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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4(5화)
1장 천의단(5)
“딸꾹! 야! 나 이뻐, 안 이뻐? 어라? 왜 대답이 없어! 안 이쁘다는 거야?”
“아니, 이, 이쁘지…….”
“근데 왜! 내가 아닌 유란 언니냐고! 내가 뭐가 모자란데! 성격 좋지! 몸매 되지! 얼굴 되지! 빠지는 게 뭐냐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는 모용혜 때문에 천성은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다른 손님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취선루 같았으면 당장에라도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왜 나한테 화풀이야. 젠장!’
천성도 답답하긴 매한가진데 모용혜의 술주정까지 받아 줘야 되니 죽을 맛이었다.
자신의 아픈 마음은 누가 달래 준단 말인가.
“야이, 나쁜 놈아! 잘 먹고 잘살아라! 꺼―억! 나―아를 버―리고 가시는 니―임은…… 훌쩍, 시입 리도…… 흐흑, 왜 하필 유란 언니야! 으아앙! 이런 나쁜 자식아!“
“야, 야…… 지, 진정해! 나 천성이거든!”
마침내 대성통곡을 하는 모용혜를 달래느라 천성은 그간 먹은 술이 다 깨고야 말았다.
워낙 난리를 피우니 주인마저도 힐끔힐끔 불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어느새 시간도 상당히 흘러서 자정이 지난 지 한참이었다.
모용혜도 이제 어느 정도 지쳤는지 혼자서 웅얼거리고 있었다.
하기야 고급술도 아닌 독한 화주를 세 병이나 혼자 비웠으니 취할 만도 했다.
“이봐, 모용 낭자! 그만하고 이제 숙소로 들어가야지!”
피곤한 표정으로 천성이 모용혜를 흔들어 깨웠다.
모용혜가 쓰윽 고개를 들더니 풀린 눈으로 천성을 바라보았다.
“숙소? 아, 그렇지. 들어가야지. 그래, 가자!”
하지만 휘청거리며 일어서던 모용혜가 결국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쿠당탕!
재빨리 천성이 팔을 잡아 바닥에 부딪치는 것은 면했으나 모용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운기해서 술기운 좀 몰아내고 정신 차려!”
“아! 그렇지, 운기. 운기! 걱정 마, 운기∼! 큭큭큭!”
의자에 철푸덕 주저앉은 모용혜가 딸꾹질을 한 번 하더니 두 손을 합장하고 자세를 잡았다.
“그건 기도고…….”
“맞다! 큭큭큭, 아…… 근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딸꾹, 외―엔쪽으로 돌리던가, 오―른쪽으로 돌리던가? 진짜 헷갈린다, 그지? 크큭. 에이, 몰라. 걍 아무 데나 돌려!”
킥킥대며 웃던 모용혜가 귀찮다는 듯 내뱉은 말에 천성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야, 야! 그, 그만!”
운기를 함부로 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커헉!”
쿵!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모용혜가 탁자 위로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서, 설마! 주화입마!”
놀란 천성이 얼른 달려가 모용혜를 살폈다.
“저, 정신 차려, 모용혜!”
천성이 막 영안을 열어 모용혜의 상태를 확인하려 할 때였다.
[괜찮다. 그냥 술 취해서 자고 있는 거다…….]
무숙의 목소리에 맥이 풀린 천성이 의자에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르릉! 퓨∼!
이젠 아예 코까지 골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치우 일족보다 무서운 아이구나…….]
무숙의 말마따나 천성은 마치 전쟁이라도 치른 듯 진이 빠져 버린 상태였다.
“저…… 손님, 계산 좀…….”
그때, 주인이 다가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더 사고 치기 전에 빨리 내보내고 싶은 것이리라.
천성이 한숨을 쉬며 모용혜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모용혜를 깨워서 움직이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였다.
‘영력으로 술기운을 몰아낼 수는 없나요?’
[강휘성 때 해 봐서 알겠지만, 아직 네 실력으로 다른 사람의 기를 움직이는 것은 역부족이다. 거기다 뇌에 들어간 기운을 움직이는 데는 상당히 복잡하고 세밀한 작업이 필요해. 본인 스스로 배출해 내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이 건드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
하기야 그렇다면 독에 대한 해독제가 왜 필요하랴.
결국 천성이 업고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끄응.”
천성은 계산을 마친 후 모용혜를 등에 업고 명일루를 나섰다.
다행히 새벽이라 인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무림맹 근처에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혹시라도 모용혜를 업고 가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면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천성이 번화가를 피해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막 골목길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딸꾹! 야! 이놈! 웬 놈이냐! 당장 날 내려놓거라! 어딜 감히!”
갑자기 깨어난 모용혜가 천성의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겼다.
“으악! 야, 나 천성이야! 인마!”
“어? 천성이구나∼! 난 또 납치범인 줄 알았지. 크크크, 아이구, 요 기특한 거. 누님이 취했다고 업어 주는 거야? 헤헤헤, 그럼 좀 더 부탁할게.”
풀썩!
드르렁∼! 퓨∼!
기특하다며 천성의 볼을 잡아 늘리던 모용혜가 다시 잠들었다.
“아놔! 진짜 확 버리고 갈까 보다!”
그때, 천성의 감각에 삼십 장쯤 앞에서 사람의 기척이 잡혔다.
