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영웅재천 4(3화)
1장 천의단(3)


대연문 중앙 전각의 지붕 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명의 중년인이 올라서서 무림맹과 화산파 조사단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두 사람 모두 눈동자가 회색을 띠고 있었는데,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듯한 회색 눈동자는 마치 유리처럼 번들거렸다.
한순간, 지붕 위에 있던 그들이 몸을 띄워 유유히 조사단들 사이로 내려섰다.
두 사람은 조사단원들 사이를 마치 연기처럼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두 사람 중 둥근 얼굴에 큰 귀와 입을 가진 사내가 유리 같은 눈을 빛내며 무림맹 부군사 황보광의 뒤쪽에 멈춰 섰다.
황보광은 인상을 찡그린 채 한창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그 옆에는 화산파의 장로 맹염이 심각한 표정으로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둥근 얼굴의 사내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흠, 참으로 괴이하군요. 남겨진 흔적들이 너무도 거칠고 파괴적이군요. 그렇다고 마공도 아닌 것이…….”
고개를 갸우뚱하던 황보광이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흙과 돌이 마치 기둥처럼 솟아올라 있었다.
“뒤집어진 땅도 그렇고, 저 기둥처럼 솟아오른 흙과 돌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수법입니다. 생존자들의 말을 종합해 봐도 습격자들에게서 마기를 느끼지는 못했다 합니다. 다만…….”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듯 잠시 말을 멈춘 황보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감숙에서 벌어진 천률음보 탈취 사건에 관여된 자들도 이와 비슷한 수법을 사용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황보광의 뒤에 서 있던 둥근 얼굴의 사내가 스르르 움직여 흙기둥으로 다가갔다.
“한데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을 구한 흑의인을 잡기위해 놈들이 대연문을 쳤다고 하던데,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맹염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순간, 흔적들을 살피던 둥근 얼굴 사내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는 다시 유령처럼 몸을 움직여 맹염과 황보광의 옆으로 돌아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흠, 대연문에서는 그들을 구한 흑의인의 정체를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한데도 침입자들이 대연문도들에게 흑의인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고, 흑의인을 유인하기 위한 인질로 삼았다는 것은 무언가 이상하지요.”
황보광 역시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한 맹염과 황보광, 두 사람은 몸을 돌려 정문 쪽으로 멀어져 갔다.
“흑의인이라…….”
둥근 얼굴의 사내가 회색 눈동자를 굴리며 되뇌었다.
“호오, 영력의 흔적이군. 어르신의 짐작대로 치우 놈들의 짓일 확률이 높겠는데? 안 그래, 자공?”
그때, 유령처럼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사내가 둥근 얼굴의 사내에게 말했다.
“다른 곳은 어때, 진교?”
자공이라 불린 둥근 얼굴의 사내가 돌아보며 물었다.
진교라 불린 사내는 얇은 입술 가녀린 턱 선이 마치 여인과도 같은 호리호리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창백한 얼굴 때문에 흡사 시체를 보는 듯했다.
“특별한 것은 없어. 남은 문제는 놈들이 왜 대연문을 쳤는가야.”
“정체불명의 흑의인 때문이라는군.”
“흑의인?”
“대연문과 무언가 관계가 있는 듯한데, 대연문도들은 그자의 정체를 모르는 것 같군. 침입자들이 원한 것은 바로 그자야.”
어찌 되었든 흑의인은 문주와 그 가족을 구해 화산까지 데리고 갔다.
대연문도들과 관계가 없다면 그들을 구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 말인즉, 어떻게든 서로 연결점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상당히 가까운.
그렇다면 둘 중 하나였다.
살아남은 대연문도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그들도 그의 진정한 정체를 알지 못하지만 분명 그들과 가까운 자이든지.
“가만가만. 흑의인이라니까 생각나는 자가 있군. 운현에 나타났던 그자!”
진교가 갑자기 생각난 듯 손바닥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영력을 썼다는 정보를 확인했기에 그들의 주인이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는 자였다.
“꼭 그자라 단정 지을 수는 없지. 어차피 복면인들 대부분이 흑의를 착용하니까. 거기다 치우의 무리들 역시 영력을 사용하고 흑의를 입고 다니지.”
“아냐. 두 가지 점에서 그자일 확률이 높아. 첫째는 그자가 치우 일족과 반대의 입장에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운현에 있던 자들 중 대연문의 소공자가 있었다는 것이지.”
순간, 진교의 창백한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우연히 대회 참가자들과 함께했던 일족 중 하나가 이미 마련의 부군사 종리벽을 죽인 자가 영력을 사용했음을 확인했다.
두 무리의 갈등을 조장한 제삼세력이 치우 일족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두 세력의 싸움을 말린 운현의 흑의인은 치우 일족의 행사를 방해한 셈인 것이다.
어쩌면 이번 사건은 그 일에 대한 치우 일족의 복수일 수도 있었다.
“그게 사실인가?”
자공이 놀란 눈으로 진교에게 물었다.
“그럼. 운현에 있던 이들 중 우리 측 사람이 확인한 것이니 틀림없어.”
“그렇다면 대연문의 소공자와 그 주변을 감시하다 보면 두 놈의 종적을 잡을 확률이 높겠군!”
치우 일족이 흑의인을 노리고 있다면, 분명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감석보를 감시하다 보면 치우 일족과 흑의인 둘 다 잡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들은 치우 일족이 당분간 흑의인에 대해 손을 놓기로 결정했음을 모르고 있었다.
“일단은 어르신께 보고를 올리고 대연문 소공자의 행적을 파악하도록 하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사람의 신형은 마치 연기처럼 사라졌다.

