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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3(23화)
7장 신룡의 탄생(1)


“후후, 재밌군.”
온몸에서 줄기줄기 마기를 뿜어내고 있는 중년 사내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한 장의 서찰을 손에 쥔 사내의 앞에는 비쩍 마른 문사 차림의 장년인이 부복해 있었다.
그들은 바로 구천마련의 주인인 구천마제 혁련우와 마련의 군사인 마뇌 사마굉이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혁련우가 서늘한 눈빛으로 사마굉에게 물었다.
“우선 마제께서도 이번 일이 제삼세력에 의해 벌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사마굉이 잠시 혁련우의 눈치를 본 뒤 말을 이어 나갔다.
“현재 양측의 상황으로 볼 때, 정마대전이 벌어지게 되면 또다시 양패구상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거기다 아직 이전 상처들을 완전히 회복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전쟁은 공멸을 부를 뿐이란 사실을 놈들도 알고 있지요. 하니 우리에게 대화를 제안한 것이지요.”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고.”
혁련우가 답답하다는 듯 이야기를 재촉했다.
“네. 제 의견으론 일단 놈들의 말을 들어 보는 것도 괜찮다 여겨집니다. 물론 우리가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은 반드시 받아야겠지요. 아마 놈들도 어느 정도 손해는 감수하리라 봅니다. 사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잃을 게 더 많은 쪽은 제 놈들이지요. 우리야 중원으로 쳐들어갔다가 여의치 않으면 다시 신강으로 후퇴하면 그만이지만, 놈들은 간신히 다져 놓은 기반이 다시 풍비박산 나게 되겠지요.”
결국 싸움은 중원 땅에서 벌어지기 마련.
전장이 될 지역의 문파들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이미 지난번 전쟁으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받은 문파들은 이제 겨우 예전의 성세를 회복해 가고 있었다.
그들이 새로운 전쟁을 원할 리가 없었다.
문파들의 지지가 없는 전쟁은 무림맹으로서는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온전한 전력을 모을 수도 없고, 맹에 가입한 문파들이 과연 온 힘을 다해 싸워 줄지도 의문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마련이 전쟁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마련 역시 이전 정마대전의 여파로 아홉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진 상태.
혁련우가 련주를 맡고 있긴 했으나, 아홉 세력이 그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 칼을 거꾸로 겨눌지 모르는 자들인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무리한 전쟁은 오히려 독이었다.
만일 중간에 배신하는 자가 나온다면, 손도 못 써 보고 마련이 와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받을 것은 확실히 받아야지. 그리고 전쟁을 해야 한다면 결코 피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보여 줘야 해!”
“그렇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우리가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다. 우선 놈들이 제시하는 조건을 들어 보기로 하지. 서신으로만 연락을 주고받기엔 일의 경중이 너무 크군.”
“아무래도 제가 직접 제갈휘를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네가 직접?”
“네.”
“장소와 시일은?”
“아무래도 서로 오가는 시간이 있으니, 청해성 서녕에서 한 달 보름 후에 보기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청해성은 마련과 무림맹의 세력이 공존하는 곳.
두 세력이 만나기엔 가장 적절한 장소였다.
“좋아, 그렇게 추진하도록 하게. 절대 놈들에게 밀려서는 안 돼. 반드시 부군사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받아 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성화령을 훔쳐간 자들은 아직인가?”
혁련우의 눈에 분노가 어렸다.
운현에서 무림맹과 부딪쳐 부군사가 목숨을 잃게 된 것도 결국 성령을 찾는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붉은 옷의 여인과 그 무리가 성화령을 탈취해 간 것이다.
그것도 단지 다섯 명이서.
성화령을 모신 성화궁은 다섯 명의 초절정고수와 화경에 거의 근접해 있는 성녀가 지키고 있었다.
한데, 그들을 물리치고 성화령을 탈취해 간 것이다.
성녀 이취란은 그 사건으로 인해 지금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
혁련우가 이를 갈았다.
감히 성화령을 훔쳐가다니.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마련의 위상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
“송구하옵니다. 밀영단을 총동원해서 놈들의 종적을 찾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정보가 너무도 부족합니다.”
사마굉이 머리를 조아렸다.
“무광이는 아직도 폐관 중인가?”
“네. 자책하는 마음이 큰 까닭에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시는 듯합니다. 아마도 이를 이겨 낸다면 반드시 큰 심득을 얻으실 것입니다.”
“그래야지.”
혁련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 * *

천하영웅대회의 본선 둘째 날의 대결로 가려진 여덟 명의 승자는 다음과 같았다.

