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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4(6화)
1장 천의단(6)
[네 이놈!]
“허억!”
갑작스럽게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상관중혁이 기겁을 했다.
마치 육합전성인 양 어디서 들려오는지조차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누, 누구시오!”
상관중혁이 감각을 집중해 재빨리 사방을 살폈으나 전음을 보낸 상대방의 기척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상대는 상관중혁이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초극의 고수임이 분명했다.
[어지간하면 그냥 지나치려 했더니 네놈의 행태가 그야말로 악독하기 그지없구나!]
“사, 사정도 모르면서 나, 남의 일에 참견 말고 그냥 가던 길이나 가시오!”
상관중혁이 간신히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하지만 잔뜩 굳어 있는 얼굴이, 말과 달리 몹시 긴장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내가 처음부터 모든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거늘, 네놈이 감히 본좌를 우롱하려는 게냐!]
머리가 멍멍할 정도로 커다란 괴인의 목소리에 상관중혁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이자들이야말로 몹쓸 죄인들이오. 그래서 내가 벌을 내리고 있는 것이오!”
아직 미련이 남은 상관중혁이 억지스러운 변명을 늘어놓았다.
[크하하하하하! 감히 네놈이 무엇이건대 사사로이 사람을 벌한다는 말이냐! 굳이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그냥 보내 주려 했더니 도저히 안 되겠구나!]
우우우우웅!
괴인으로 변한 무숙이 광소를 터뜨린 순간, 놀랍게도 상관중혁 근처에 있던 돌덩이들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두 번째 단계를 넘어선 후 더욱 강력해진 천성의 염동력이 발휘된 것이다.
곧이어 수십 개의 돌덩이들이 상관중혁을 중심으로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허, 허공섭물!”
상관중혁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기를 이용해 물체를 움직이는 능력은 최소 화경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보여 줄 수 있는 신기.
결국 정체불명의 괴인이 화경을 넘어선 고수라는 이야기였다.
상관중혁이 아무리 오룡의 일원이고 절정을 넘어섰다 하지만, 화경 고수에게는 일초지척도 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괴인이 독하게 손을 쓴다면 목숨까지도 위험한 상황인 것이다.
남의 목숨을 함부로 여기는 자일수록 자신의 안위는 더 소중한 법이다.
간담이 서늘해진 상관중혁이 재빨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 어르신, 제가 자, 잘못했습니다! 이대로 물러가겠으니,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땅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깊이 머리를 숙인 상관중혁이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이제는 말투마저 무척 공손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용서를 빌었음에도 상관중혁을 둘러싼 돌멩이들은 꿈쩍도 안 했다.
괴인에게서 아무런 응답이 없자 상관중혁은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왜 갑자기 이런 고수가 나타난 거야!’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이를 악문 상관중혁이 바닥에 이마를 찧어댔다.
“어리석은 이놈을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쿵! 쿵!
심령이 연결된 상태라 무숙이 상관중혁에게 하는 말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던 천성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무숙의 연기에 예상한 것보다 효과가 컸다.
‘너무 재미 붙이시면 곤란해요. 이만 끝내자구요.’
괜히 다른 이들이라도 지나간다면 수습하기가 곤란해질 것이다.
[좋다! 본좌도 너같이 하찮은 놈 때문에 손을 더럽히고 싶진 않으니,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마. 내 맘이 바뀌기 전에 당장 여기서 꺼지거라!]
무숙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관중혁이 허겁지겁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어느새 무숙은 천성의 몸으로 돌아온 후였다.
[어떠냐? 내 연기가 제법이지? 후후후, 놈이 사색을 하고 도망치는 꼴을 보니 통쾌하기 그지없구나!]
천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앞으로 천의단에서 계속 상관중혁과 마주쳐야 한다 생각하니 골치가 아파 왔다.
차라리 오늘 죽이는 것이 나중을 위해 좋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아직까지 사람의 목숨을 그리 쉽게 생각 할 만큼 천성은 모질지 못했다.
세상모른 채 잠이 든 모용혜를 다시 업어 숙소까지 데려다 준 후 방으로 돌아온 천성은 침상에 피곤한 몸을 뉘였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연무장에 집합한 천성은 상관중혁의 날카로운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내며 태연히 하품을 했다.
다사다난했던 어젯밤 일들로 인해 매우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상관중혁은 노려보는 것 외에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하기야, 아무리 막나가는 놈이라 해도 감히 무림맹 내에서 함부로 문제를 일으킬 배짱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어제의 일을 천성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을까 하여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상관중혁쯤이야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는 천성이 일부러 귀찮은 일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놈이 어떻게 생각하든 별 관심도 없는 천성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을 때였다.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모용혜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헤헤, 어제는 내가 좀…… 과음을 했지?”
모용혜는 자신이 명일루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운기를 해서 술기운을 몰아내려 한 것까지가 그녀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너무 무리해서 마신 탓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고야 말았다.
혹시라도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뒤늦게 걱정되었다.
“아, 말도 마라. 너 때문에 머리카락 다 뽑히는 줄 알았다.”