영안을 열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기세로 보아 무인인 듯했다.
‘설마, 아는 사람은 아니겠지?’
이제 와서 돌아가기도 애매했다.
눈살을 찌푸린 천성이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응? 이게 누구신가? 큭큭큭!”
한데 모른 척하고 지나치려던 천성의 마음과 달리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런!’
천성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맞은편에서 오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상관중혁이었다.
‘하필이면 지금!’
인적이 없는 골목길에 왜 놈이 나타난 것인지 알 도리는 없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놈이 그냥 지나칠 리는 없었다.
거기다 모용혜까지 있는 상황.
얼마 전 모용혜가 성질을 잔뜩 건드려 놓았던 것을 놈이 잊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천성은 함부로 힘을 드러낼 수 없는 입장.
몇 대 맞고 끝낼 수 있다면 최선이었고, 놈이 검이라도 빼 든다면 어느 정도 상처를 입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어라, 등 뒤에 계집은? 크하하하! 하늘이 날 돕는구나! 이런 곳에서 모용 계집을 만나다니.”
천성의 어깨 위로 드러난 모용혜의 얼굴을 확인한 상관중혁이 광소를 터뜨렸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모용혜와 천성을 노려보는 상관중혁의 모습으로 보아 말로 넘어가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어디, 그 잘난 혀를 여기서도 놀릴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아예 작심을 한 듯 비릿한 미소를 입에 문 상관중혁이 서서히 천성을 향해 다가왔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힘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겠군.’
등에 업힌 모용혜 때문에라도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일단 조금 더 버텨 보거라! 힘을 사용하게 되면 놈을 살려 둘 수 없다!]
막 영력을 끌어 올리려던 천성이 무숙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힘을 드러내고도 천성의 정체를 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관중혁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무숙이 깨우쳐 준 것이다.
아무리 상관중혁이 망나니라 하나 아직 천성에게 죽을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이유로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젠장!’
천성은 일단 모용혜의 상태를 확인해 봤다.
다행히 그녀는 깊이 잠이 든 상황이었다.
“잠깐!”
다급히 상관중혁을 멈춰 세운 천성이 모용혜를 한쪽 구석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상관중혁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허, 꼴에 여인을 지켜보겠다? 주제도 모르는 놈!”
순간, 상관중혁의 신형이 사라졌다.
퍽!
천성의 명치에 상관중혁의 주먹이 꽂혔다.
“크윽!”
눈에 훤히 보이는 공격이었으나 천성은 피하지 않았다.
퍼억!
다시금 천성의 안면에 상관중혁의 왼 주먹이 작렬했다.
“네놈이!”
퍼억!
“감히!”
퍼억!
“나를!”
상관중혁의 눈동자에 광기가 어렸다.
“우롱하는 것이냐!”
퍼억! 퍽! 퍽!
연달아 이어진 십여 회의 주먹과 발길질을 천성은 묵묵히 받아 냈다.
“크윽!”
몸을 숙인 채 천성이 신음을 흘렸다.
태초의 파편에 의해 재구성된 튼튼한 육체 덕분에 부상을 입진 않았으나, 주먹에 내기를 실었음인지 제법 통증이 있었다.
하지만 상관중혁은 이 정도로는 마음에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 제법 잘 버티는구나. 어디, 오늘 네놈이 얼마나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마!”
스윽!
잔뜩 독이 오른 상관중혁이 결국에는 검을 뽑아 들었다.
‘젠장, 나보고 어쩌라구!’
천성은 미칠 지경이었다.
검을 뽑아 든 이상 피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천성은 최대한 머리를 굴려 놈의 손아귀를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 내려 애썼지만, 쉽게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오늘 누군가 한 놈만 걸려라 하고 벼르던 차에 잘되었구나. 네놈을 죽이고 저년 또한 맘껏 가지고 놀다 처참하게 죽여 주마! 크크크큭!”
상관중혁이 조소를 날리며 혀로 입가를 핥았다.
잘난 체하던 모용세가의 계집년을 맘껏 유린할 생각을 하니 절로 아랫도리가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천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젠장, 살려 둘 가치도 없는 놈이구나…… 잠깐!’
결심을 굳힌 천성이 영력을 끌어 올리려다 말고 갑자기 눈동자를 빛냈다.
‘무숙, 심령으로 상대에게 말을 할 수는 있다고 했죠?’
[그렇지. 직접 소리를 낼 수는 없어도 지금 너와 대화하는 것처럼 심령으로 말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좋아요! 잘하면 놈을 쫓아 보낼 수 있겠군요!’
천성이 영력을 끌어 올려 영안을 열었다.
후우우우웅!
미간에 정신을 집중하자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올리고 있는 상관중혁의 움직임이 굼벵이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쉬이이이이익!
순간, 상관중혁의 뒤통수로 주먹만 한 돌덩이가 날아들었다.
“엇!”
휘익!
놀란 상관중혁이 재빨리 고개를 젖혔고, 제법 빠른 속도로 날아든 돌덩이가 아슬아슬하게 머리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천성이 염동력을 이용해 돌을 날린 것이다.
“누구냐!”
긴장한 표정의 상관중혁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돌멩이가 날아온 방향으로 보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등장했다 여긴 것이다.
그 순간, 천성의 몸에서 빠져나온 무숙이 상관중혁의 몸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