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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3(20화)
6장 위험한 거래(4)
다섯째 날, 각조별로 본선에 진출할 세 명의 무인이 가려지게 되었다.
십이강과 육강 경기가 하루 만에 이루어졌기에 참가자들은 체력과 부상에 신경 써야 했다.
일행 중에는 영호명과 천룡, 서문유란이 본선에 진출했고, 화설련과 제갈수련, 모용혜는 아쉽게 마지막 육강에서 탈락했다.
모용혜의 상대는 운이 없게도 무당의 두 번째 참가자 였다.
청명보다는 실력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절정을 훌쩍 넘어선 고수였다.
예상대로 천룡은 압도적인 무위로 당당히 본선에 진출하며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단상 위의 무림 명숙들 역시 남궁인과 천룡이 우승을 다툴 것이라 확신했다.
본선에 진출한 서른두 명의 명단이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소림 ― 공현, 공무, 공원.
무당 ― 청명, 청수, 청오.
화산 ― 영호명, 장일곤, 노문종.
서문세가 ― 서문해광, 서문유란.
상관세가 ― 상관중혁.
청성 ― 양만위.
공동 ― 도진백, 심현방.
곤륜 ― 진현, 담호.
개방 ― 동진구.
아미 ― 은혜.
점창 ― 채공.
종남 ― 백일기, 송위직.
남궁세가 ― 남궁인, 남궁제.
팽가 ― 팽만호.
사천당가 ― 당위성.
모용세가 ― 모용벽.
제갈세가 ― 제갈규.
황보세가 ― 황보진성.
철혈문 ― 궁천룡.
현검문 ― 용혜란.
산동악가 ― 악진범.
천룡과 용혜란, 산동악가의 악진범을 빼고는 모두 구파일방과 팔대세가의 자제들이었다.
그중 산동악가는 거의 팔대세가에 가까운 세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명문대파의 벽은 이토록 넘기 힘든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 동안 물려온 유산이 그만큼 크고 깊음은 당연한 이치였다.
다음 날, 드디어 본선이 시작되었다.
지금부터가 진정한 천하영웅대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선에 오른 서른두 명이야말로 중원 각지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본선 진출자들이 등장했다.
이제 광장에 설치된 비무대는 오로지 하나.
참가자들이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면적도 두 배로 늘어난 상태였다.
천성과 일행은 천룡과 서문유란, 영호명을 응원하기 위해 비무대 근처에 자리 잡았다.
감석보와 서문유란의 일로 인해 잔뜩 가라앉은 분위기를 끌어 올리려 애쓰는 모용혜의 모습을 보며 천성은 피식 웃었다.
그나마 모용혜 덕분에 일행은 침울한 기분을 달랠 수 있었다.
서문유란 역시 시끄러운 모용혜를 탓하지 않았다.
제갈수련은 가주인 제갈진성의 행차로 인해 가문의 일행들에게 돌아간 상태였다.
전날 대진 추첨 결과, 서문유란은 황보세가의 황보진성과 영호명은 제갈세가의 제갈규와 대결하기로 정해졌다.
마지막으로 천룡의 대결 상대는 바로 소림의 공현이었다.
감석보의 꾐에 빠져 스스로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 그 장본인이었다.
[오호. 이거, 세기의 대결이 되겠군!]
무숙이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감 사형이 있었다면 좋아했을 텐데…….”
영호명의 말에 천룡과 일행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새삼 대연문의 일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천성도 마음이 좋을 수는 없었다.
치우 일족이 대연문을 공격한 것은 자신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어찌 보면 대연문 참사의 직접적 원인이 천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치우 놈들의 만행이지, 네 탓이 아니다. 쓸데없이 자책하지 말거라.]
천성의 심사를 헤아린 무숙이 애써 달래려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쉽게 마음을 털어낼 수는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언제고 이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 줄 것이다.
“이게 누구십니까? 화 소저 아니십니까?”
그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끈한 얼굴, 뱀 같은 미소, 느끼한 목소리.
바로 상관중혁이었다.
“유가장에서 고난을 함께한 후 이렇게 또 뵙게 되다니, 저와 화 소저는 보통 인연이 아니군요.”
그는 음산한 눈초리로 화설련의 아래위를 쓰윽 훑었다.
화설련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상관중혁의 인사에 답했다.
항상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행동이나 말투 하나하나가 참으로 기분 나쁜 자였다.
“무슨 볼일인가요?”
그때, 서문유란이 딱딱한 목소리로 앞으로 나섰다.
상관중혁은 잠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문유란을 노려보았다.
유가장에서도 자신을 막아서더니, 또다시 성질을 건드리고 있었다.
“후후후.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오랜만에 만나 반가움에 인사를 드린 것뿐인데 말씀이 너무 박하시구려.”
조금은 날이 선 목소리로 상관중혁이 말했다.
그러나 서문유란은 여전히 냉랭한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화설련을 어떻게 해 보려는 상관중혁의 수작질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서문 소저는 내가 무슨 천하의 악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시니…… 이거, 안타깝구려.”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짓던 상관중혁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어라? 이게 누구신가? 그때 그 건방진 위사 아니신가?”
