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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3(22화)
6장 위험한 거래(6)
둘째 날 경기를 모두 마치고 일행은 취선루로 돌아왔다.
감석보가 없으니 왁자지껄한 술자리도 없었다.
거기다 두 명의 탈락자가 발생했으니 축하를 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물론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사실 대단한 일이긴 했으나, 아무래도 사람 욕심이라는 것이 항상 더 많은 것을 바라기 마련인 것이다.
더군다나 서문유란은 같은 여인인 용혜란에게 졌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자신이 그동안 여인으로서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교만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여인이길 거부하려는 그녀의 강박관념이 오히려 스스로의 한계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간단히 저녁을 먹은 후 방으로 돌아온 영호명은 그날의 시합에 대해 되짚어 보며 명상에 잠겼고, 천성은 서문유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답답한 마음을 환기시킬 겸 천성이 산책이라도 나갈까 마음먹었을 때였다.
똑똑똑!
“성아!”
갑작스레 찾아온 모용혜가 방문을 두드렸다.
천성은 무슨 일인가 하여 방문을 열고 그녀를 맞았다.
“너, 잠깐 나 좀 볼래?”
한쪽 눈을 찡긋한 모용혜가 천성에게 따라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무슨 일인데?”
천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모용혜를 따라 나섰다.
“후후후, 이 누님이 너를 위해 한 가지 선물을 해 줄까?”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던 천성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모용혜를 바라보았다.
“바보 녀석! 이럴 때가 진정한 기회야! 유란 언니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따악! 하고 네가 나타나 위로를 해주면 순식간에 점수를 딸 수 있다고!”
천성은 웬 실없는 소리냐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갑자기 생뚱맞게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천성이 무슨 수로 위로를 한단 말인가.
“물론 니 주변머리에 당장 달려가 위로니 뭐니 하지는 못할 거고, 해서 이 누님이 돕겠다는 거야!”
모용혜의 이야기는 대충 이러했다.
서문유란은 오늘도 고독을 씹으며 숙소에서 두문불출할 것이 분명했다.
그때, 모용혜가 천성을 데리고 서문유란을 찾아간다.
‘언니, 기분도 꿀꿀한데 술이나 마시자!’라고 모용혜가 꾀어낸다.
모용혜의 말에는 그래도 제법 잘 따르는 서문유란이 마지못해 허락한다.
그렇게 세 사람의 술자리가 마련되고, 모용혜가 중간에 슬쩍 빠진다…….
“그, 그만! 거기까지…… 흠.”
천성이 다급히 모용혜의 말을 끊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무 좋은 생각이로구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빛내며 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큭큭큭, 좋아! 따라와!”
모용혜가 천성을 데리고 서문유란의 방으로 향했다.
제갈수련이 문파 사람들과 합류한 이후 그녀는 혼자 지내고 있었다.
똑똑똑!
모용혜가 방문을 두드렸다.
잠시 기다렸으나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응? 어디 갔나?”
고개를 갸웃거린 모용혜가 다시 한 번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유란 언니, 안에 있어?”
하지만 역시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네. 어디 나갔나 본데? 이 여자가 혼자서 어딜 간 거야? 멀리 가진 않았을 테니, 일단 점원에게 물어보자.”
일층으로 내려간 모용혜가 계산대로 향했다.
“혹시 특실 삼호실 손님이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사실 점원이 서문유란이 나갔는지 안 나갔는지는 확인할 수 있겠지만, 어디로 갔는지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인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아, 그 소저 말씀이시군요? 방금 전에 뒤쪽 정원으로 나가셨습니다.”
“아, 밖으로 나간 게 아니었구나. 다행이다. 가자, 성아.”
모용혜가 밝아진 얼굴로 천성을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
취선루의 정원은 상당히 넓고 잘 꾸며져 있었다.
정원 가운데에 제법 큰 연못과 여덟 채의 정자가 있어서 술 한잔하며 운치를 즐기기에 제격이었다.
정원에 들어선 두 사람은 두리번거리며 연못 쪽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천성은 서문유란을 찾기 위해 시야를 넓혔다.
영력을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시력이나 청력 등 감각 자체가 이미 일반인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천성이었다.
