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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3(14화)
4장 비행소년 천성(두 번째 각성)(2)


“엇!”
놀란 감석보가 얼른 다시 소매 춤으로 집어넣었지만, 당황하는 모습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의 어색한 행동과 서찰이 무슨 연관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냥 상관 말까? 귀찮은 감석보 따위 내 알 바 아니지.’
애써 고개를 돌린 천성의 얼굴이 이내 일그러졌다.
‘젠장, 무슨 일인지 궁금하잖아!’
허세의 달인 감석보가 저런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마음이 묘했다.
두 달여 가까이 동행하는 동안 언제나 귀찮고 짜증이 일던 상대였는데, 미운 정도 정이라고 어느새 동료로 여기고 있던 모양이다.
“감 공자, 몸이 많이 안 좋으신 듯한데 제가 부축해 드리지요.”
천성이 얼른 감석보를 따라 나섰다.
“아, 아니, 난 괜찮은데…….”
“어허, 술 취한 사람치고 괜찮지 않다는 사람 없는 법이지.”
천성이 얼른 감석보의 한쪽 팔을 붙잡고 몸을 부축하여 계단으로 향했다.
“어, 어…….”
당황한 감석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할 수 없이 천성을 의지해 계단을 올랐다.
스윽!
그 순간, 천성의 손이 재빠르게 감석보의 소매를 훑었다.
감석보의 소매 춤에 있던 서찰이 천성의 소매 안으로 들어간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조심해라. 영력을 함부로 사용하다가 치우 일족에게 정체가 들킬 수도 있어.]
무숙이 주의를 주었다.
천성으로서도 상당한 모험이었다.
당장 감시의 눈길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조심해야 했다.
‘아주 약하게 사용했으니 눈치채진 못했을 거예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해.]
‘네.’
“되, 되었소, 천성 소제. 이제 나 혼자 갈 수 있소.”
계단을 다 올라서자 감석보가 손사래를 치며 뒤돌아 혼자 방으로 향했다.
그사이, 천성은 얼른 서찰을 펼쳐 내용을 살폈다.
‘응? 이것은!’
[놈들이구나.]
‘대연문을 인질로 삼다니…….’
감석보의 어색한 행동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결국 자신과 관련된 일이었다.
[아무래도 대연문과 네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구나.]
‘일단 서찰을 돌려줘야겠군요.’
“감 공자, 조심하시오.”
천성이 후다닥 달려가 막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려던 감석보의 다리를 슬쩍 걸었다.
쿠당탕!
“아이쿠!”
감석보가 바닥을 뒹굴었다.
“어허, 아무래도 술이 많이 취하신 모양이군요.”
천성이 쓰러져 있는 감석보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스윽!
그러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감석보의 소매 춤에 다시 서찰을 돌려놓았다.
“그럼 편히 쉬시지요.”
당혹스러워하는 감석보를 친절히 침상에 눕힌 천성이 방을 빠져나왔다.
술자리는 이미 마무리가 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어차피 주창자인 감석보 외에는 그다지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결국, 다음날을 기약하며 모두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천성은 고민에 빠졌다.
대연문의 위기는 자신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이대로 모른 척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누가 봐도 이것은 천성을 잡기 위한 함정이었다.
‘하지만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모른 척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놈들은 제가 열쇠로 인해 영력이 훨씬 강력해졌음을 알지 못하지요.’
음속으로 움직일 수 있고, 염동력도 여러 개의 물건을 동시에 움직일 정도로 강력해졌다.
치우 일족이 이전의 천성을 생각하고 대비했다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음, 어쩔 수 없지. 그럼 최대한 조심하는 수밖에.]
무숙도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을 두고 본다면, 천성은 앞으로 결코 떳떳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천하영웅대회는 기권을 하고 대연문에 다녀와야겠군요.’
대연문까지 가서 놈들과 상대하려면 대회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그때, 무숙이 한 가지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잊었느냐, 너는 음속으로 움직일 수 있다. 물론 오랜 시간을 유지하지는 못하겠지만, 도중에 휴식을 취해 가며 움직인다면 늦어도 두 시진이면 대연문에 도착할 수 있지.]
무숙의 말에 천성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사실 음속으로 달린다면 반 시진이면 대연문에 도착할 수 있다.
다만, 길이 직선으로 나 있는 것이 아니고, 산을 넘고 강을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보다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게다가 음속을 계속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쨌든 최대한 속력을 낸다면 한 시진에도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일단 부전승으로 인해 이틀을 쉴 수 있는 상황이니, 시간은 충분한 것이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갔다 오는 것인데…….’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 출발해서 모든 일을 끝내고 내일 아침에 돌아오는 것이다.
밤에 움직이면 일단 자신이 사라진 걸 알아차릴 확률이 낮고, 놈들을 공격하기에도 편하기 때문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지금 당장 움직여야겠군.’
어차피 모두들 술이 제법 취한 상태라 일찍 잠이 드는 분위기였다.
[그나저나 대연문의 위치는 알고 있는 것이냐?]
‘서안 위쪽에 있는 위남에 있다는 것까지는 아는데, 정확한 위치는 모릅니다. 나머지는 가서 찾는 수밖에요.’
감석보를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일단 관도를 따라 움직이고, 강이나 내가 나오면 폭이 좁은 곳을 찾아 뛰어넘을 생각입니다.’
영력을 사용하기 전에도 십 장 정도는 가볍게 뛰어넘었던 천성이니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삼십 장 이상도 거뜬히 건널 수 있었다.
대략 계획을 세운 천성은 일단 방으로 향했다.
함께 지내는 영호명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명이를 어찌 속인다……. 아하!’
적당한 방법이 떠오른 천성이 얼른 방으로 향했다.
침상에 걸터앉은 영호명은 연습벌레답게 손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오늘 본 시합의 장면들을 되새기고 있었다.
“명아.”
방에 들어선 천성이 느끼한 목소리로 영호명을 불렀다.
“응?”
움찔한 영호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천성을 바라보았다.
“흠, 이제 우리도 진정한 남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
은근한 목소리로 천성이 말했다.
“무, 무슨 소리야?”
영호명이 뒤로 물러서며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허, 우리 나이도 이미 열여덟! 그렇다면 여자를 알 나이가 됐지.”
흠칫 놀란 영호명이 눈을 깜빡였다.
“어때? 이 형님이랑 오늘 기루에 가서 회포를 풀어 보자. 흐흐흐.”
천성이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영호명에게 말했다.
“무, 무슨 얘기야!”
당황한 영호명은 얼굴이 벌게져서 손을 휘저었다.
“허참, 모른 척하기는. 오늘 총각딱지를 떼고 진정한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 나만 따라오게, 친구. 흐흐흐.”
화산파가 비록 다른 도문에 비해 자유분방하긴 했으나, 그래도 도를 닦는 도인임에는 틀림없었다.
아직 정식 도사가 되지 않은 영호명이지만, 기루를 출입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아, 아니, 난 괜찮아!”
“에이, 부끄러워하긴. 속으로 좋아하는 거 다 알고 있네, 친구.”
천성이 익살스런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아니야! 난 진짜 괜찮아! 너 혼자 갔다 와! 나, 난 진짜 됐어!”
영호명이 기겁을 하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흐흐, 이런 쑥맥 같으니.’
천성이 속으로 웃음을 참으면서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쉽군그래. 명이, 자네가 정 그렇다면…….”
잠시 말을 멈췄던 천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내가 기루에 간 건 비밀이다. 형한테도.”
영호명이 이불 밖으로 머리를 슬쩍 내밀고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훗, 앞으로 형님이라 불러라.”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은 천성이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휴…….”
밖으로 나온 천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영호명은 속여 먹기가 쉬웠다.