용케도 천성을 알아본 것이다.
놈의 얼굴에 음산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문유란 때문에 분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는데, 마침 천성이 시야에 잡힌 것이다.
천성은 골치가 아파 옴을 느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놈이 자신을 만만한 화풀이 대상으로 찍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내가 치한으로 오해를 받지 않았던가? 그래, 함부로 사람을 모욕했던 그 친구는 잘 있는가?”
상관중혁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천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순간, 천성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곡용천의 죽음은 천성의 역린과 같은 부분이었다.
하기야 놈은 곡용천이 죽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하지만 놈의 한마디가 천성이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들춰 낸 것이다.
천성의 머릿속에서 그때의 일이 다시 한 번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자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싸늘한 분노가 일었다.
[참아라! 쓰레기 같은 놈 하나 때문에 어리석은 짓은 말거라!]
무숙의 호통에 천성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진정한 원수는 뱀가면과 치우 일족이다.
이런 하찮은 놈 때문에 심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허! 이거,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더니. 네놈들의 모함에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난데, 어찌 네 녀석이 화를 내는 것이냐?”
천성의 표정을 본 상관중혁이 어이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상관중혁에게 천성 같은 이들은 그저 유흥 삼아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언제든 맘껏 부수고 박살 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한데 그런 놈이 화설련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더욱 기분이 나빴다.
“아니, 딱 보아하니 설련 언니에게 수작을 걸려다가 유란 언니한테 한 소리 듣고 삐친 모양인데, 왜 엄한 성이한테 시비래? 무슨 사내가 소갈머리는 쥐벼룩만 해서는. 쯧쯧.”
그때, 모용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무공을 익힌 이들.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순간, 상관중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뭐라 했소!”
여유로운 미소가 돌던 얼굴은 분노로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상관중혁이 막 모용혜에게 돌아선 순간이었다.
“그쯤 하시오. 더 이상 추태를 부리면 후회하게 될 거요.”
갑작스런 목소리에 상관중혁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싸늘한 표정을 한 천룡이 서 있었다.
처음에는 상관중혁이 화설련과 친분이 있는 자인 줄 알고 그저 지켜보고 있었는데, 하는 행동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아닌가.
거기다 천성에게 시비를 거니 도저히 묵과할 수 없던 것이다.
상관중혁이 천룡을 한 번 쓱 훑어보았다.
기세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주제도 모르고 나서는 애송이임에 틀림없었다.
“흥, 네놈이 감히 나를 후회하게 만들겠다고? 큭큭큭!”
이빨을 드러내며 조소를 날린 상관중혁이 기세를 끌어 올렸다.
후우우웅!
“네놈 정도를 후회하게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지!”
코웃음을 친 천룡이 마주 기운을 끌어 올리려 할 때였다.
“그만들 두세요! 대회 도중에 사사로이 싸우게 되면 두 분 다 탈락하게 될 거예요!”
화설련이 급히 두 사람을 말렸다.
그녀의 말처럼 대회 도중 말썽을 일으키거나 사사로이 싸움을 하게 되면 참가 자격이 박탈당하게 된다.
상관중혁이야 떨어지든 말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나. 천룡이 탈락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순간, 상관중혁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 녀석도 본선 진출자라는 말인가?’
둘 다 탈락하게 될 것이라는 화설련의 말을 볼 때, 눈앞에 있는 애송이 역시 본선에 진출한 것이 분명했다.
‘흥, 제법 한 수가 있는 놈이었군.’
상관중혁이 예선을 지켜보기만 했어도 천룡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만한 그가 예선 따위에 신경을 쓸 리가 없었다.
예선 내내 기루와 술집을 전전하다 본선에 맞춰 맹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니 천룡이 소문의 철혈신룡이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관중혁도 대회에서 탈락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어차피 대회가 끝난 후 천룡을 손봐 주면 될 일이었다.
“후후, 화 소저께서 이리 간곡히 부탁하시니, 제가 참기로 하지요. 강호오룡이 아무하고나 손을 섞어서야 체면이 서겠습니까? 하하하!”
자못 호탕한 표정으로 크게 웃은 상관중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잠시 천룡을 노려봤다.
“훗, 재밌군. 네 녀석이 정말 오룡이라면, 그 오룡이라는 자들의 수준도 알 만하군.”
천룡의 비아냥에 상관중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건방진 놈, 기껏 본선에 진출했다고 기고만장하구나! 어디, 나중에 두고 보자! 진정으로 후회가 뭔지 알게 해 주마!”
휑하니 돌아선 상관중혁이 일행과 멀어져 갔다.
“뭐 저런 자식이 다 있어?”
모용혜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감숙에서도 망나니로 소문난 놈이야.”
천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흥,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군.”
아직도 화가 덜 풀린 천룡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관세가의 적자거든요. 거기다 실력도 만만치 않고……. 어쨌든 조심해야 해요. 한 번 앙심을 품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승냥이 같은 자예요.”
화설련은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듯 진저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