이내 천성의 기감에 몇몇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울러 정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정자를 자세히 살피던 천성이 멈칫하더니 모용혜를 밀치며 나무 뒤로 숨었다.
“야! 왜 그래?”
“쉿!”
천성이 앞쪽 정자를 가리키며 모용혜의 입을 막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모용혜가 정자로 시선을 향했다.
먼 거리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는데, 젊은 남녀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엣, 퉤퉤! 왜 갑자기 입은 막고 그래! 아는 사람이야? 헉!”
천성의 손을 밀어내며 정자를 주시하던 모용혜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
마침 사내와 여인이 모용혜의 기척을 느끼고 이쪽을 쳐다본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그 두 사람은 서문유란과 천룡이었다.
모용혜와 천성은 무언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어? 성이와 모용 소저가 어쩐 일이야?”
천룡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문유란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마치 밀회를 즐기다 들킨 연인 같은 분위기가 아닌가.
그때, 천룡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잠깐, 혹시 모용 소저와 성이…… 둘이 벌써 그런 사이인 거야?”
천룡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천성과 모용혜를 쳐다보았다.
단둘이 정원을 거닐다가 자신에게 들키자 몹시 놀라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 상황이 연상케 하는 것은 한 가지 사실밖에 없었다.
“후후후, 너희도?”
천룡이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천룡의 엉뚱한 상상에 모용혜와 천성은 당황했다.
“아, 아니, 무슨 말을……!”
“어허! 절대 그런 것이 아니고……!”
“후후후, 걱정 마라. 비밀로 해 줄 테니. 대신…….”
천룡이 잠시 말을 멈추고 서문유란을 슬쩍 바라보았다.
“두 사람도 우리 이야기는 비밀이다? 알았지?”
쿠쿵!
천성과 모용혜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에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무엇보다 천룡의 입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확실히 확인하고 나니 그 충격이 두 배로 컸다.
꿈에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니, 대체 왜 형이 서문 소저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천룡은 평상시 수많은 여자들에게 관심을 주었고, 천룡을 좋아하는 여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천룡의 실력과 외모라면 손만 내밀면 얼마든지 아름답고 빼어난 여인들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한데 하필 왜 서문유란이란 말인가.
물론 그간 천룡이 말로만 이 여자가 어떠니 저 여자 어떠니 했지 행동으로 옮긴 적은 한 번도 없기는 했다.
‘하지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어쩌다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상황이었으나 결국 두 사람은 그저 천룡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사실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니고, 그냥…… 하여튼, 비밀은 지켜 줄게…….”
천성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 알아. 서문 소저와 나도 아무 관계 아니야. 우리 서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자구! 알았지?”
모용혜와 천성이 금방이라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젠장!’
“가끔 우리끼리 함께 놀러도 가고 술도 마시고 그러자.”
결정적으로 염장을 지르는 천룡이었다.
“근데 서문 소저와는 언제부터…….”
맥이 풀린 목소리로 천성이 물었다.
그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그때 술 시합 한 날…….”
술 시합 이후로 서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둘은 사과의 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서문유란이 가문의 사람들을 만나 큰 아픔을 겪은 날을 비롯해 몇 번 더 만나면서 점점 서로의 마음을 터놓게 되었다 했다.
서문유란은 천룡의 배려와 열린 마음에 반하게 되었고, 천룡은 서문유란의 무공에 대한 조언이라든가 힘들 때마다 위로를 해 주면서 처음 연민이었던 감정이 사랑으로 변한 듯했다.
오늘도 서문유란의 패배를 위로해 주기 위해 천룡이 따로 만난 것이었고.
천성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두 사람을 축하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원에 두 사람을 남겨 둔 모용혜와 천성은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숙소로 돌아왔다.
“휴, 이제 거래는 소용없게 되었네.”
천성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
난데없는 외침에 깜짝 놀란 천성이 모용혜를 쳐다봤다.
“아직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 아직 둘이 혼인을 한 것도 아니고,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인 법!”
모용혜가 결의에 찬 모습으로 주먹을 치켜올렸다.
“흥! 이제 시작이야, 시작! 너도 약한 모습 보이지 말구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함께 힘을 내자구!”
형의 여인을 쟁취하라니, 도대체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 할 소리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천성이 모용혜를 무시한 채 방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