남궁세가 남궁인.
소림 공무.
무당 청명.
화산 장일곤.
서문세가 서문해광.
상관세가 상관중혁.
철혈문 궁천룡.
현검문 용혜란.

본선 직행자 중에는 소림의 공현과 청성의 양만위가 탈락했다.
공현은 천룡에게 패배했고, 양만위는 소림의 공무에게 져 탈락한 것이다.
역시 천하의 소림답게 공현 외의 제자들의 무공 또한 상당히 높았다.
이제 모든 이들의 관심은 과연 누가 우승자가 될 것이냐에 쏠렸다.
팔강에 진출한 후기지수 중 우승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바로 남궁인과 천룡이었다.
다른 이들과는 월등한 실력 차를 보여 주고 있었기에 두 사람 중 하나가 마지막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리라는 것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연히 나머지 경기들에 대한 관심은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최 측의 배려인지 하늘의 안배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마침 두 사람은 결승에서 만나도록 대진이 짜여져 있었다.

“성아, 잠깐 나 좀 볼래?”
비무를 구경하던 천성을 모용혜가 따로 불렀다.
천성은 무슨 일인가 하여 의아한 표정으로 모용혜를 따라갔다.
비교적 한가한 광장 구석에 도착하자 모용혜가 주위를 살핀 후 조용히 말했다.
“우리 약속한 거 있지? 그 거래 말이야. 잊진 않았겠지?”
“그래…….”
하지만 이미 천룡과 서문유란이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큰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첫 번째로 우선 유란 언니와 천룡 공자에 대한 정보를 서로 교환하기로 하자. 어때?”
“난 이제 됐어.”
“어허, 사내가 한 입으로 두 말하기야? 네가 포기했다고 해서 약속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 천룡 공자 정보라도 내놔!”
“아니, 대체 너처럼 예쁘고 어디 빠지는 데 없는…… 은 아니고, 하여튼 뭐가 아쉬워서 임자 있는 사람한테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천성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호호호, 보는 눈은 있구나. 내가 좀 예쁘긴 해. 호호호.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정보를 내놓거라, 궁천성!”
결국 계속해서 닦달하는 모용혜의 성화에 천성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래, 좋다. 알고 싶은 게 뭐냐?”
천성의 항복 표현에 모용혜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잠깐만!”
소매를 뒤척이던 모용혜가 쪽지를 하나 꺼내 들었다.
“음, 첫 번째로는 천룡 공자가 가장 좋아하는 것!”
“여자.”
“야, 진짜 제대로 안 해!”
“휴…….”
거의 반 시진 동안 모용혜에게 시달린 천성은 천룡의 비무 순서가 되어서야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마치 고문이라도 받은 듯 심력이 잔뜩 소비된 상태였다.
비무는 천룡의 승리로 끝났고, 그날 승부의 결과 네 사람의 준결승 대전자가 결정되었다.
남궁인은 무당의 청명, 천룡은 서문세가의 서문해광과 맞붙게 된 것이다.

천성은 진이 빠진 모습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천룡의 대결이 끝나자 다시 모용혜에게 붙잡혀 정보를 토해 내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백부인 궁혁제와 백모의 정보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너와 모용 소저, 두 사람이 어째 자주 안 보인다?”
영호명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아…… 말도 마라. 힘들어 죽겠다.”
“설마?”
“뭐가 설마야?”
영호명이 얼굴을 붉힌 채 휙 돌아섰다.
“아니, 너 그 표정은 뭐야! 얼굴을 왜 붉히고 그래? 오해야, 오해!”
“아, 알았어. 난 모르는 일이야.”
“야! 말은 왜 더듬어! 모르긴 뭘 몰라! 아니래두!”
천성은 땀을 뻘뻘 흘리며 영호명을 이해시키려 애썼다.
영호명은 연신 알았다고 말했으나 표정은 전혀 말과 부합되지 않았다.
‘이러다 우리 둘이 사귄다고 소문나는 거 아냐!’
천성은 왠지 불안해졌다.