‘지금부터군.’
조심스럽게 취향루를 빠져나온 천성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일단 감각을 끌어 올려 주변의 기척을 확인했다.
혹시라도 치우의 무리나 태초의 파편을 노리는 자들이 지켜보고 있을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걱정 마라. 주변에 의심스러운 기척은 없다.]
아직까지는 천성보다 무숙이 주변의 기척을 확실히 잡아내고 있었다.
‘어디 그럼 가 볼까요!’
흑의인으로 변신한 천성이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땅을 박찼다.
파아아아앙!
순식간에 사물들이 선으로 화했다.
음속에 가까운 속도에 주변 공기가 몸부림을 쳤다.
우우우웅!
천성이 영안을 열고 정신을 집중하자 선으로 화했던 사물들이 다시금 하나씩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감각이 극대화되면서 마치 시간이 느려진 듯 소리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반 각 이상 음속을 펼치면 몸에 무리가 간다. 반 각 동안 움직인 후에는 반드시 휴식을 취해라.]
머릿속을 파고드는 무숙의 목소리에 천성의 의식이 더욱 또렸해졌다.
이제부터는 시간싸움이다.
치우 일족이 정해 놓은 시간은 충분했으나, 천성이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내일 오전 중에 다시 돌아와야 했다.
물론 놈들을 제압하고 대연문을 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 * *

음속으로 달리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아무리 관도라 하지만 굴곡이 있거나, 장애물이 있는 경우가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수시로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속도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반 각 가까이 움직이자 깨질 듯한 두통마저 발걸음을 잡았다.
아직 반 각 이상 음속을 쓰는 것은 무리인 것이다.
‘젠장, 이러다는 시간이 너무 걸리겠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의 시간이 더 소요됐다.
갈수록 마음은 더 조급해졌고, 그럴수록 집중력은 더욱 흐트러졌다.
퍽!
쿠당탕!
결국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에 장애물을 피하지 못한 천성이 땅에 처박혔다.
“크윽!”
[좀 쉬었다 움직이도록 하자. 이대로는 오히려 더 늦어질 뿐이야.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움직이는 편이 낫다.]
무숙의 말이 맞았다.
밤사이에 돌아와야 된다는 조급함은 오히려 독이 되고 만 것이다.
너무 서두르다 일을 망치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천성이 이토록 서두르는 데는 일행의 의심을 피하기 위함도 있지만, 새벽이 지나기 전에 대연문에 잠입해야 한다는 이유가 더 컸다.
인질이 있는 상태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려면 아무래도 낮보다는 밤이 밤보다는 새벽이 유리한 것이다.
잠깐 머리를 식힌 천성이 다시 영안을 열고 영력을 끌어 올렸다.
후우우웅!
기문이 회전하며 자연지기를 빨아들였다.
머리가 다시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어지간한 장애물은 부수고 지나간다!’
각오를 다지며 이를 악문 천성이 힘차게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