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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4(7화)
2장 동정수로채(2)
“놈들의 사정이 어떻든 일단은 무언가 대응을 해야 하지 않겠소?”
사천당문 당지독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 중요한 것은 어떻게 놈들을 상대할 것이냐였다.
“아직까지 사혈맹 측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장에 개입할 의사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그들의 개입을 완전히 배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하니 동정수로채와 사혈맹의 지원 세력까지도 미리 대비를 하여 넉넉히 지원 전력을 짜야 할 것입니다.”
제갈륜의 말에 남궁영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압도적인 전력을 꾸려 악양으로 보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마련과의 협상이 틀어질 경우도 대비해야 했기에 쉽지가 않았다.
‘적어도 무력단 하나는 파견해야 사혈맹 측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인데…….’
백호단이나 청룡단을 파견한다 해도 사혈맹이 움직이면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 그들이 있었군!’
그야말로 이번 일에 적절한 이들을 생각해 낸 남궁영의 눈동자가 빛났다.
“천의단을 파견하는 것이 어떻겠소?”
남궁영의 말에 대전에 모인 수뇌부들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천의단은 천하영웅대회를 통해 뽑은 젊은 후기지수들만으로 구성된 새로운 단체였다.
그런 까닭에 사실상 기존 무림맹 전력 외의 인원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게다가 단주인 모용단천을 비롯해 초절정고수가 세 명이나 존재했기에 전력 면에서도 오히려 다른 단을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단원 대부분이 이제 겨우 무림에 첫발을 디딘 애송이들이란 점.
경험이 너무 부족했고, 자칫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섣불리 움직인다면 오히려 적들의 계략에 쉽게 무너질 수도 있었다.
길게 보면 그들 하나하나가 미래의 정도무림을 이끌 소중한 인재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함부로 잃는다면 그것은 악양을 잃는 것보다도 더 큰 손실이 될 수도 있었다.
반면 장점도 많았다.
젊은 후기지수들에게는 공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부족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최상의 무대이기도 했다.
거기다 대회 이후 자칫 나태해질 우려가 있는 후기지수들의 정신 상태를 다시 날카롭게 가다듬기 위해서는 강력한 적과의 싸움만 한 게 없었다.
천의단의 조직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덤이었다.
“아직 단이 구성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경험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거기다 그들 중 상당수가 각파의 후계자들인데, 자칫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맹에 그 화살이 돌아올 것입니다.”
제갈륜의 말은 그나마 완곡한 표현이었다.
사실, 최악의 경우 맹이 분열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 아들도 함께할 것인데, 누가 불만을 토하겠소? 게다가 안위를 생각하며 싸움을 피한다면 어찌 진정한 무인이라 하겠소? 오히려 이번 기회에 후기지수들의 능력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하오.”
단호한 남궁영의 말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맹주가 자신의 아들을 직접 전장으로 보내는데 어느 누가 뒤로 숨을 수 있겠는가.
“맹주의 말이 옳다고 봅니다. 아직 어리고 부족한 점이 있다 하나 그들 역시 칼밥을 먹고사는 무인들! 죽음을 두려워해서야 어찌 이 험난한 강호를 이끌어 갈 수 있겠소? 오히려 이번 기회야말로 우리 제자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리라 보오!”
공동파 장로인 배명 진인까지 나서서 남궁영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자 결국 만장일치로 천의단의 악양 파견이 결정되었다.
* * *
약 보름가량의 간단한 훈련이 끝나고 나자 오 일에 한 번씩 있는 아침 조회를 빼곤 천의단의 생활은 자유로웠다.
훈련 십이 일째 되는 날, 화산으로 향했던 감석보가 돌아와 천성이 있는 일조에 합류했다.
많은 이들이 위로해 주었지만, 감석보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전보다 더욱 과장되고 호들갑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가슴속의 슬픔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천성과 조원들은 더 어색하고 착잡하게만 느껴졌다.
조회날도 아닌데 아침부터 소집된 천의단 단원들은 다들 조금은 불안한 표정으로 단주와 대주들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강호의 정세가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보니 무슨 일이라도 터진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하하하! 다들 표정들이 왜 이래? 누가 죽기라도 했답니까!”
조금 늦게 도착해 잔뜩 과장된 말투로 호탕하게 소리치던 감석보가 순간 멈칫했다.
자신이 엉겁결에 뱉어 낸 말에 결국 대연문의 희생자들이 떠오른 것이다.
조원들의 표정이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스스로를 상처 내는 말들을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인간은 역시 감석보밖에 없었다.
“하하하! 난 아무렇지도 않소! 그래도 부모님은 살아 계시니 참으로 다행이 아니오! 하하하하…….”
공허한 감석보의 웃음소리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감 공자, 세령이는 잘 지내나요?”
모용혜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 그렇습니다. 처음엔 많이 울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지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감석보를 바라보며 천성은 다시 한 번 치우 일족에 대해 복수를 다짐했다.
