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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3(19화)
6장 위험한 거래(3)
“너, 생각보다 실력이 좋은가 보다?”
눈을 가늘게 뜬 천성이 모용혜에게 물었다.
“어머, 숙녀에게 힘세다는 말은 삼가해 줄래?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
순간, 새침한 표정을 지은 모용혜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모용 소저도 절정을 넘어섰다. 서문 소저랑 쌍벽을 이루는 실력이야.”
“허!”
어이없다는 듯 천성이 모용혜를 바라보았다.
“호호호, 칭찬해 주셔서 고마워요, 천룡 공자. 하지만 아직 유란 언니에 비하면 많이 모자라요.”
자신이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용혜의 반응에 천성은 혀를 내둘렀다.
“서문 소저는?”
“다음 시합이라 대기 중이야. 한데…….”
문득 모용혜가 말끝을 흐렸다.
“왜? 무슨 일 있어?”
“흠, 그게…… 상대가 서문세가의 대표야.”
씁쓸한 표정으로 천룡이 대신 대답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자신의 가문 대표와 싸워야 하다니.
이긴다면 가문의 이단아가 될 것이고, 포기하자니 자신의 신념을 접어야 한다.
“서문 소저는 어쩔 작정인데?”
“일단은 비무를 할 생각인가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임에는 틀림없었다.
“하필 예선에서…….”
서문세가와 함께 와서 등록했다면 같은 조에 속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따로 등록하면서 조가 겹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사분지 일의 확률인데, 그 낮은 확률이 운 없게 들어맞은 것이다.
그때, 다음 시합을 알리는 심판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시합은 호북 서문세가의 서문재광과…… 음…….”
심판관이 상대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같은 가문의 상대끼리 예선에서 만나는 일은 드문 경우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서문유란은 서문세가의 대표 자격으로 참가한 것이 아니었다.
그로 보아 가문의 허락 없이 참여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시합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흠, 서문세가의 서문재광과 서문유란!”
심판관은 눈을 질끈 감으며 두 사람을 비무대로 불러 세웠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서문재광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서문유란의 사촌 오라비였다.
여인인 서문유란에게 항상 실력에서 밀리고 있으니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거기다 여기서 자신이 지게 되면 가문의 사내들 모두를 망신시키게 된다 생각하니 더욱 화가 났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
날이 선 목소리로 서문재광이 말했다.
“죄송해요…….”
이를 악문 서문유란이 꿋꿋이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서문세가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면, 자신은 무인이 아닌 여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야심이 많은 아버지는 자신을 정략혼의 도구로 쓰려 할 것이 분명했다.
서문세가에서 여인은 가문의 번성을 위한 수많은 수단 중 하나에 불과했다.
“기어이 네가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구나! 그래, 어디 네가 원하는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두고 보자!”
서문재광이 검을 뽑아 들었다.
마치 생사결에 임하는 자처럼 비장한 그의 모습이 서문유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서문재광도 가문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문유란이 져 줄 수는 없었다.
그녀도 최선을 다해 오라비를 상대해 줄 것이다.
서문유란이 서서히 검을 뽑았다.
검에 검기가 어렸다.
그녀가 절정고수라는 증거였다.
“오!”
“저런!”
관중들의 탄성에 감탄과 질책이 반쯤 섞여 나왔다.
어느 정도 사정을 눈치챈 자들은 가문에 반하는 서문유란을 탓하기도 했고, 몇몇 여인들은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라!”
깃발이 올라가고 두 사람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서문재광은 신중한 표정으로 비무대 위를 돌았다.
이미 자신이 서문유란에게 실력이 뒤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다.
동귀어진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 했다.
두 사람의 절박함이 지켜보는 사람들마저 긴장시켰다.
[참 딱한 여인이군.]
무숙도 서문유란이 조금은 가엾게 느껴진 모양인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앗!”
서문재광이 먼저 신형을 움직였다.
서문세가의 검법은 무겁고 패도적이다.
그래서 여인이 익히기엔 불리한 면이 많았다.
그런 서문세가의 묵중한 검격이 서문유란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전력을 다한 듯 검에는 천 근의 기세가 담겨져 있었다.
서문재광의 상체와 하체가 훤하게 드러났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막무가내의 공격이었다.
서문유란이 검을 쳐 가슴을 베어 낸다 해도 서문재광은 검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를 멈추려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깊게 베어야 한다.
한 조각의 의식이라도 남겨 놓는다면 검을 그대로 내려칠 테니.
하지만 그렇다고 서문재광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
오로지 피하거나 막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악문 서문유란이 재빨리 우측으로 돌았다.
쉬아아아악!
커다란 파공성이 일며 서문재광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순간, 서문재광의 왼쪽 옆구리가 훤히 드러났다.
