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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3(13화)
3장 천하영웅대회(8)


첫날 가장 화제가 된 일은 아무래도 용혜란의 본선 직행이었다.
숨어 있던 고수의 등장은 언제나 무림인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거기다 미모의 여인이라는 조건이 더해지면 폭발적인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천룡이었다.
사실 최근 가장 뜨거운 소문을 몰고 다니는 이가 천룡이었다.
하지만 강호에 출도한 지 이제 겨우 두 달 남짓에 불과했기에 그에 대한 모든 것이 아직은 신비에 싸여 있었다.
대부분의 이들은 천룡의 소문이 과장된 것이라 여겼고,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꾸며 낸 인물일 것이라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한데 소문의 주인공이 실제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생각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다.
당연히 천룡의 실력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천룡은 간단하게 일차 예선을 통과해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 외에는 특별한 이변이 없는, 대부분 무난한 결과들이었다.
원래 이변이라는 것이 결국 일어나기 매우 힘든 일을 뜻하기도 했고.

둘째 날은 첫날 못다 한 경기들을 치렀는데, 오전부터 여덟 개의 비무대에서 치혈한 대결들이 벌어졌다.
천성 일행은 서문유란과 제갈수련의 순서를 기다리며 여유 있게 각 비무대의 경기를 관람했다.
예상대로 서문유란과 제갈수련은 무난히 일차 예선을 통과했다.
제갈수련은 오전 일찍 경기를 끝냈고, 서문유란은 정오가 될 때 즈음 경기를 끝냈다.
“수고했습니다, 서문 소저!”
“하하하! 오늘이야말로 제대로 축하해 봅시다!”
일행 모두가 서문유란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아직 경기가 많이 남았으니 다른 이들의 대결을 좀 더 지켜보도록 하죠.”
제갈수련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이어질 경기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이들이다.
그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 둘수록 승리할 확률도 높아지는 것이다.
거기다 다른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는 것도 실력 향상에 상당한 도움이 되는 법.
일행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참가자들의 대결을 구경했다.
모용혜는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며 비무대 사이를 오갔다.
대부분 구파일방과 팔대세가의 제자들이 무난하게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그렇게 일행이 팔번 비무대에 다다랐을 때였다.
“우와아아아!”
“대단한데!”
“저럴 수가!”
갑작스런 관중들의 환호 소리에 일행의 시선이 비무대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팽가의 대표 중 한 명인 팽인호가 시합을 펼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무명의 상대에게 밀리고 있었다.
“저 사람은 마련과의 분쟁에서 살아남은 후기지수로군요!”
제갈수련이 팽인호의 상대를 보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 그렇군요! 백담이던가? 협의문인가 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문파의 제자였는데…….”
감석보도 그제야 기억이 난 듯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때도 실력이 제법 괜찮다 느꼈는데, 저 정도면 상당하군요.”
백담의 검술은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이었다.
공력이 그리 뛰어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빠른 움직임과 타고난 힘으로 위력적인 검초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눈으로 쫓기 쉽지 않을 정도로 빠른 백담의 공격에 팽인호는 거듭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움직임이 상당히 빨라요.’
[군더더기가 없고 힘도 상당하구나.]
무숙 역시 백담의 움직임을 칭찬했다.
비무대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백담에게 열광했다.
관중들은 항상 약자를 응원하기 마련.
거대 세가인 팽가의 대표를 무명의 청년이 몰아붙이는 모습은 대부분 약자인 군중들에게 대리만족을 주고 있었다.
“엇!”
그때, 계속 뒤로 물러서던 팽인호가 결국 중심을 잃고 말았다.
쉬이익!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담의 검이 움직였다.
“백담 승!”
비무대 바닥에 주저앉은 팽인호의 목에 어느새 백담의 검이 들이대어져 있었다.
“우와아아아!”
심판관의 선언과 함께 관중들이 함성을 터뜨렸다.
상승 무공을 쓴 것도 아니고,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검공을 사용해 팽인호라는 거목을 무너뜨린 백담에 대한 환호였다.
중소 문파 출신의 참가자들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백담이 몸소 보여 준 것이다.
결국 둘째 날의 최고 영웅은 백담이 되었고, 천룡과 함께 중소 문파 후기지수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두 번째 참가자가 되었다.



4장 비행소년 천성(두 번째 각성)(1)