그때, 모용단천과 함께 세 명의 대주가 등장했다.
연무장 앞쪽 중앙에 마련된 단상 위로 단장 모용단천이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모용단천은 굳은 얼굴로 잠시 단원들을 둘러본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에게 첫 번째 임무가 주어졌다.”
순간, 장내를 매운 후기지수들의 눈에 긴장감이 어렸다.
첫 번째 임무!
그들이 지금껏 기다리던 순간이 드디어 온 것이다.
“동정수로채의 수적들이 어이없게도 무림맹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우리는 악양의 백검문을 도와 놈들을 일벌백계할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무림맹 악양 지부에 도착한 후 알려 줄 것이니 일단 오늘은 각자 출전을 위한 준비를 하기 바란다. 이상!”
간단하게 말을 마친 모용단천이 집무실로 사라지자 연무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동정수로채를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최근 들어 사파에서 상당한 기세를 올리고 있는,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수룡왕이라는 자가 총채주가 되면서 그 전력이 상당히 탄탄해졌다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결코 두려워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때려잡아 공을 세우느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한참 혈기왕성한 천의단원들에게는 이번 일이야말로 자신의 이름을 알릴 최고의 기회인 것이다.
“다들 들었겠지만, 내일 아침 일찍 악양으로 움직여야 하니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대주들이 다시 한 번 주의를 준 후 단원들을 해산시켰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천의단은 무림맹을 나서 악양으로 향했다.
동정수로채는 사혈맹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 개의 문파 중 하나였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정수로채는 한낱 수적 집단에 불과했고, 사혈맹에서도 별다른 위치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삼 년 전 도백이란 자가 갑자기 등장해서는 수채들을 평정하고 총채주의 자리에 오른 이후부터 새로운 사파의 강자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도백이란 자는 동정호에 산재한 수채들 중 한 곳의 채주였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신비에 싸인 인물이었는데, 그 수완이 대단히 뛰어나서 삼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동정수로채를 사혈맹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단체로 성장시키는 업적을 이루어 냈다.
게다가 무공 또한 이미 초절정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동정수로채의 전력은 현재 드러난 부분만 해도 백검문과 무림맹 악양 지부를 월등히 넘어서고 있었다.
원래 인원수야 워낙에 많은 곳이었고, 소속된 수채가 스무 개가 넘다 보니 고수의 숫자도 제법 되었다.
그나마 그동안은 독립된 수채에 가까웠기에 가지고 있던 힘을 십분 발휘하지 못했지만, 도백이 총채주로 등극한 이후 수채들은 통합된 지위 체계 아래서 온전하게 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만일 무림맹의 도움이 없다면 백검문과 무림맹 악양 지부는 그들을 당해 낼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첫 임무에 대한 기대와 긴장이 단원들의 걸음을 서두르게 했다.
삼백이 넘는 인원이 이동하다 보니 숙식을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삼백 명을 수용할 만한 객잔이 있는 곳은 큰 도시 외에는 없었기에 대부분 노숙을 해야 했다.
임무 중인지라 천성은 천룡과도 따로 대화를 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대주의 위치에 있다 보니 동생을 특별히 대우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체 왜 동정수로채가 무림맹 지부를 공격한 것일까?”
모용혜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였다.
긍정적인 성격과 빠른 회복력은 그녀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였다.
“감히! 수적 놈들이 겁대가리를 상실하지 않고서야 어찌 무림맹에 정면으로 덤빈단 말인가. 내가 볼 땐 아무래도 그 도백이란 놈이 정신이 나간 게야! 안 그런가, 아우?”
어느새 천성에 대한 호칭을 아우로 바꾼 감석보였다.
천성도 대연문 사태 이후로는 미안한 마음이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글쎄요…….”
천성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감석보의 이야기를 흘렸다.
감석보가 뭐라 떠들든 천성에게 당장의 관심거리는 동정호였다.
복희가 이야기했던 다음 열쇠의 위치가 바로 동정호였기 때문이다.
‘동정호라…….’
군산의 지하에 두 번째 열쇠가 있다고 들었다.
‘가만. 혹시 이번 일도 치우 놈들과 연관이 있는 것 아닐까?’
우연치고는 실로 묘했다.
이미 사혈맹과 마련을 이용해 음모를 꾸민 전력이 있는 치우 일족이었다.
동정수로채를 움직이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동정수로채 사건은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룡왕이라 불리는 총채주 도백은 심기가 깊고 머리가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한데 그런 자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무림맹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만일 치우 일족과 연관된 것이라면 열쇠와 관련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악양에 도착하면 한 번 살펴봐야겠군.’
임무 중에 시간을 낼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었으나 무숙을 이용하면 어느 정도 가능할 것도 같았다.
치우 일족이 열쇠를 획득하도록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시간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반드시 열쇠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