서문유란이 침착하게 검을 찔러 가려는데, 갑자기 서문재광의 몸이 서문유란의 검을 향해 부딪쳐 왔다.
“엇! 이게 무슨 짓이에요!”
놀란 서문유란이 다급히 물러섰다.
검에 몸을 부딪쳐 오다니, 마치 자살이라도 하려는 사람 같지 않은가!
하지만 서문재광이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 서문유란을 크게 베어 왔다.
후우웅!
당황한 서문유란이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난 목숨을 걸었다! 넌 그럴 각오가 되었느냐?”
악귀 같은 미소를 입에 문 서문재광의 모습에 서문유란은 섬뜩함을 느꼈다.
사실 어릴 때부터 서문유란을 지켜본 그는 그녀가 겉으로는 강해 보이려 애쓰지만, 실은 누구보다 여린 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서문유란이 자신을 상하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런 이유로 방어를 도외시한 채 서문유란에게 마음껏 검격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조금은 치졸한 수였으나, 이 방법밖에는 자신이 서문유란을 이길 수단이 없었다.
서문유란은 새삼 분노가 이는 것을 느꼈다.
대체 무엇이 서문재광을 이리 만들었는가.
그깟 가문의 명예가 무엇이기에 스스로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것인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사람이 없는 가문이 무슨 의미이며, 목숨을 우습게 아는 명예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반드시 이기겠다!’
각오를 다진 서문유란의 검에 검기가 서렸다.
쉬아아악!
“크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서문재광이 주저앉았다.
검이 쥐어진 그의 오른손은 손목째로 잘려져 땅에 떨어져 있었다.
“헉!”
“저, 저게…….”
사방에서 사람들의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서, 서문유란 승! 의원을 불러라!”
심판관이 다급히 의원을 찾았다.
심판관으로서 미리 막았어야 했지만, 설마 같은 가문의 사람끼리 서로를 상하게 하리라곤 그도 예상치 못했다.
“끄으으, 네년이 기어코!”
분노에 몸을 덜덜 떨며 서문재광이 절규했다.
서문유란은 굳은 표정으로 비무대를 내려왔다.
이제 가문과의 연은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꽉 다문 입술과 움켜쥔 주먹이 천성의 눈에 들어왔다.
당장 다가가서 잡아 주고 싶었으나, 지금의 천성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유란 언니…….”
모용혜가 얼른 서문유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광장을 빠져나갔다.
천성은 착찹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 * *
연못 중앙에 세워진 정자에 두 사람의 노소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허름한 무명옷을 입은 노인은 백발에 주름이 가득한 얼굴이 평범한 촌로와 다름없어 보였다.
한데 그 앞에 앉은 백의 중년인의 공손한 자세를 보면 결코 평범한 이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르신, 강호에 흐르는 암류가 심상치 않습니다.”
특이하게도 적발적염을 가진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에 노인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심상치 않다?”
“최근 무림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에 제삼의 세력이 개입되었음이 의심되는 정황이 있습니다.”
노인은 묵묵히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제삼세력의 개입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강호의 세력 다툼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끊임없는 갈등과 분열은 어차피 그가 세상을 조율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누가 주인이 되든 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노인이 원하지 않는 세력은 그 주인이 될 자격이 없었다.
“영력을 사용한 정황이 있습니다.”
그제야 노인의 얼굴에 이채가 일었다.
“확실한 게냐?”
“저희가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이번 대연문 사태의 목격자 진술을 통해서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천률음보를 훔친 자들과 같은 놈들인 겐가?”
“그럴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천률음보를 훔친 자들이 동물의 가면을 썼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미간을 찌푸린 노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것이 치우 일족 전사들의 표식 중 하나임을 자네도 알겠지?”
“하지만 치우 일족은 모두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모르는 일이지……. 영력을 사용하는데다가 열쇠를 노리는 것을 보면, 그밖에는 다른 자들을 생각할 수가 없어. 일단은 치우 일족이라고 간주한 상태에서 대비책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그래도 우리 헌원 일족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이들이었지 않은가. 그런 자들이 그리 쉽게 사라졌다고 볼 순 없지.”
치우 일족이 이 모든 일의 뒤에 있다면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열쇠를 찾고 있을 것이야. 아마도 비동을 열고 사조의 유물을 얻으려 하겠지.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해.”
치우 일족이 유물을 얻게 된다면 원한 관계에 있는 헌원 일족은 멸족을 면치 못할 것이다.
“선인들을 파견하도록 해라.”
중년인의 눈빛이 빛났다.
드디어 그의 주인이 움직이려는 것이다.
“어차피 유물을 찾을 기회가 왔다면 그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지. 그때가 되면 일족의 천형 또한 풀 수 있을 것이야. 그렇게 되면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순간, 왜소하던 노인의 몸에서 강력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