* * *

천의단이 구성되고 둘째 날부터는 앞으로의 활동과 관련된 간단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단원들은 임무 시 대형(隊形)과 명령 체계, 수신호와 각종 암구호, 거기다 병법에 대한 기본 이론도 병행해서 배웠다.
오후 시간에는 간단한 검진을 배우고, 체력 훈련을 하는 것 외에는 모두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장경각에서 무공 서적을 읽거나 각 문파의 기본공을 익히는 것도 가능했다.
교관들이 있어서 각자 수련 중에 막히거나 궁금증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사실 명문대파의 제자들에게는 그다지 필요치 않은 배려일 수도 있었지만, 중소 문파 출신의 제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황금 같은 기회였다.
하지만 천성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해서 천성은 숙소에서 명상을 통해 감각과 정신력을 단련했다.
이것은 무숙이 알려 준 방법이었다.
영력과 영안의 사용은 의지와 감각의 활용에 따라 그 위력과 숙련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단계를 통해 얻은 능력 중 하나는 영력을 압축하여 형상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검기를 뽑아내듯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유자재로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압축된 영력의 위력도 이전보다 몇 배나 더 강력해졌다.
무숙의 말에 의하면, 조금 더 익숙해질 경우 영력을 칼날과 같이 얇게 압축하는 것도 가능하다 했다.
명상을 통한 의지의 조절과 단련은 이러한 방식으로 영력을 제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훈련을 시작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성아!”
한동안 깊은 명상에 빠져 있는데 천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형이 무슨 일이지?’
천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방문을 열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형?”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보통 이때 즈음은 다들 개인 수련에 바쁠 때였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부러 서두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 집에서 답장이 왔다. 너도 빨리 확인하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말이야. 후후.”
하기야 철혈문에 소식을 보낸 지 열흘이 훨씬 넘었으니 답장이 왔어도 벌써 왔어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소식이 없어 조금 걱정되던 차에 드디어 답장이 도착한 것이다.
부모님과 문도들을 본 지도 벌써 석 달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보고 싶기도 했다.
“뭐라고 쓰여 있어?”
“하하, 직접 확인해 봐.”
천성은 천룡이 건네준 서찰을 펼쳐 읽었다.
서찰은 무려 네 장이나 되었다.
내용은 별게 없었지만, 궁혁제와 궁혁도, 나머지 가족들이 다들 한마디씩 적고 있는지라 분량이 상당했다.
모두 모여서 앞 다투어 한 문장씩 적는 모습을 상상한 천성의 입가에 따듯한 미소가 걸렸다.
내용 중엔 천룡의 우승과 천성의 천의단 입단을 축하하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두 사람의 대회 결과는 철혈문에 있어서 그야말로 커다란 경사였다.
학문을 배우는 서생으로 치자면 대과에 급제한 것과 다름없었다.
앞으로 철혈문의 위상이 상당히 높아질 것은 불을 보듯 빤했다.
그렇게 흡족한 마음으로 뒷장을 넘기던 천성의 눈이 일순 커졌다.
정체불명의 자들이 철혈문을 습격했는데, 다행히도 삼선이 그들을 막아 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치우 녀석들 소행이겠구나!]
대연문이 공격당할 때부터 걱정을 하긴 했지만 별다른 연락이 없었기에 다행으로 여겼는데, 삼선이 아니었으면 철혈문도 대연문과 같은 참사를 겪을 뻔한 것이다.
‘이놈들!’
조금은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대연문의 일과는 그 무게가 또 달랐다.
가족을 건드리려 한 것은 천성으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