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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4(4화)
1장 천의단(4)
“왜? 무슨 일이라도 있대?”
천성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지자 천룡이 물었다.
사실 아직 천룡도 서찰의 내용을 확인해 보지 못한 터였다.
천성이 굳은 얼굴로 두 번째 장을 천룡에게 건넸다.
“이런! 대체 무슨 일이지?”
천룡 역시 놀람을 감추지 못하며 서찰을 상세히 읽어 나갔다.
거기에는 삼선의 방문과 침입자들과의 격투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 검치가 철혈문에 남았고, 나머지 두 스승은 무림맹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 했다.
“대체 이런 놈들이 왜 철혈문을 노린 거지?”
천룡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룡으로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대연문이 당한 일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놈들이 철혈문을 공격한 날짜가 공교롭게도 대연문이 당한 때와 비슷한 시기였다.
우연이라 보기엔 조금 꺼림칙한 면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대연문과 철혈문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 이유를 아는 천성은 어두운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일단 삼선 중 한 명이 철혈문에 남았다고 하니 당장의 위험은 없을 듯했다.
하지만 치우 녀석들이 언제 또 도발을 해 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언가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아무래도 스승님들께서 맹에 도착하면 대책을 의논해 봐야겠구나.”
천성은 천룡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삼선이 돕는다면 치우 놈들이라 해도 함부로 도발할 수 없을 것이다.
천성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연문의 참사에 분노했다가 철혈문이 무사하다는 소식에 안도하게 되는 자신을 보며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느꼈다.
“아! 그건 그렇고, 이따 저녁에 간단하게 술이나 한잔하자.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정작 우리끼리는 축하도 못했잖아.”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하하, 그러네.”
“가까운 사람들만 모여서 식사 겸 간단하게 자리를 마련할 생각이야. 취선루에서 유시 초(酉時初:오후 5시)에 모이기로 했으니 꼭 와라.”
“알았어.”
말을 마치고 돌아가던 천룡이 무언가 생각난 듯 걸음을 멈췄다.
“아, 그리고 모용 낭자도 데리고 와라.”
“아니, 왜 내가…….”
난감한 마음에 막 뭐라 반박을 하려는 천성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천룡은 멀어져 갔다.
* * *
약속 시간이 가까워 오자 천성은 근처에 있는 모용혜의 숙소로 향했다.
마침 모용혜도 외출하려던 참인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어머, 왔구나? 취선루 가려는 거지? 가자!”
모용혜도 이미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오히려 먼저 앞장서서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취성루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영호명을 비롯해 화설련, 제갈수련, 서문유란, 청명 등이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두들 무한까지 동행하면서 제법 친해진 터라 다들 거리낌 없이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군. 혹시라도 서문 소저와 혜만 부른 건가 걱정했는데.’
천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그랬다면 상당히 어색했을 것이 분명했다.
“어서 와!”
일행이 도착한 두 사람을 반겼다.
“어머, 둘이 함께 온 거야?”
제갈수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아, 아니, 같은 조라 바로 옆이다 보니…….”
당황한 모용혜가 천룡을 한 번 힐끔 쳐다본 후 변명을 했다.
“아, 맞다! 두 사람은 같은 조였지! 명이랑 나도 같은 조였으면 좋았을걸.”
‘휴…….’
화설련의 맞장구에 모용혜와 천성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축하한다! 명이, 너 조장 되었지?”
영호명 옆에 앉은 천성이 얼른 화제를 바꿨다.
“아! 운이 좋았지, 뭐…….”
영호명이 부끄럽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에휴, 이래서야 조원들이 조장을 우습게 알지. 좀 어깨도 펴고 눈에 힘도 주고 해. 이 누님이 보기에 너무 안쓰럽다.”
모용혜가 영호명의 등짝을 짝! 소리 나게 때리며 핀잔을 주자 일행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늦게나마 우승을 축하합니다, 천룡 공자.”
청명이 일어나서 포권을 하며 말했다.
“두 분 모두 대주가 되신 것도 축하드려요. 이제 대주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호호호.”
한창 서로 축하의 말들을 나누고 답례를 하던 중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어이! 이거이거, 이런 자리에는 나를 불러야지!”
그때, 입구 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취선루 입구로 일조 조장 공현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허! 이거, 벌써부터 조원들이 빠져 가지고 조장 몰래 술 마시러 다니다니! 말세로다, 말세! 아미타불!”
왜 뒤에 아미타불을 붙이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갑자기 등장한 공현의 모습에 다들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 젊은 중의 주량이 불제자답지 않게 그야말로 엄청났기 때문이다.
공현과 술을 마시려면 기본적으로 날밤을 새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아, 오늘은 간단하게 입가심만 할 생각이니, 다들 너무 걱정 마시게! 하하하!”
공현의 말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무승들은 고기도 먹고 술도 가끔 한다지만, 공현은 그 정도가 심해서 아직까지 소림에서 승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불청객 공현의 합류에도 불구하고 술자리는 제법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응? 어째 두 사람이 조금 수상한데?”