둘째 날 경기가 모두 끝나고 일차 예선의 승자와 패자가 모두 가려졌다.
심판관들은 다음 일정을 위해 부전승으로 오를 이들을 선발했다.
운이 좋게도 천성은 부전승으로 이차 예선을 통과했다.
그 덕에 대박 터졌으니 술 사라며 부러워하는 감석보를 떨쳐 내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사실 두 번째 대결을 승리하면 무림맹 무사 자리는 이미 확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무림맹에서 모집하는 인원이 삼백 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강호 정세가 만만치 않은 통에 최대한 전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천성 외에 나머지 일행은 모두 두 번째 시합에 임해야 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도 감석보의 제안으로 술자리가 이어졌다.
여전히 침울한 모습의 서문유란.
그런 서문유란의 옆에서 모용혜가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루를 함께 지내 본 모용혜는 생각보다 괜찮은 여인이었다.
붙임성이 좋고 털털한 성격이어서 일행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천성 역시도 부담 없이 말을 나누다 보니 금세 친구가 됐다.
하지만 영호명만큼은 고양이 앞의 쥐마냥 모용혜에게 꼼짝을 못했다.
이 모범생 도사님이 모용혜에게는 너무도 좋은 장난감이었기 때문이다.
감석보는 술자리 내내 천성을 붙들고 억울하느니, 신은 공평치 않다느니 하며 부전승에 대해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더 이상 들으면 뇌가 녹아 버릴 것 같은 지경에 이르렀을 때, 다행히 감석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나 잠시 뒷간 좀…….”
비틀대는 걸음으로 감석보가 자리를 벗어났다.
“꺼억, 좋구나.”
뒷간에 도착한 감석보가 막 볼일을 마친 순간이었다.
“헉!”
갑자기 목에서 싸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떠들면 바로 목을 베겠다.”
어느새 감석보의 목에는 한 자루 검이 시퍼런 날을 빛내고 있었다.
검을 쥔 자는 복면을 쓴 채 감석보의 뒤에서 유령처럼 서 있었다.
“누, 누구!”
움직이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말인즉, 복면인이 감석보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초극의 고수라는 이야기였다.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감석보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널 죽이진 않을 테니 안심해라.”
차가운 목소리로 감석보를 진정시킨 복면인이 품 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손에 쥐어 주었다.
“이것은 반드시 너 혼자만 열어 봐야 한다. 만일 외부에 알리거나 그 안에 적힌 내용대로 따르지 않을 경우, 네 부모와 가족들은 모두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섬뜩한 복면인의 말에 감석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대체 이자가 누구길래 내 가족들의 생사를 함부로 이야기한단 말인가.’
가족의 안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대연문이 이자들의 손에 떨어졌거나, 혹은 암습을 당해 가족들이 납치를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대체 누가 있어 화산파가 뒤에 버티고 있는 대연문을 함부로 건든단 말인가.
구천마련? 사혈맹?
마련은 신강에 위치해 있으니 별다른 이유도 없이 섬서까지 와서 일을 벌이기엔 너무도 비효율적인 일이었고, 사혈맹은 화산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복면인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네놈은 내 이야기를 못 믿겠지? 하지만 이걸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말과 함께 복면인이 소매 춤에서 옥으로 만든 도장을 꺼내 감석보에게 건넸다.
“허억!”
도장을 본 감석보는 눈을 부릅떴다.
그 물건은 자신의 아버지, 바로 대연문 문주의 인장이었다.
문주의 인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족들이 손에 들어왔다는 흑의인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자, 이제 내말을 믿겠지? 그 서찰에 있는 내용을 잘 보고 그대로 따르도록 해라. 그것만이 네 가족과 대연문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으름장을 놓은 복면인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복면인이 떠난 뒤에도 감석보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었다.
혹시라도 복면인이 아직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이 밀려온 탓이다.
한동안 석상처럼 굳어 있던 감석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복면인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허억, 허억.”
그제야 참았던 호흡을 토해 내며 감석보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했다.
술기운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양손에는 복면인이 건넨 서찰과 인장이 들려져 있었다.
인장을 품 안에 집어넣은 감석보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서찰을 펼쳤다.

이달 스물닷새 날까지 선검문, 화산, 운현에 나타났던 흑의인과 함께 대연문으로 와라.
만일, 이를 어길 시에는 네놈의 가족과 대연문도들의 목숨을 거두겠다.
또한, 이 사실이 외부에 새어 나갔을 경우에도 우리는 대연문의 모든 이들을 죽이고 사라질 것이다.

“대체…….”
갑작스러운 상황에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찰에서 말하는 흑의인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왜 그를 자신에게 데려오라 하는지 감석보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가만! 운현이라면 왕추를 막아 우릴 구해 준 흑의인을 말하는 건가?’
그밖에는 당장에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하지만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를 무슨 수로 대연문으로 데려간단 말인가.
그의 정체도 모르고, 연락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스물닷새라 해 봐야 겨우 아흐레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말을 타고 쉬지 않고 달린다 해도 대연문까지 이레는 걸렸다.
최소한 이틀 후에는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천룡 공자에게 부탁해 볼까.’
천룡이라면 분명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복면인은 분명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경고했다.
거기다 만일 그들이 대연문을 순식간에 장악했을 정도라면 천룡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확률이 컸다.
결국 감석보는 아무런 해답도 얻지 못한 채 무거운 머리를 이끌고 술자리로 돌아왔다.

‘응? 이 인간이 왜 이래?’
천성은 옆자리에 앉은 감석보의 얼이 빠진 듯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석보는 평소답지 않게 입을 다문 채 무언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조용해서 좋기는 한데, 왠지 찜찜하군.’
“감 사형,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요?”
영호명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감석보에게 물었다.
“응? 아, 아니야! 일은 무슨! 정말 아무 일도 없어! 하하하!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네!”
당황하는 감석보의 모습이 더욱 무언가 일이 있음을 의심케 했다.
다른 일행들 역시 평소답지 않은 감석보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신을 집중한 천성이 영안을 살짝 열어 감석보를 살폈다.
“아이구, 아무래도 나는 이만 방에 들어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세령아, 너도 일찍 쉬거라.”
감석보가 허겁지겁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그때, 감석보의 소매 춤에서 무언가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천성의 시야에 잡혔다.
‘편지?’
그것은 한통의 서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