게 말 놓아도 되지?”
“저…… 소저의 나이가 어찌 되시기에…….”
당혹스러운 표정의 영호명이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 여인의 나이를 함부로 묻는 것은 실례야! 하지만 동생이 귀여우니까 특별히 알려 줄게! 이 어여쁘신 누님의 나이는 꽃다운 열여덟이야!”
“저, 저도 열여덟인데요…….”
영호명의 대답에 모용혜가 멈칫했다.
어딜 보아도 열다섯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앳된 모습의 영호명이었던 것이다.
“떽! 이 누나는 쓸데없이 자존심이나 부리는 남자들을 싫어해요!”
못 믿겠다는 듯 모용혜가 검지손가락을 흔들었다.
“사, 사실입니다만…….”
난감한 표정의 영호명이 거짓이 아님을 항변했다.
그에 눈썹을 치켜올린 모용혜가 갑자기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영호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모용혜를 바라보았다.
“호패 내놔 봐!”
모용혜의 단호한 태도에 일행들의 얼굴이 흑색으로 변했다.
결국 영호명은 머뭇거리다 품속에서 호패를 꺼냈다.
“헉!”
눈이 동그래진 모용혜가 호패와 영호명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씨익 웃었다.
“동갑이니 친구네! 그럼 우리 편하게 지내자구! 귀여운 친구! 호호호!”
영호명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듯한 느낌.
왠지 암울한 미래가 자신의 앞에 드리워진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것, 참으로 좋은 생각이십니다! 천룡 공자의 동생인 천성 소제도 영호 공자와 동갑이지요!”
갑자기 끼어든 감석보의 말에 천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머, 어머! 천룡 공자의 동생이라고?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구!”
결국 천성도 영호명이랑 한데 묶여 모용혜의 친구가 되어야 했다.
모용혜는 곧장 모용세가 사람들과 헤어져 천성 일행에 합류했다.

결국 서문유란과 제갈수련은 첫날 예선을 치르지 못했다.
일행은 탈락자 없이 모두 첫날 예선을 통과한 것을 기념해 한잔 마시자는 감석보의 제안에 숙소인 취향루로 향했다.
아직 서문유란과 제갈수련, 두 사람의 결과가 남아 있으니 섣부른 감이 있긴 했으나, 감석보는 내일 또 축하하면 된다는 말로 간단히 이의를 잠재웠다.
모용혜가 쌍수를 들고 환영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술자리 내내 서문유란의 표정이 좋지 않아 천성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아마도 오라비인 서문해광을 만난 일과 여인이면서도 당당히 본선 직행자 자리를 빼앗은 용혜란에게서 받은 충격 때문이리라.
간단한 술자리를 마친 일행은 다음 날을 준비하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