술이 한 순배 돌았을 때 즈음, 천룡과 서문유란이 서로를 향하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챈 제갈수련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뭐가?”
일행들이 잔뜩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서문유란과 천룡을 쳐다봤다.
“어머?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두 사람 은근히 슬쩍슬쩍 바라보고 히죽히죽 웃더라!”
화설련이 술기운에 발그레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천룡과 서문유란이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할 때 공현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렇다면 가끔씩 대주가 일과 끝나고 서문 조장을 따로 부르던 이유가…… 어허, 내가 이거 불제자다 보니 이런 쪽에는 숙맥이라 전혀 눈치채지 못했구려! 하하하!”
“험, 험…….”
곤란한 표정의 천룡이 할 수 없다는 듯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하하하! 이거, 들키고 말았군요. 사실, 부끄럽지만 저희 두 사람이 얼마 전부터 좋은 만남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많은 분들이 축복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천룡의 고백에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아!”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흥!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화설련이 짐짓 토라진 표정으로 서문유란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게. 그동안 내숭이란 내숭은 다 떨더니. 후후.”
제갈수련까지 합세하자 서문유란은 얼굴이 붉어진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휴…….”
이미 알고 있던 모용혜와 천성은 그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으로 두 사람의 사이가 밝혀져 버렸으니,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마음까지도 산산조각이 나는 듯했다.
무엇보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은 모용혜의 상실감은 더욱 컸다.
마치 머릿속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진 느낌이었다.
천성 역시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인사까지 하는 서문유란의 모습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미 포기했다고는 하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히 끊고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술자리가 끝나고, 모두 헤어진 뒤 천성과 모용혜는 터벅터벅 힘 빠진 모습으로 숙소로 향했다.
“야, 궁천성! 아무래도 이대로 그냥은 못 자겠다. 우리 술 한잔만 더 하자!”
답답함을 참을 수 없는지 눈썹을 치켜올린 모용혜가 소리쳤다.
“그, 그럴까?”
갑자기 빽! 소리를 지르는 모용혜의 모습에 천성은 찔끔 놀라 대답했다.
사실 천성 역시도 오늘만큼은 술을 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이미 몇 잔 거나하게 걸친 상태이긴 했으나 씁쓸한 마음을 달래기엔 한참 부족했던 것이다.
“근데 어디서? 취선루는 아무래도 좀 그렇잖아? 시끄럽기도 하고…….”
취선루의 밝은 분위기는 오늘 두 사람의 기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따로 조용한 방을 얻거나 연못가의 정자도 있었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은데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게 된다면 괜히 오해를 받을 여지도 있었다.
“그래! 아무래도 조용한 곳이 좋겠지! 외곽 쪽으로 가 보자! 까짓것, 잔뜩 마시고 오늘부로 전부 잊는 거야! 흥!”
허공을 향해 콧방귀를 날린 모용혜가 앞장서서 씩씩하게 걸어갔다.
번화가를 벗어나 얼마간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은 마음에 딱 드는 한적한 주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명일루라는 이름을 가진 조그만 주루였는데, 마침 손님도 두 사람뿐이었고, 지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주변도 조용했다.
장사가 잘 안 된다는 것은 음식 맛이 없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으나,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은 그저 조용히 술 한잔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상관하지 않고 바로 자리를 잡았다.
이미 배가 부른 탓에 간단한 소채와 술을 시킨 두 사람은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너답지 않게 웬 청승이냐?”
조용하고 심각한 모용혜의 모습은 처음인지라 천성은 지금 이 자리가 상당히 어색했다.
“새 출발을 하기 위한 의식이랄까……. 각오를 다지는 거야.”
모용혜가 독한 화주를 다시 자신의 잔에 따르더니 한참을 노려본 후 입술로 가져갔다.
그 모습이 어쩐지 비장해 보였다.
“천천히 마셔라. 그러다 속 버린다.”
“후후, 궁천성,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너도 지금 속이 말이 아닐 텐데?”
“글쎄, 난 이미 포기한 지 오래니까…… 뭐,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천성의 말에 모용헤가 피식 웃었다.
“참 이상해……. 막상 이렇게 되니까 너무 허무하네……. 그간 왜 그렇게 집착했던 건지 억울하기도 하고, 이제는 내가 정말 천룡 오라버니를 사랑한 건지조차 모르겠어.”
한숨을 내쉬며 모용혜의 모습이 왠지 더없이 쓸쓸해 보였다.
“넌 유란 언니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 본 적이 있니?”
천성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너나 나나 사랑을 해 보지 않았는데, 과연 지금 하고 있는 게 사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천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왜 서문유란에게 집착했을까?
왠지 모를 끌림, 동질감, 연민…….
그런 것들을 과연 사랑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천성은 모용혜의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동정이든 사랑이든 마음이 서문유란에게로 움직이는 것은 천성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연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쓴웃음을 지은 천성이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단숨에 비웠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침울한 분위기는 결국 잔뜩 술에 취한 모용혜에 의해 깨졌다.
역시 그녀에게 심각한 역할을 기대하기는 무리였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