* * *

사강전은 싱겁게 끝났다.
예상했던 대로 남궁인과 천성이 가볍게 결승에 진출한 것이다.
이제는 마지막 우승자를 가리는 일만 남았다.
결승전 당일, 무림맹 중앙 광장은 열기로 가득 찼다.
단상 위에는 각파의 장문인을 비롯해 정파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대거 모습을 보였다.
무림맹주 남궁영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지막 결승전을 앞두고 남궁영이 직접 두 사람을 단상으로 불러 세웠다.
“오늘 우리는 정도무림의 미래를 대표할 최고의 후기지수를 뽑는 자리에 함께하고 있소! 여기 두 사람은 누구 하나 우승자로서 모자람이 없는 이들이오! 누가 승리를 거두든 우리는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고 이들이 강호를 이끌어 갈 단단한 기둥이 되길 함께 기원해야 할 것이오! 자, 모두들 이 두 사람에게 뜨거운 응원을 부탁하오!”
“우와아아아아아!”
“남궁인! 남궁인!”
“궁천룡! 궁천룡!”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두 사람의 이름을 연호했다.
단상 위에서 환호를 받는 천룡의 모습에 천성도 덩달아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형님이 이기실 거야!”
영호명이 천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당연하지!”
엉뚱하게도 모용혜가 빽! 소리를 질렀다.

결승전의 심판관은 이번 대회를 위해 특별히 초빙한 불왕 원공 대사가 맡았다.
원공 대사는 소림이 자랑하는 강호십대고수의 일인으로, 공현의 스승이었다.
성격 역시 공현처럼 불같은 면이 있어서 강호 일에 발 벗고 나서길 즐겼다.
“두 사람은 비무대로 오르시오!”
원공의 목소리가 광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의 공력이 얼마나 심오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천룡과 남궁인이 비무대에 오르고 드디어 결승전의 막이 올랐다.
“시작하라!”
“와아아아아아아!”
두 사람은 긴장된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직접 상대를 마주하니 서로의 강함을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 다 그동안 자신의 실력을 반도 내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만큼 또래 중에는 상대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공력을 서서히 끌어 올리자 돌을 쌓아 만든 비무대가 웅웅거리며 진동했다.
남궁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동안 그는 뛰어난 자질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후기지수 중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대를 찾을 수 없어 어느 정도 자만해 있었고, 그로 인해 무공도 정체되어 있었다.
한데, 천룡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남궁인에게도 오히려 자극제가 되는 일이었다.
수그러들었던 무에 대한 갈증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자, 우리 최선을 다해 부딪쳐 봅시다!”
“바라던 바입니다!”
남궁인과 천성의 검에서 한 자 가까이 이르는 검기가 솟아올랐다.
“하압!”
먼저 움직인 것은 남궁인이었다.
채앵! 챙!
검이 부딪치고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은 처음엔 가벼운 초식을 교환했다.
이토록 즐거운 대결을 너무 짧게 끝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궁인의 검은 무겁고 패도적이면서도 웅혼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서문세가의 검법에 조금 더 유연함을 가미한 듯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변화무쌍하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천룡의 요혈을 위협하는가 하면, 유려한 검풍이 천룡의 날카로운 검기를 밀어냈다.
반면, 천룡의 검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초식 하나하나가 실전적이면서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허초와 실초가 따로 없었으며, 막강한 공력을 바탕으로 검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었다.
‘놀랍군! 소문보다 훨씬 뛰어나군!’
천룡은 생각보다 남궁인의 경지가 높다는 것에 감탄했다.
전력을 다해야 승부를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강호에 나온 후로 후기지수들 중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낼 만한 상대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이 정도라면 공소추에게도 뒤지지 않겠어!’
남궁인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천룡의 실력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순식간에 오십여 초가 지나고, 시합이 시작된 지 일각이 넘어서자 두 사람의 기세가 조금씩 변했다.
이제 본격적인 승부를 겨루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