“머, 머리?”
모용혜가 뜨끔한 표정으로 움찔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천성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긴 것 같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내가 어제 성이 등에 업혀서…….’
조금씩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모용혜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아무리 격의 없는 친구 사이라 하지만 다 큰 처녀가 사내의 등에 업혀서 숙소까지 온 것이다.
비록 옷을 입은 상태이긴 했으나 자신의 가슴과 허벅지가 천성의 몸과 밀착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니 비교적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성격의 모용혜로서도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 어디 성이가 남자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모용혜가 피곤한 얼굴로 서 있는 천성을 슬쩍 곁눈질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천성과 이토록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까워진 것이 신기했다.
물론,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 돕다 보니 자연적으로 동질감을 느낀 부분도 있을 것이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임에도 함께 있으면 부담 없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제도 그렇게 마음 놓고 술을 마신 것이리라.
어제 일 때문인지 오늘따라 천성이 조금은 더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성이가 무공 실력이 조금 떨어질 뿐이지 다른 것은 별로 빠지…… 는구나.’
모든 면에서 그저 평범할 뿐,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천성이었다.
물론, 어찌 보면 천의단에 들어온 것 자체가 평범과는 거리가 먼 것이긴 했으나, 이곳에 있는 수많은 후기지수들 중 천성보다 못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 그래. 성이는 평범한 게 매력이지…….’
“무슨 일 있어? 얼굴도 빨갛고, 왜 그리 안절부절못해?”
그때, 갑자기 천성이 모용혜의 어깨를 툭, 쳤다.
“아, 아니야. 일은 무슨 일! 호호호.”
화들짝 놀란 모용혜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내, 내가 무슨 생각을!’
모용혜는 잠시 엉뚱한 상상에 빠진 것이 부끄러워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아무래도 어제 술을 너무 마셨나 보다.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 쉬는 게 낫겠다. 형한테는 내가 잘 말해 줄게.”
‘맞아, 아무래도 어제 마신 술 때문에 내가 정상이 아닌 거야. 이제 막 천룡 오라버니를 포기하려는데…….’
모용혜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내저으며 어이없는 생각이라 여기고는 흘려버렸다.
“그, 그래. 몸이 좀 안 좋기는 하네. 그럼 부탁할게…….”
도망치듯 연무장을 빠져나가는 모용혜를 보며 천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2장 동정수로채(1)
무림맹 대회의실.
무림맹의 수뇌부와 대의원들이 맹주 남궁영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대의원은 무림맹의 의사결정에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자들로, 각 문파에서 파견된 대표라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맹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나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에만 소집이 된다.
정례 회합이 아님에도 이렇듯 급하게 대의원들을 비롯한 수뇌부가 모이게 된 이유는 아침 일찍 악양에서 날아온 한 장의 전서 때문이었다.
“부군사는 자세한 상황을 모두에게 설명해 주시오.”
무림맹주 남궁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명했다.
군사 제갈휘는 마련과의 협상을 위해 서녕으로 향한 상황이었기에 지금 회의는 두 명의 부군사 중 제갈륜이 진행하고 있었다.
남궁영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들 제갈륜을 주시했다.
잠시 좌중을 둘러본 제갈륜이 입을 열었다.
“동정수로채가 악양의 무림맹 지부와 백검문에 선전포고를 했다 합니다. 그들은 악양이 자신들의 영역이니 모든 사업장을 넘기고 봉문할 것을 백검문에 요구했습니다. 더불어 무림맹 지부의 철수도 요청했습니다.”
“저런 불한당 놈들!”
“허허!”
여기저기서 어이가 없다는 듯 동정수로채를 성토하며 목청을 높였다.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그것은 곧 전쟁을 하자는 말이나 같은 것이다.
“대체 놈들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오? 이것은 분명 본 맹에 대한 도전이 아니오?”
화산의 장로이자 무림맹 대의원 중 한 명인 송화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봐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었다.
“혹, 사혈맹에서 개입한 것이오?”
곤륜의 유백 진인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동정수로채에서 이유도 없이 함부로 싸움을 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일 사혈맹이 개입했다면 정사대전으로 번질 수도 있는 심각한 사안이었다.
“아직까지 그런 정황은 없습니다만,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모두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마련과의 문제만 해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사혈맹마저 도발해 온다면,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 되는 것이다.
“동정수로채가 대체 무슨 이유로 강짜를 부린다고 생각하는가?”
남궁영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제갈륜에게 물었다.
“지금으로서는 저희 군사부에서도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다만 몇 가지 가정을 세워 보자면, 일단 사혈맹 내에서 놈들의 입지를 키우기 위한 행동일 가능성도 있고, 혹은 그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사혈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가정들 역시 동정수로채의 움직임을 설명하기엔 너무 빈약합니다.”
총채주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무리한 도발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사혈맹이 돕는다 해도 무림맹의 모든 화살은 일단 그들에게 향하게 될 터이고, 결국 동정수로채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동안 쌓아 놓은 기반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도 있는 상황.
만일 사혈맹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 해도 동정수로채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반발을 해야 옳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